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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배우는 남자들

LIFESTYLE

하하하, 남자들이 웃는다.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먹고 즐기는 재미에 푹 빠진 이들의 ‘요리’ 예찬.

1 영상 작가, 이지송 선생  2 홍콩식 우럭찜을 응용한 광어찜

노년에 찾은 새로운 행복, 일과 요리
“나의 예술과 음식은 꼭 닮았다” – 이지송

이지송 선생은 본래 TV CF를 만들던 사람이다. 영상 광고 1세대로 1980~1990년대 무수한 히트작이 그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은퇴 후 지난 영예는 시간 속에 고스란히 내려두고 겸허하게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입봉 3년 차 영상 작가, 세월의 깊이로 눈처럼 하얗게 머리카락이 세어버린 백발의 신인. “광고는 목적이 분명한 장르입니다. 광고주의 절대적 간섭을 피할 수 없죠. 하지만 좀 더 자유롭게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여행하면서 줄곧 느낀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적 감성을 영상으로 제작해보고 싶었어요.” 그 일은 노년을 즐기는 새로운 에너지,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요리를 알아가는’ 예상 밖의 즐거움이 찾아왔다.
“나는 잡식성인 사람이에요. 식사의 목적은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라 생각했고, 대충 먹는 습관이 들었죠.” 하지만 미식가로 소문난 김승용 ‘남자들의 요리’ 대표와 만나면서 ‘제대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직접 요리하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2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친구들로 이뤄진 사모임이 하나 있어요. 멤버가 총 17명인데, 그들을 한데 불러모으고 내가 요리를 했답니다. 제주도에 사는 딸 친구에게도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어요.” 가장 자신 있는 메뉴는 홍콩식 우럭찜과 전복 스테이크다. 특히 우럭찜은 1년 새 열 번은 한 것 같다고. 제철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인지라 우럭이 나지 않는 여름에는 민어나 광어로 대신하기도 했다.
“요리를 하니까 말이 많아졌어요. 남자들의 대화는 대개 한정적이죠. 일과 회사, 군대, 케케묵은 과거 얘기. 그런데 여기에 요리가 끼게 되면 화제가 정말 다채로워져요. 식자재부터 조리 과정, 먹는 방법, 음식과 술을 둘러싼 문화까지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집니다.” 친구들과 요리로 소통하고 대화하는 노년. 그는 언젠가 일본식 튀김을 꼭 배우고 싶다고 했다. 장식과 장치는 얇은 튀김옷 하나뿐, 식자재 본연의 맛과 형태감을 그대로 살린 요리. “내가 만들고 싶은 영상이 바로 그 순수한 튀김 같은 것이죠. 인위적으로 꾸민 맛이 전혀 없는. 조미료를 넣지 않은 음식이 밍밍하게 느껴지듯 때로 이런 작업은 지루해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재료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최상의 식자재를 찾아 장보기에 공을 들이듯 나는 작품을 위해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이 자연과 생태계에서 정말 새롭고 맛있는 것을 찾아내야 해요.” 예술에서의 맛 타령. 맛이라는 게 어찌 혀에 닿는 감각뿐일까. 보는 맛, 듣는 맛, 노는 맛. 그래서 음식과 예술은 꼭 닮은 맛.

1 임형남 건축가와 그의 두 딸, 왼쪽이 언니 가언이고 오른쪽이 동생 지언이다.  2 쇠고기덮밥

남다른 딸 사랑 그리고 요리 사랑
“건축을 연구하듯 요리에 빠져들다” – 임형남

라면만 겨우 끓여주던 아빠가 어느 날 프로 요리사처럼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 “홍콩식 우럭찜이었어요.” “맞아. 간장 소스에 대파를 듬뿍 올린.” “그리고 얼마 후 우럭 대신 쇠고기를 넣어 그 요리를 또 해주셨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제가 너무 좋아해서 작년 수능 보는 날 도시락으로도 싸주셨죠.” “닭 가슴살 스테이크도 진짜 최고!(엄지 번쩍)” “닭 가슴살을 얇게 저미고 그 위에 햄과 치즈를 올려 굽는 거예요.” “그리고 양파와 베이컨을 넣은 샴페인 소스를 곁들이고요.” “또 규돈. 아빠의 쇠고기덮밥은 돈 주고 사 먹는 것보다 맛나요. 훨씬~.” 가언과 지언 자매의 릴레이 칭찬을 듣는 아빠 요리. 근데 너희 아빠는 누구시니?
상큼발랄한 딸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요리 대장 아빠는 바로 가온건축의 임형남 대표다. 집 짓는 건축가인 그가 뜻밖의 요리 세계에 입문한 계기와 사연이 궁금했다. 오로지 두 딸을 위해서? “사실 제가 요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생전 관심도 없었는데…. 동료 건축가인 양진석 소장에게 이끌려 얼떨결에 ‘남자들의 요리 교실’에 발을 들인 게 발단이었죠. 그날 메인 요리에 사용한 식자재를, 그것도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서 싸주니 집에서 요리를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보고 배운 걸 만들어보자 했는데 의외로 쉽고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그대로 따라 하기’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뭐든지 ‘응용’하고 싶어 해요.” 이를테면 식자재를 바꿔보는 거다. 같은 레시피에 다른 재료를 쓰는 것. “우럭 대신 쇠고기, 국수 대신 밥, 이런 식이죠. 베리에이션의 개념이에요.” 콘크리트 하나를 가지고도 하얗게 혹은 어둡게 색을 내고, 질감도 거칠게 또는 매끈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요리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또 요즘 음식은 퓨전의 양상을 띠는 경우가 흔한데 이 역시 그가 추구하는 건축 스타일과 닮았다고 한다. “쇠고기덮밥은 일본의 규돈에서 유래했지만 우리 간장을 쓰니까 감칠맛이 확연히 살아나요. 한국화하는 거죠. 최근 한옥의 재료를 쓰되 서양식 기법을 활용해 집을 지었어요. 한옥 같은 양옥이죠. 요리도 건축에서처럼 자유로운 융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워요.”
요리를 하면서, 아니 즐기면서 주방에 대한 애정이 한층 커졌다. “제가 요리를 시작한 이후 주방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딸들은 아빠가 요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조를 자처하기도 하고, 테이블 세팅과 설거지를 돕기도 하죠.” 이어 앞으로 집 안에서 핵심 공간은 주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실의 TV 앞 소파 자리의 아성은 점차 무너질 것이라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을 활용하면 장소의 구애 없이 원하는 TV 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시대. 하지만 식사는 다르다. 밥 먹는 시간만큼은 한데 모일 수밖에 없다. 가족은 곧 식구(食口)니까. 주방의 규모와 위치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끔은 사무실에도 주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건축주와 미팅하는 자리에 즉석에서 구운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이면 분위기가 훨씬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 음식만큼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도구는 없으니까.

1 치과 의사 임순호 원장과 그의 아들 임수현 씨. 아버지가 든 국자와 면건지기, 편수 냄비는 Fissler, 아들이 든 전골용 무쇠 주물 냄비는 Le Creuset.  2 아들 임수현 씨가 개발한 칠리소스를 입힌 카레 향 닭 다릿살 구이  3 임순호 원장의 전복 스테이크

요리로 소통하는 치과 의사 부자
“내 요리는 가족을 위한 섬김의 요리” – 임순호

임순호 원장은 “만약 치과 의사를 업으로 삼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되었을 거고, 그도 아니라면 여행 가이드를 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잘 찾아보자. 이들 직업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전제로 하며, 내 노력과 정성으로 다른 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이를 통해 내 기쁨과 보람도 배가될 것이고요.” 그렇다면 반평생 넘게 치과 의사로서 소명을 받들고 살아온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카메라 앞에 선 연유는? “요리를 배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김승용 멘토를 만났죠.” 평소 음식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요리의 영역은 생소했단다. 그러다 작년 초 김승용 대표의 ‘남자들의 요리’ 스타트 멤버로 요리에 입문하게 되었다. 뭔가를 의도하거나 작정한 것은 아닌데, 호기심에서 시작한 요리 하나가 그의 삶에 가져온 변화와 파장은 꽤 컸다.
“첫 수업의 메인 요리가 홍콩식 우럭찜이었어요. 고급 중식당에서나 접하던 요리를 내 손으로, 그것도 이토록 기막힌 맛을 낼 수 있다니 정말 짜릿했습니다.” 이제 그의 솜씨는 카르보나라 파스타를 오리지널 스타일로 달걀에 비벼내고, 피렌체풍 안심 스테이크까지 완벽하게 구워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술 습득’의 성과보다 이제 자리만 마련하면 선뜻 요리하러 나설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이 생겨 더 기쁘다고. 그의 아내는 요리 교실에 가는 날이면 늦은 밤까지 오늘은 남편이 어떤 새로운 메뉴를 배워올지 소녀처럼 두 눈 반짝이며 기다린단다. “제가 음식을 해보니 그래요. 남자도 요리를 해야 한다기보다 남자가 요리를 해야 한다고요. 우선 요리는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죠. 또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요리를 통해 가족을 섬기고 함께 소통하는 리더십도 갖추게 됩니다.”
이런 요리 철학을 장성한 그의 아들도 공감하고 있다. 치과 전공의로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은 믿음직한 아들이다. 음식은 자신이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더 크다는 임수현 씨. 사실 요리에 임하는 자세는 한참 어린 아들 쪽이 훨씬 도전적이다. 각종 TV 프로그램과 만화책 등을 통해 다양한 음식을 접하고 이를 응용, 자신만의 레시피를 창조해낼 정도다. 지난해 추석에는 그들 부자가 각자 요리를 만들어 식탁을 차리기도 했다. 한식과 양식이 뒤섞여 음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레시피도 정석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주 특별한 추억이었다고 전한다. 오롯이 음식을 매개로 가족이 하나로 뭉쳐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고. 잔뜩 어질러진 주방을 치우는 것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니 그 분위기가 짐작 가능하다.
요리하는 맛을 아는 임순호·임수현 부자가 남자 요리가 무엇인지, 남자 요리에 필요한 에센스에 대해 알려준다. 가장 좋은, 신선한 제철 식자재를 선택하라. 식자재 본연의 맛을 살려 양념 사용은 최소화할 것. 오버쿡은 절대 금지.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가니시의 배열과 식기의 선택까지 신경 써라). 무엇보다 도전과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요리하는 과정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며 점점 발전해가는 모습을 즐겨보자!

클럽 뱅가드 김형섭 부사장

생존 이상의 유희
“싱글 남자의 요리가 더 즐겁다” – 김형섭

“혼자 사는 싱글 남자의 요리라고 ‘생계형’이라는 목적에 초점을 맞추진 말아주세요. 제게 요리는 하나의 즐거운 놀이 같은 겁니다.” 단 몇 분 만에 뚝딱, 스테이크를 굽고 가니시로 구운 마늘과 방울토마토까지 곁들여 멋진 플레이트를 완성하는 것을 보니 예사 솜씨가 아닌 듯한데…. 이 남자, 단순히 혼자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란다. 클럽 뱅가드의 김형섭 부사장이 요리를 배우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엠넷 PD를 거쳐 CJ 비서실 호텔팀에서 근무하며 나이트라이프에 대해 리서치할 당시 파인다이닝 파트에서 일하는 팀 동료 등을 통해 F&B 분야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고. 평소 여행을 하며 다양한 음식을 접하는 데 남다른 관심이 있던 터라 음식을 즐기는 연장선상에서 요리도 자연스레 하게 됐다. 요리를 하니 또 술, 와인에 대한 관심이 생겨 와인 스쿨에도 등록했다. 와인 공부를 통해 발견한 긍정적 자각. 좋은 와인은 산미와 당도, 타닌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음식에서도 맛의 균형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니 요리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테지만 일단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해요. 아마 많은 남자가 요리를 하라고 하면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할 텐데, 그저 수동적으로 시키는 대로 따라 하려고 들 거예요. 그러다 레시피 속 양념 재료 하나라도 없다면 포기해버리겠죠.” 이때 우뇌적 감성을 발휘해 전체적으로 맛을 그리며 유연하게 접근할 것을 강조한다. “오징어 요리를 알고 있는데 내가 주꾸미 낚시를 해서 주꾸미가 있어요. 그러면 주꾸미를 활용해 그 요리를 하는 거죠. 다른 식자재로 변형, 대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해물은 먼저 가볍게 데쳐서 조리해야 질기지 않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요.”
그의 요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친구를 집에 초대하거나 캠핑을 떠났을 때다. “캠핑 요리 하면 흔히 바비큐를 떠올리는데 간장과 설탕으로 심플하게 만든 데리야키 소스를 뿌려내는 것만으로도 스테이크의 격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어요. 야채 몇 가지를 가니시로 곁들이면 야외에서도 근사한 일품요리를 즐길 수 있죠.” 회사 워크숍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음식을 준비하는 편이라고.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조직을 이끌다 보면 딱딱하거나 대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기 쉽죠. 하지만 요리를 매개로 부하 직원과 교감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요리의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요즘 클럽은 술과 음악, (안주 이상의) 음식, 공연 등을 한자리에서 즐기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클럽 뱅가드에서도 최석이 셰프가 컨설팅한 일식 메뉴를 선보이는 중. 향후 그는 자신이 여행을 통해 경험한 세계의 다양한 맛을 소개하는 작은 레스토랑을 여는 것이 꿈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요리를 즐기고, 배우겠다고 한다. 기회가 닿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박우진  진행 협조 김승용(남자들의 요리 대표)  헤어 & 메이크업 이은정  촬영 협조 레스토랑24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