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고 있던 사실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새삼 깨달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맛에 대한 향수, 진짜 가치 있는 것을 가려낼 줄 아는 타고난 안목과 심미안. 다이아나 강 대표에겐 그런 것이 내재해 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련된 최신의 것을 접하는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다시, ‘우리 것’에 머무른다. 지난해 연말, 새해를 앞두고 다이아나 강 대표와 함께 찾은 이들은 나름의 사연과 방식으로 전통을 잇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새로운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과 마음이 옛것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서 친숙함과 더불어 차분한 안도감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뜨거운 쇳물에 녹인 담담한 열정
서너 채의 컨테이너 건물에 마련한 제법 큰 규모의 작업장에서 20여 명의 직원이 쇠를 녹이고 땜질하고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다. 작업장은 용광로 속 뜨거운 불꽃의 열기와 더불어 기름때 묻은 철판과 기계 소음으로 가득하고, 모든 직원이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손놀림에 집중하고 있다. 안성의 명품인 유기를 만드는 현장이다. 유기 만드는 일은 상당히 과학적인 기술과 함께 세심함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구리 78%와 아연 22%의 비율을 정확히 지켜야 하고, 1300℃ 이상의 불 속에서 쇠를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눈발이 살짝 날리는 추운 날씨임에도 곳곳에 대형 선풍기를 틀어놓은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 요란한 열기 속에서 작업의 흔적이 역력한 얇은 체크 셔츠 하나 입은 모습으로 나온 김수영 씨는 고향 안성에서 40년째 유기를 만들고 있는 유기 기능 보유자로 2013년 예올에서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 3월 11일부터 5월 23일까지 열리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안성맞춤’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유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안성은 예부터 삼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서울의 양반들이 잔치나 제사를 앞두고 안성까지 와서 물건값을 흥정했기 때문에 제법 규모가 큰 오일장이 서곤 했죠. 안성 장에 나온 유기 제품은 뛰어난 솜씨로 정성껏 만든 것이어서 이에 흡족해한 양반들이 안성맞춤이라고 했답니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까마득한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게 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기술이 퇴화된 경향이 있었지만 후기인 18세기 즈음부터 사대부에 의해 다시 성행했다. 유기는 크게 녹인 쇳물로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망치로 쳐서 그릇 형태를 만드는, 징이나 꽹과리, 식기 같은 방짜 유기와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내는 주물 유기로 나뉜다. 이 전통 금속공예 기술을 잇고 있는 그는 아버지 김근수 장인에 이어 문화재청에서 2대째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유기를 만들고 다른 두 아들이 안성 시내에 위치한 유기장 관리와 운영 및 홍보를 돕고 있으니 3대를 잇고 있는 셈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희소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유기 작업장 2 김수영 장인의 유기 그릇에 담은 음식
“내가 어릴 적엔 유기 공방이 30여 개나 되었는데 이제 다 사라지고 여기 한 곳만 남았어요. 30~40년 사이 양은이나 스테인리스 재질 그릇이 대량으로 나온 탓에 유기를 쓰는 사람이 적어졌으니까요. 게다가 작업 환경이 척박하고 험하다 보니 전수를 받으려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기 전통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노력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부담도 된다고 했다.
많은 현대인이 유기를 제사 때나 쓰는 그릇으로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현대의 모던한 상차림에도 잘 어울리는 유니크한 멋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건강까지 지켜준다. 날음식에서 검출되기 쉬운 대장균이나 비브리오균을 해독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 유기의 이런 기능을 실험한 적이 있는데, 유기를 넣은 수조가 넣지 않은 수조보다 외부 환경에 의한 오염이 적어 깨끗함이 훨씬 오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가스를 쬐면 색이 까맣게 변하는 탓에 관리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지만, 현대 주거 환경이 점차 좋아져 오히려 젊은 층에서 유기를 생활 식기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설거지할 때도 굳이 세제를 쓰지 않고 물로만 씻어도 잘 닦이니 이만큼 친환경적인 그릇도 없을 듯하다.
조선시대 왕릉과 궁중 제기 복원 작업도 하고 있는 그는 전통 유물을 현대 생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다이아나 강 대표가 작업장에서 발견하고 그 모양과 쓰임새가 매력적이라며 탐낸 것 중 하나도 조선시대 왕관을 유기로 재현한 것이다. 제기로도 쓸 수 있는 이 유기는 받침을 더한 형태로 재현해 제사상에 올릴 때 높이 고일 필요가 없고, 왕관 틀 안쪽에 전 같은 음식을 차곡차곡 쌓으면 쓰임새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장식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가 만든 안성 유기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완성도 높은 유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인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고와진 뻘 흙을 한 번 더 체에 걸러 보다 고운 가루로 만들고, 구리·아연·주석 등의 재료를 합금하고 기름과 물을 섞어 공기를 차단시킨 후 뜨거운 불 속에 녹인 부글부글 끓는 쇳물에 담금질하고, 모양을 잡기 위해 망치로 끊임없이 두드리고, 달궜다 식히길 반복하다가 암틀을 수틀에 밀어넣어 끓인 쇳물을 붓고…. 그렇게 며칠을 작업해도 10% 정도는 기포가 생기거나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완성한 유기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하고 은은한 광채가 난다.
“40여 년간 오로지 한길만 고집하고 살아왔어요. 매번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는데 아직도 뜨거운 불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유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안성 유기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그의 유기를 한 번이라도 눈에 담게 된다면, 그 매력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일 듯싶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김수영 장인의 뜨겁고 오랜 열정의 인생도 덤으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 살아낸, 종부의 삶
조선 선조 시대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은 고제(高弟)로, 류성룡과 더불어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봉 김성일의 종택이 있는 안동을 찾았다. 큰 건물도, 기관이나 공장도 찾아보기 힘든 안동에 들어서니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고즈넉한 한옥 몇 채가 눈에 들어와 그런 심상을 부추긴다. 학봉 종택은 고택이 많고 종갓집이 융성한 경남 안동에서도 오래되고 규모가 큰 종가다. 유서 깊고 뼈대 있는 종갓집에 가보고 싶었다는 다이아나 강 대표의 바람을 반영한 방문이었다. 지난해에 이용태 회장을 인터뷰했을 때 만난 그의 딸 이한경 씨가 그녀의 이모인 이점숙 여사를 소개해준 것이다. 퇴계 종가에서 자라 의성 김씨 종가로 시집온 그녀는 15대 종부다. 젊을 때 서울에서 살다 자식들을 출가시킨 뒤 6년 전부터 안동에 내려와 이 가옥을 지키고 있다.
안동 봉정사 가는 길목에 자리한 학봉 종택은 밖에서 보는 자태도 빼어나지만 안에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구석구석 정갈한 매무새를 품고 있다. 널찍한 잔디 마당 앞으로 한가득 쏟아지는 햇볕 덕분에 추운 날임에도 한옥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싫지 않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점숙 여사가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다과상을 내왔다. 일일이 손으로 빚어 만든 일곱 가지 주전부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고, 붉은빛을 띤 안동 식해는 매콤한 맛으로 요즘 도시 사람의 입맛에 익숙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고춧가루 양을 줄이는 대신 새콤달콤한 감칠맛을 더했다. 그 세심한 배려와 정성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서도 1년 365일 손님을 맞는 것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의 제사를 치러야 하는 그녀의 노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손의 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와 접빈이다. 문중을 화합시키고 조상과 가문에 대한 예를 다함으로써 자부심을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제사는 많이 간소화했다고 했다. 새벽이 아닌 초저녁에 지낸다거나, 조부모마다 각각 모시던 것을 같이 모셔 두 상 차리던 것을 한 상으로 축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예법에 따라 4대 조상인 고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인품과 공덕이 뛰어난 조상의 제사인 불천위(不遷位)까지 1년에 10회 이상 제사를 치르는 것은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이 찾아온다. 몇백 명에 이르는 종가의 친지뿐 아니라 시에서 시설 보수를 지원하며 권유한 고택 개방 이후 일반 손님도 종가 문화 체험을 위해 드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제공하지 않지만 한옥에서 하룻밤 묵으며 학봉 가문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고택 내 사당과 박물관도 구경할 수 있다.
1 사랑채 앞쪽으로 보이는 넓은 잔디 마당이 인상적이다. 2 보리를 햇볕에 말려 손수 만드는 엿기름 3 손으로 직접 만든 주전부리와 안동 식해
종갓집 며느리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싶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기색을 살폈지만, 여느 평범한 집안의 며느리 이상의 고단함이나 허무함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아파트 생활에 비해 한옥이 춥고 불편한 점은 있지만 그것도 세 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니 익숙해졌다고 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중심에 있던 학봉의 종갓집 며느리라 고된 노동과 무수한 마음고생을 해왔을 거라는 건 맞지 않는 선입견이었다. 많은 이들이 유교문화 하면 남성우월주의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는 사실 다소 왜곡된 것이다. 종가에서 제례를 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종손이 첫 잔을 올리고, 이어서 종부가 두 번째 잔인 ‘아헌(亞獻)’을 올린다. 또 종가의 친지들은 제사 때 종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문의 주요 행사에서 배제되거나 괄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이아나 강 대표는 몇 달 전 읽은 퇴계 이황의 책에서도 그런 여성 우대 풍조를 엿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맞아요. 존중받지 못했다는 건 오해예요. 오히려 그 시대엔 딸에게도 재산을 물려줬거든요. 물론 여자로서 감내해야 할 점은 있었겠죠. 이를테면 잦은 제사나 접빈 때문에 대부분의 종가 살림이 넉넉지 못했는데, 그럴 때 딸과 며느리는 욕심 내지 않고 장자를 먼저 배려하는 거죠. 가문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15대째 이 종가가 이렇게 훌륭하게 유지되고 있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젊은 시절을 서울에서 지내다 시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우고 종택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그들 부부처럼, 언젠가 그녀의 아들 내외도 그런 인생의 행보를 선택할 것이다. 누군가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그저 집안의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따르게 되는 삶. 그 덕분에 이런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불평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있나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로 당연하게 여겼어요.” 전원생활하는 기분으로 산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제사상을 차리는 일도, 손님을 접대하는 일도 그녀에겐,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아 시큼하면서 구수한 감칠맛이 일품인 집장(메줏가루에 고춧가루, 소금물, 절인 채소를 넣고 짧은 기간 동안 숙성시킨 된장)을 담그는 일만큼 일상적인 일이니 말이다.
옹기 짓듯이, 깊고 느릿하게
2012년 예올에서 후원하는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이현배 작가는 전통 재래 방식으로 옹기를 만드는 ‘옹기장’이다. 그를 만나러 전북 진안 백운면의 정송마을을 찾은 날, 새벽녘부터 눈이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은 이현배 작가를 만나자 험난한 눈길을 달려온 고단함이 장독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아내와 딸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점심을 내왔다. 푸근하고 넉넉한 시골 인심으로 차린 음식은 그가 만든 옹기 그릇에 담겨 더 맛깔스러워 보였다. 다이아나 강 대표가 옹기 그릇의 투박한 멋과 유용한 쓰임새에 대해 감탄 섞인 어조로 얘기했다. “직접 써보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옹기 항아리에 소금이나 쌀을 담아 사용하고 있는데 여름내 습한 날씨에도 푸석해지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아요.” 그녀의 말대로 옹기는 탁월한 효용성을 자랑한다. 예부터 쌀이나 장, 술, 젓갈 등을 저장하는 용기로 쓰인 옹기는 ‘숨 쉬는 그릇’이라 부를 만큼 통기성이 좋고 장기간 담아둬도 내용물이 부패하지 않는 뛰어난 저장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발효성도 뛰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김치나 젓갈류를 담아놓으면 그 안에서 자연적으로 숙성된다.
“옹기는 발효를 위한 그릇이에요. 제대로 된 발효는 조건만 만들어놓고 자연스럽게 균을 부르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통의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특히 온도와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여름의 기후 조건을 견디려면 통풍이 잘되어야 해요. 그래서 자기와는 다른 흙을 씁니다. 단일 성분이 풍화된 흙을 쓰는 자기와 달리 옹기의 흙은 지구의 땅이 형성되고 나서 퇴적된, 소위 2차 퇴적 점토라 부르는 흙이에요.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상 동해안이 높고 서해안이 낮아서 골짜기가 많고 기후변화가 심한 편이라 퇴적토가 많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의 2~3km 반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하고 가까이 있는 흙입니다.”
그는 옹기장들이 그 흙을 닮아 ‘잡스러운’ 기질이 있다며 웃었다. 어디서든 쉽게 흙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떠돌며 옮겨다니고, 빚어서 불에 굽는 옹기처럼 강하고 단단하다고.
이현배 작가의 인생도 그런 옹기의 기질과 어떤 면에선 닮은 듯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옹기 굽는 일을 시작했다. 20여 전 스위스 그랜드 호텔과 힐튼 호텔에서 초콜릿 만드는 일을 하다 어깨가 아파 쉬면서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호텔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헨리 무어의 조각 작품을 보고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껴 조소를 배우기도 한 그는 여행 삼아 떠난 길에 전남 벌교의 ‘징광옹기’를 찾아갔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은 탓에 헛걸음을 각오한 길이었는데, 물이나 한잔 얻어먹으려고 들어가니 그곳 관리인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옹기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했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와 스스로도 놀랐는데 막상 그리 말하고 나니 진짜 배우고 싶어졌어요.”
눈 쌓인 이현배 작가의 옹기 작업장
‘엉뚱하고 느닷없는 일’이라고 그 스스로 표현했지만, 어찌 보면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키워온 꿈을 찾은 것이었다. 호텔에 다닐 때에 비해 월급이 현저히 적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적으로도 고되고 힘들었지만 적어도 3년은 버틸 마음을 먹었고, 그런 노력과 인내가 그를 옹기장으로 빠르게 성장시켰다. 처음엔 흙을 만지고 빚는 일만 하다 두 달 만에 가마를 짓고 불을 땠다. 초보자가 익히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온도를 예민하게 맞춰야 하는 초콜릿 제작 기술에서 얻은 감각과 손재주도 도움이 되었다. 징광옹기에서 3년, 경북 문경의 분청사기 가마에서 1년여간 그릇 만드는 기술을 익힌 그는 진안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20년 전 그가 터를 잡은 이곳 정송마을은 예부터 불을 땔 소나무가 많은 솥(가마)이 있는 마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의 옹기를 손내 옹기라 하는 것은 ‘솥이 있는 내’를 소리 나는 대로 불러 붙인 것이다. 예전에는 손내에도 가마터가 몇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옹기 가마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통이 끊긴 자기와 달리 옹기의 역사는 왜곡된 부분은 있을지언정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시회를 할 때도 박물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용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해요. 옹기의 여러 가지 형태 중에서 가장 주를 이루는 것은 장독입니다. 다른 조형물은 거기서 파생된 것이죠. 가마 시스템도 독에 의해 결정됩니다. 독을 빚고 두 달 정도 말린 후 가마 크기가 정해지거든요. 옹기를 구울 때 가마 속 공간을 채워야 하는데, 이때도 장독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 공간에 그림을 그리듯 구성력 있게 배치해야 불을 땔 수 있어요.”
크기와 쓰임새에 따라 단지, 항아리 등의 이름을 붙이는데, 메주 한 말의 장을 담을 수 있는 크기부터 ‘독’이라 이른다. 그는 옹기에서 독은 빚는 것이 아니라 ‘짓는다’란 표현을 쓴다고 했다. 옹기는 전체의 기형을 단번에 빚는 것이 아니라 흙의 점력을 이용해 쌓는 개념이기 때문에 독 짓는 기술이 있다면 큰 옹기도 어렵지 않고, 다른 조형물도 쉽게 빚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옹관(옹기로 만든 항아리 모양의 관) 작업도 하고 있다. 문화재청 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고대 기술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의뢰한 것이지만, 그의 옹기에 대한 철학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1994년인가 1995년쯤 전시 오프닝에서 인사말로 ‘옹기는 사람이 나고 살고 죽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담아온 그릇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옹관을 만들어봐야지 생각했는데, 또 말이 씨가 됐나 봐요.(웃음) 왜 옹기를 만드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작업을 하게 되었으니 운이 좋은 거죠.”
그는 참 엉뚱하면서도 깊었다. 무의식의 발현처럼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만의 철학이 깃든 그의 옹기처럼 말이다. 짐짓 뜸 들이며 두서없이 얘기를 꺼내는 것 같아도 불 속에 들어간 옹기처럼 단단한 심지가 엿보였고, 온화하고 차분하게 말하지만 옹기장으로서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졌다. 전골솥과 달항아리가 유네스코에서 ‘우수 공예품’ 인증까지 받아 이미 유명 작가가 되고 ‘장인’이라는 수식어도 붙었지만, 그는 여전히 가마에 직접 장작불을 지피고 고집스럽게 연기를 피워올린다. 처음 질박한 삶의 그릇인 옹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 가마의 막힌 불구멍을 틔우고 옹기를 굽기 시작했을 때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말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역시 그다웠다. 언젠가 스승이 얘기한 것처럼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울 생각만 하지 말고 기본을 지키며 살고 싶다고.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고단한 작업 인생을 살아온 옹기장의 삶, 화려하진 않지만 현대 생활에서도 여전히 멋스럽고 유용한 가치를 지닌 옹기와 닮은 듯했다.
다이아나 강은 음식과 문화를 통한 VIP 마케팅으로 해외 글로벌 브랜드의 국내 시장 진출을 돕는 전문 컨설팅 회사 원더박스의 대표다. 한국의 음식과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강 대표는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통해 한국과 외국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인사와 만나 인생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제안하고자 한다.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
사진 안지섭 컨트리뷰팅 에디터 다이아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