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족입니다
이 시대에 가족의 가치란 무엇일까? 한길을 가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네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았다.
CF 감독 래리 슈 & 손정 부부
올해 결혼 20주년을 맞은 부부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오래전 사용했다는 소형 골동품 카메라를 들고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두 사람. 늘 신선한 감각으로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CF 감독의 직업적 특성 덕분일까. 촬영하는 매 순간 재치가 넘친다. 부부라기보다 절친한 친구 사이로 보이는 이들은 홍콩의 TV 광고 제작사 슈팅갤러리(Shooting Gallery)의 공동 대표다.
세계 유수 광고제에서 수상하며 잘 알려진 홍콩의 스타 감독 래리 슈(Larry Shiu)는 아내이자 동료인 손정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혼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요. 아내가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작 6~7년 정도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외모뿐 아니라 생각도 아주 참신해서 항상 ‘다음은 뭘까?’ 기대하게 되는 면이 있어요.” 대학 졸업 후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간 손정 감독은 슈팅갤러리와 인연이 닿아 현지 프로듀서로 일하다, 1993년 정식으로 입사하며 홍콩에 정착했다. 당시 그녀의 스승이 바로 래리 슈 감독이었고, 두 사람은 1995년 결혼해 부부가 되었다. 일에서만큼은 거장 감독의 아내라는 이미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는 손정 감독은 같은 광고주를 두고 남편과 수없이 경쟁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갔다고 한다. “홍콩에서 남편은 촛불만 가지고도 작품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평이 있어요. 카메라의 다양한 기법에 정통하고, 아주 잘 활용하죠. 저는 접근 방식과 추구하는 스타일이 좀 다른 편이에요. 회사의 공동 대표지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각자의 광고에 대해 상의하지도, 공유하지도 않아요. 경쟁이니까 철저히 분리해서 작업하는 게 당연하죠. 제가 졌을 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흥미로운 점은 래리 슈 감독의 광고가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반면 손정 감독의 광고는 보다 강하고 남성적이라는 것. 그래서 같은 배우를 촬영하더라도 서로 정반대의 면을 끌어낸다. 광고에 대한 철학과 관점도 다른 편이다. 래리 슈 감독이 짧은 시간에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고 여운을 남기는 방식이라면, 손정 감독은 광고의 본래 목적대로 실질적 판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두 사람의 영역이 확실하게 구분되고 잘하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손정 감독은 남편과 다른 독자적 스타일을 갖춘 감독으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물론 같은 일을 하니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장점이다. “남편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이해하게 될 때가 있어요. 광고주와의 미팅은 어땠을지,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말이에요.”
지금까지 슈팅갤러리는 자동차, 전자제품, 항공사, 통신사, 음료 등 분야를 넘나들며 세계적 기업의 광고를 촬영해왔다. 요즘은 중국 광고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클라이언트로 떠오른 뷰티 브랜드를 주로 맡고 있다. 장쯔이, 판빙빙, 안젤라 베이비, 리빙빙 등이 그들의 광고 모델로 활약한 스타들. 최근에는 아예 새로운 일에 도전했는데, 부부가 함께 화장품 브랜드 ‘슈퍼페이스(Superface)’를 런칭한 것이다. “새로운 분야지만 광고 제작을 해온 저희의 경험을 살린 일이에요. 촬영 현장에서 모델들이 메이크업하는 걸 보면서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느껴왔죠. 꼭 필요한 컬러와 기능에 포커스를 맞춘 단순화한 제품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반영했습니다.” 슈퍼페이스는 온라인으로만 판매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곧 한국에 숍을 오픈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과 홍콩을 오가는 바쁜 일정의 연속이다.
같은 일을 하니 일과 가정의 경계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반응이다. “창작을 하는 일이니 퇴근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생각하던 걸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죠. 아티스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집착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열정적으로 사랑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열여섯 살인 딸도 어릴 때부터 촬영장에 자주 데리고 다녀 부모의 일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사진에 흥미를 보이고 래리 슈 감독이 감탄할 만한 사진을 찍기도 한다니, 역시 재능이 유전된 모양이다. 가볍고 유쾌하게 시작된 대화가 딸에 관한 화제로 돌아가자 한층 따스한 분위기가 감돌고, 두 감독은 영락없이 진지하게 자식이야기를 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회사와 가정이라는,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 부부는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자주 대화한다. 아마도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정도도 더 깊을 것 같다.
언니 김윤정(왼쪽)과 동생 김은희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윤정 & 셰프 김은희 자매
식품영양학을 공부하고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김윤정, 공대를 나와 웹 디자이너로 일하던 김은희. 5남매 중 셋째와 막내인 둘은 10여 년 전에만 해도 서로 다른 일을 했다. 그런 둘이 지금은 같은 일을 한다. 언니는 이전처럼 요리를 그릇에 예쁘게 담거나 꾸미고, 동생은 프렌치 레스토랑 셰프가 되어 이따금 언니가 사용할 요리를 만든다. 둘은 누가 봐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요리를 입이 딱 벌어지게 담아낸다. 그리고 그걸로 각종 촬영 작업을 하고 아카데미까지 운영한다. 혹자는 이런 걸 ‘상부상조’라고 한다.
둘 중 요리에 먼저 발을 디딘 건 언니 김윤정이다. 그녀는 전공을 살려 진작부터 영양사로 일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지루한 일과에 그녀는 새 직업을 찾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다. 어릴 적부터 접시에 요리를 아기자기하게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는걸 좋아한 그녀는 테이블 세팅부터 와인, 제과, 플라워 등을 모두 배워 데뷔 수년 만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 명성을 쌓는다. “당시엔 말도 못하게 바빴어요.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 해서 외롭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한편 김은희 셰프는 언니 김윤정이 온갖 소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군분투하던 시절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치료 기간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그때 그녀는 평생 몸담을 직업으로 ‘요리’를 택한다. 그리고 서둘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요리 명문 CIA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손꼽히는 레스토랑에 취직한다. 그렇게 내리 3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요리를 배운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몸 여기저기가 아팠어요. 그래도 주방에만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피로가 풀렸죠.”
동생 김은희 셰프가 한국에 돌아오고 몇 년 뒤, 두 자매는 서울 방배동에 ‘그린테이블’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을 열었다. 김윤정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수업과 방송 . 광고 촬영 등에 필요한 푸드 스타일링을맡으며 이따금 동생 일을 돕고, 김은희는 뉴욕에서 배운 요리를 맛깔스럽게 선보인다. 사실 이들의 스타일은 오래전 집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담고, 직접 수확한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어주던 엄마의 그것과 쏙 빼닮았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시골에 계신 어머니도 일을 하며 어릴 적 저희 5남매의 도시락을 하루도 빠짐없이 싸주셨거든요. 저희가 앞으로 이렇게 요리만 할 운명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것 같아요. 이런 걸 가족력(力)이라고 하지 않나요?(웃음)” 자매는 이따금 서로의 일이 ‘수습 불가능’ 상태가 되면 발 벗고 나서서 돕는다. 그간 배우고 경험한 걸 사이좋게 나눈다. 언니는 동생에게 “요리를 너무 복잡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지만 동생과 함께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고, 동생은 “촬영 때마다 언니가 레스토랑 냉장고를 거덜낸다”고 투덜대지만 언제라도 언니에게 최상급 식자재를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 두 자매의 바람은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건강한 요리를 맛있고 아름답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따로 또 같이 요‘ 리’라는 한길을 계속 걸을 예정이다.
가야금 무형문화재 문재숙 &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 모녀
“오늘 아침에 뭐 먹었어?” 인터뷰를 위해 만난 모녀가 살가운 대화를 시작한다. 가야금 무형문화재인 이화여자대학교 문재숙 교수와 가야금 연주자인 첫딸 이슬기의 모습이다. 각자 연주와 강의 일정으로 바쁜 두 사람은 이슬기가 결혼한 뒤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보다 다정할 수 있을까 싶은 모녀의 대화는 이슬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현재 준비 중인 연주회 이야기까지 화기애애하게 이어진다. 문재숙 교수는 자녀에게 한 번도 악기를 배우라거나 공부를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세 남매는 모두 어머니와 같은 길을 선택했다.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인 둘째딸 이하늬도 국악을 전공한 가야금 연주자고, 아들은 대금 연주자가 되었다. 이슬기는 “어머니의 지혜로운 전략인 것 같다”며 웃는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다만 어릴 때부터 제 키에 맞는 가야금과 아기 장구를 늘 가까이하게 해주셨죠. 연습을 하시는 어머니의 무릎에 가야금과 함께 누워 눈앞에서 움직이는 현의 떨림을 느끼던 기억이 생생해요. 마냥 신기하고 좋았는데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제 삶을 결정한 것 같아요.” 문재숙 교수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전승자고, 이슬기는 가야금 크로스오버 연주로 해외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안식년이라는 문재숙 교수는 올 가을 3회를 맞는 의정부국제가야금페스티벌 준비에 힘을 쏟는 중이다. 그녀가 첫 회부터 총괄 기획과 음악감독을 맡아온 축제다. 국악으로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2006년부터 크로스오버를 시도해온 이슬기는 전통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며 하반기에 전통음악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무대도 있는데, 이들은 그럴 때마다 서로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본다고 한다. 문재숙 교수는 이슬기의 소리에서 30대 연주자에게 흔치 않은 깊은 성음이 나올 때 놀라고, 이슬기는 평소 언니처럼 소녀 같은 느낌의 어머니에게서 큰 스승의 면모를 보게 된다고. 올해도 의정부국제가야금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가족 앙상블을 선보일 예정이다. “어머니의 소리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같이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감사하죠. 제가 어머니의 여러 이수자 중 한 명인데, 선생님의 음악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전승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요.” 그런데 문재숙 교수가 딸에게 일관되게 말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라고 한다. 행복한 연주자가 되는 것. “삼남매 중 슬기가 가장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원하는 소리가 안나오면 잠을 못 잘 정도죠. 인생은 복합적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돼요. 저는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음악을 할 수 있다고 늘 말해요.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잘해나가는 게 곧 연주자 이슬기의 경쟁력이 되겠죠.” 어머니가 삶이 단조로 흐르게 하지 말라는 말을 따뜻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하자 딸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술가로서 동행하는 모녀는 이렇게 소통하고 공감한다.
화가 류해윤 & 류장복 부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둘 다 그림을 그린다. 50대 아들 류장복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지금껏 스무 번 이상 개인전을 치른 중견작가다. 86세 아버지 류해윤 옹은 칠순 나이에 처음 붓을 잡았지만, 지금껏 쉬지 않고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아들 류장복의 그림은 대체로 수수한 편이다. 장식이나 억지스러운 색을 쓰지 않는다. 아버지 류해윤 옹의 그림은 다소 화려하다. 기교는 없지만 그림 속 오브제들의 표정이 밝다(그는 냇가의 작은 물고기에도 표정을 부여한다). 둘은 비슷한 듯 다르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둘 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는 정도랄까. 태어나 단 한 번도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류해윤 옹은 칠순부터 지금까지 1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대충 계산해도 일주일에 2~3점씩 그린 거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린다. 흐릿한 기억으로 남은 조상들의 얼굴을 차례로 그리기도 하고, 가보지도 못한 금강산을 오직 상상만으로 그린다. 언젠가는 박수근의 빨‘ 래터’가 45억 원에 팔렸다는 얘길 듣고 콧바람 씩씩 뿜으며 돌아와 “그림 하나가 뭐 그리 비싸냐”며 그걸 똑같이 모방하고 그 위에 자신만의 오묘한 색을 덧입혔다. 말하자면 진정한 포‘ 스트모더니즘’. 그의 그림은 이렇듯 거침없다. 상상력으로만 치면 아들의 그림을 진작 뛰어넘었다. “아버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과연 미술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돼요.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아도 당신이 그리고 싶은 게 있고 거기에 충실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미술이라는 걸 가르쳐주죠.” 아들 류장복의 말이다.
사실 류해윤 옹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시작한 경우. 죽은 부친의 영정 사진을 그려본 것을 계기로 이후 쭉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원래 화가 아들 류장복에게 부친의 그림을 부탁해 그려 받았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몇 번이고 수정해 가장 비슷한 얼굴을 찾았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닮게 그리려고 애쓰다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셈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계속 그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또 내가 그린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그렇게 좋을 수 없고.”
물론 화가 아들 류장복의 눈에도 어느 날부터 옛집의 옥탑방 작업실 한쪽을 채워나가기 시작한 아버지의 그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그림 도구로 사용한 지난 달력과 사인펜 대신 좋은 종이와 물감을 공급해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물론 후원은 어디까지나 용구 제공까지다. 그림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아버지도 어엿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제가 한 가지 아쉬운 게 그거예요. 아들이 그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해줬으면 하는데, 저 얜 도통 그런게 없어요.(웃음)”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지만 그림 선후배이기도 하다. 류장복은 이전엔 탄광촌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했고, 지금은 도시의 일상에 스민 자연이나 건물, 사람을 곧잘 그려 주목받는다. 제대로 따지면 아들 류장복 작가가 아버지 류해윤 옹의 30년쯤 선배다. 흔히 ‘대를 이어’ 활동하는 부자(父子)라고 하는데, 이들에겐 ‘대를 거슬러’라는 표현이 맞다. 두 사람은 그림 덕분에 오랜 무뚝뚝함도 한껏 덜어냈다. 부자간의 대화도 같은 길을 걸으며 많이 늘었다. 재작년 겨울, 두 사람은 2인 전시를 열기도 했다. 전시명은 ‘해장윤복’.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앞뒤로 섞어 지었다. 전시는 아버지 류해윤의 그림을 보고 아들 류장복이 다시 그린 그림으로 구성했다. 아버지가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과 소나무 등을 그리면 아들이 그걸 형상이 모호한 선과 색, 농담으로 분해했다. 전시장에 나란히 걸린 그림의 행간마다 부자지간의 각별한 소통이 들리는 듯했다.
류해윤 옹은 지금도 매일 하루 8시간씩 길음동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조금 그리다 피곤하면 낮잠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이어 그림을 그린다. 아들 류장복은 그렇게 완성한 아버지의 그림이 작업실에 쌓이면 20~30점씩 모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간다. 언젠가 아버지의 그림이 귀중한 민화 사료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원래 ‘그림’은 ‘ 그워하다’에서 나왔다고 하잖아요? 본 걸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기억 속을 더듬어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그림은 풍요와 복을 비는 ‘20세기의 민화’가 아닐까 싶어요.” 이 흥미로운 부자가 만들어내는 그림은 마치 서로 살갗을 문댄 듯 끈적하다. 세대를 뛰어넘는 동반임에도 멋쩍지 않고 아름답다. 이런 걸 우린 가족이라 부른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이영학 헤어 & 메이크업 송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