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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가치

LIFESTYLE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열린 오페라 <탄호이저>를 통해 바라본 변함없는 가치에 대하여.

잘츠부르크의 호엔잘츠부르크성(소금성).

체크인하는데 호텔 직원이 묻는다. 잘츠부르크는 처음이냐고. 1993년에 오고 30년 만이라고 하니 흠칫 놀라다 “그때와 똑같다”며 재치 있게 답한다. 유럽을 숱하게 드나들었건만, 정작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잘츠부르크는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너나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 컸다. 그럼에도 나를 잘츠부르크로 다시 불러들인 것은 지난봄 부활절 축제에서 막을 올린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였다. 공교롭게도 청소년기에 맨 처음 들은 바그너의 작품이었고, 듣자마자 온몸이 굳은 듯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필자의 음악 감상 조류를 크게 돌려놓은 것도 <탄호이저>였다. 교향악에서 무대 음악으로, 고전에서 현대로. 어쨌든 <탄호이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갈 적당한 핑곗거리임이 틀림없었다.
이번 공연을 지휘한 안드리스 넬손스 역시 필자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듯하다. 그는 1978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르네상스 음악 연주 단체를 창단한 합창 지휘자였다. 아버지의 단원들 사이를 기어 다니던 넬손스는 다섯 살 때 처음 <탄호이저>를 관람할 만큼 이 작품과 인연이 깊다. 그만큼 이해력이 남다른 그가 지휘하는 공연이라는 점도, 인기가 절정에 오른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탄호이저 역할로 데뷔한 점도, 세계적 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참여도 전부 <탄호이저>로 몸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어떤 이야기인지 먼저 간단히 살펴보자.

잘츠부르크의 호엔잘츠부르크성(소금성).

일제히 한 곳을 향해 활을 쏘는 서곡의 한 장면. ©Monica Rittershaus

검은 인간과 싸우는 탄호이저의 모습. ©Monica Rittershaus

1막 바르트부르크성 기사 탄호이저는 비너스 여신에게 푹 빠진다. 그는 여신과 함께 환락의 동굴에 머무느라 기사로서 의무 따위는 까맣게 잊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각성한 그는 사랑의 여신을 떠나 연인 엘리자베스와 동료 기사들이 기다리는 성으로 돌아온다.
2막 애타게 탄호이저를 기다리던 연인 엘리자베스와 탄호이저의 절친 볼프람이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신성한 사랑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탄호이저는 육체적 쾌락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좌중의 분노를 사고, 쫓겨난 그는 교황에게 용서받을 때까지 돌아올 수 없다.
3막 탄호이저가 없는 바르트부르크는 의미가 없다. 돌아오지 않는 탄호이저를 위해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희생할 테니 부디 탄호이저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성모에게 기도한다. 교황은 속죄를 청하는 탄호이저에게 지팡이에 절로 싹이 나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낙담한 그는 차라리 비너스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장례 행렬과 함께 탄호이저가 구원받았다는 합창이 들린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혹자는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여성을 공동체의 전리품으로 삼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말이다. <탄호이저>가 순결한 여성을 이상화하고 엘리자베스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전근대적 설정이 뼈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리타분한 내용에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바그너의 음악 때문일 터. 탐미적 관현악과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는 화성은 언어를 초월하고 진부한 주제마저 잊게 만든다. 음악뿐일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출은 <탄호이저>에 더욱 깊이 매료시킨다. 철학적 안목과 연극, 무용, 영상, 조형 장치를 사용해 독창적 방식으로 작품을 다루는 데 정평이 난 그가 표현한 <탄호이저>는 이렇다. 1막에서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쾌락에 도취했다가 돌연 외친다. “지나쳐! 그만!” 끝없는 허영에 지쳐버린 그의 앞에서 비너스가 갑자기 엘리자베스로 변한다. 아름다움을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자 한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는지. 한편 카스텔루치는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몰래 여자를 관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상의를 탈의한 궁사들이 일제히 사격한다. 더는 쏠 자리가 없을 때까지 사격이 이어진다. 탄호이저가 경험한 관능의 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듯하다. 이어 카스텔루치는 2막의 신성한 노래 경연에선 비너스를 동경하는 탄호이저 근처에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처럼 마네킹 조각을 무대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타르처럼 검은 물질로 점철된 인간과 싸우는 장면이 나타난다. 유혹에 굴복한 기사 탄호이저가 아닌가!

위쪽 비너스의 동굴 속에서 쾌락에 빠진 탄호이저. ©Monica Rittershaus
아래쪽 잘츠부르크 축제 회관 인근의 잘자흐강.

잘츠부르크의 길 호텔에서 나를 맞이한 직원의 말을 곱씹어본다. 정녕 30년 동안 잘츠부르크는 변하지 않았을까? 작고 한적하지만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이곳. 클래식 음악 애호가부터 대중까지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탄호이저> 같은 대작을 선보이는 이 잘츠부르크는 사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왔다. 잘츠부르크 축제는 1920년에 시작한 이래 매년 여름 전 세계 클래식 애호a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초기부터 빈 필하모닉이 축제에 상주한 데다 클래식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 중 한 명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빈 필하모닉이 반주하는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축제와 빈 필하모닉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러나 1964년, 카라얀이 빈 국립 오페라와 반목하면서 이들은 인연을 상실했다. 꼭 탄호이저가 떠난 바르트부르크성의 모양새가 아닌가. 이후 카라얀은 1967년 부활절 축제를 창설해 자신의 악단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름 축제의 주축이던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의 작품 대신 바그너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로부터 2012년까지 잘츠부르크의 부활절을 책임졌던 것. 하지만 2010년부터 불거진 운영진의 공금횡령과 수사, 자살 기도 등 떠들썩한 이슈로 부활제의 이미지가 퇴색했고 급기야 전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들이 잘츠부르크에서 독일 바덴바덴 부활절 축제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렇게 2013년부터 작년까지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올해는 안드리스 넬손스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왔다. 공동체 내 이런 다툼과 이동은 그야말로 <탄호이저> 2막의 내용처럼 보인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사랑과 욕망의 결정체인 인간을 보여주지만, 나아가 어떻게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같은 연장선에서 잘츠부르크가 놓지 말아야 할 가치도 비슷하지 않을까. 구성원의 갈등 속에서도 원만히 해결하며 올해 선보인 <탄호이저>처럼 오래된 고전을 늘 새것처럼 거듭나게 해야 한다. <탄호이저> 3막에서 카스텔루치는 탄호이저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 연출한다. 두 사람은 극 중 이생에서 결합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카스텔루치는 두 뼛가루 더미 아래에 탄호이저와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두 가수의 이름 ‘요나스’와 ‘마를리스’를 적었다. 이 둘은 무대에서 뼛가루를 서로 섞는다. 그리고 무대 전면에 적힌 ‘수백만 년이 흘러간다’는 문구 앞으로 허공에 멈춘 화살이 보인다. 이 화살은 두 사람이 언젠가 하나 될 때까지 수백만 년을 날아갈 것이다. 사랑을 표현한 이 장면에서 문득 잘츠부르크가 이렇게 변치 않고 날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후 4시에 시작한 공연이 9시가 넘어 끝났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높이 솟은 소금성을 올려다본다. 마치 ‘변함없는 가치’의 주제가라 할 만한 <탄호이저> 속 ‘저녁별의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 · 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