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곧 사라질 우리 민요를 찾아 25년간 전국을 누벼온 한 남자의 이야기.
경기도 이천의 한 시골집에서 올해 86세의 고옥련 할머니가 노래한다. 할머니는 ‘독수공방’부터 ‘서울타령’, ‘앞동산 봄 춘(春) 자요’, ‘개성난봉가’까지 4곡을 잇달아 부른다. 최상일 PD는 할머니의 노랫가락 사이사이 “아이고, 잘하시네!” 같은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운다. 그는 노래하는 할머니의 음정과 박자가 조금씩 엇나가는 걸 알고 있음에도 2시간 동안이나 가부좌를 틀고 그것을 빠뜨리지 않고 녹음한다. 노래가 멎을 때면 그는 할머니의 자식 얘기나 젊은 시절 시집온 얘길 끄집어내 슬쩍 노래로 넘어가게 한다. 그럼 할머니는 입에 다시 침을 바르고 저편 창문을 내다보며 추억에 잠기듯 입술을 움직인다. 이제 막 봄 열매를 맺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슬슬 흔들린다.
토속 민요를 방송하는 MBC FM 라디오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로 잘 알려진 최상일 PD. 그는 1989년 <한국민요대전>을 시작한 이래 하루에 몇 차례씩 짧게 내보내는 스폿 꼭지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만들어 지금까지 방송하고 있다. 정규 꼭지인 <한국민요대전>은 2008년 막을 내렸지만,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지금껏 8200여 회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방송을 위해 그는 전국 900여 개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전통 구전민요 1만8000여 곡을 녹음했다. 1년 중 절반 이상을 출장으로 집을 비웠고, 돼지고기와 소주를 사 들고 찾아가 산골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 한 곡조도 자주 뽑았다. 그는 소리를 수집할 때마다 노랫말을 즉석에서 받아 적으며 묻고 또 물었다. 소리를 들려준 노인들을 다시 만날 거라는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녹음이 한창 진행될 때는 할머니들끼리 서로 자기 소리가 ‘맞다’, ‘틀리다’ 싸우기도 했지만, 녹음이 끝나면 모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밤새 노랫가락이 이어지고 마을잔치를 벌였다.
밭 가는 소리, 풀 베는 소리 등 최상일 PD가 우리 민요를 녹음하는 모습
사실 최상일 PD가 이렇게 옛 민요를 찾아다니게 된 데엔 그만한 배경이 숨어 있다. 1957년 경기도 여주 출생인 그는 평소 우리 노래를 좋아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시절 이미 서도민요 ‘배따라기’를 술술 외워 불렀고, 상여 행렬이 지나는 소리만 들려도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크면서도 봄이 오면 동네 어른들과 함께 한강에 나룻배를 띄우고 뱃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그의 ‘우리 흥’ 즐기기는 197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후에도 탈춤과 판소리 배우기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MBC의 라디오 PD가 됐다. 원래 신문기자가 꿈이었지만,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전력 때문에 기자로 취직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음악만큼은 질리도록 들을 수 있는 라디오 PD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수북이 쌓인 음악의 산에서 거의 모든 레코드판을 하나씩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클래식, 가곡, 팝, 영화음악, 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맡았다. 하지만 세계의 음악을 두루두루 듣다 보니 무언가 아쉬움도 생겼다. 우리 음악을 찾는 이들은 왜 없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이전부터 귀에 익은 우리의 옛 민요를 찾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당시 우리 옛 민요를 찾는 프로그램의 기획안을 여러 번 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어요. 그런 게 대체 어디에 도움이 되느냐는 얘길 자주 들었죠. 그런데 마침 잡지 <뿌리깊은나무>에서 <팔도소리전집>이라는 음반을 내서 화제가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 소리를 녹음하면 재미있는 게 나올 거라고 확신했죠. 그때 지금처럼 이 프로그램에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이 들 줄 알았다면 분명 회사에선 제 기획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1989년 최상일 PD가 처음으로 우리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떠난 곳은 제주도였다. 다행히 제 주도의 우리 민요 녹음은 제주MBC에서 기초 자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어 단 7주 만에 끝났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걱정이었다. 설문조사와 탐문, 답사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전라남도만 해도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걸리며 한없이 진행이 늘어졌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전국의 이장에게 설문지를 돌리는 방법이었다. 당시 최상일 PD는 전국의 이장에게 설문지를 돌리고 전화도 몇만 통이나 걸었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평균 3박4일 답사를 통해 녹음할 마을을 골랐다. 제보를 믿을 수 없을 땐 직접 마을 구멍가게라도 찾아가 수소문했다. 지금껏 녹음을 진행한 마을이 전국 900여 곳이라지만, 사전 답사한 곳은 그보다 3~4배나 많았다.
추수가 끝나고 봄이 오기 전까지 ‘농한기’는 최상일 PD에게 말 그대로 ‘시즌’이었다. 쉴 틈 없이 ‘답사’와 ‘녹음’이 무한 반복됐다. 녹음팀은 엔지니어와 연구원, 아르바이트생 등 보통 예닐곱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데 강원도처럼 마을이 작은 곳은 한두 명을 데려가 기계를 만졌고, 전라도 한 마을의 경우 좌우 30명씩 60명의 소리 녹음을 한꺼번에 진행하기도 했다. 온 동네가 참여하는 소리판엔 마이크를 10개씩 설치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한 소리를 분류하고 걸러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민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보니 근처 마을에서 비슷한 소리가 많이 나왔다. 다를 게 없는 소리 같아도 진짜 원형을 간직한 제대로 된 노래가 있게 마련인데, 그걸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일에 대한 흥미를 갖고 노래를 비교하며 새로운 걸 건져내는 건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전문 지식이 없어 국악과 교수와 함께 다녔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레 전문가 없이도 혼자 소리를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쌓였죠. 그러다 정말 귀가 쫑긋 설정도로 훌륭한 노래를 마주한 순간도 있었고요. 소리를 찾아다닌 보람을 느끼는 건 바로 그럴때죠.”
최상일 PD는 그렇게 지난 25년 여간 ‘민요 전문 PD’로 불리며 다양한 민요 프로그램의 기획·제작을 맡았다. 중국 만주 일대 조선족의 민속·민요 취재 프로그램 <한민족 기행>과 전통 생활사 취재 프로그램 <최상일의 민속기행> 등을 제작했고, 1995년엔 <한국민요대전>으로 라디오 방송으론 이례적으로 ‘한국방송대상’까지 받았다. 물론 애초에 이렇게 거창한 뜻을 품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살아오며 줄곧 느낀 민요에 대한 애착이 그 순간순간에 작용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민요를 즐겨 들은건 맞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라디오 PD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우연과 필연이 결합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녹음하지 않았다면 정말….”
최상일 PD는 올해 안식년으로 휴가가 끝나면 영영 방송국을 떠난다. 아나운서 후배가 후임으로 오긴 했지만, 늘 뉴스 진행만 하던 친구라 고생할까 걱정스럽다. 그는 곧 현직에서 물러나지만, 앞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토속 민요를 발굴하고 싶다고 전했다. 전통문화가 남아 있던 시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전통음악을 맛보며 소년 시절을 보낸 그가 오늘날 이룬 업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오래전 여주 고향 마을에서 풍물을 즐기던 그의 풋풋함을 떠올리며, 그의 또 다른 ‘소리 찾기’ 여정을 응원한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보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