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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찬란한 순간

LIFESTYLE

성악가 안젤라 게오르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발레리나 강수진 같은 예술인의 사랑을 흠뻑 받는 패션 브랜드 라실루엣드유제니(La Silhouette de Eugenny)의 정윤민과 정유진 디자이너. 두 자매 디자이너는 무대의상, 연주복, 맞춤복 등을 만들며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장식한다.

라실루엣드유제니의 옷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닌 정유진, 정윤민 디자이너. (왼쪽부터)

자매는 모두 예원중학교와 서울예고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워낙 손재주가 뛰어나 화가를 꿈꾼 동생 정유진 디자이너는 이화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오롯이 저 자신에게 몰두하고, 저를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림이 좋았어요. 서양화와 디자인 사이에서 고민하다 옷에도 프린트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디자이너의 길을 택했죠. 옷에 그리면 더욱 입체적인 그림이 되잖아요. 제가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을 좋아하거든요. 그의 작품을 옷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실제로 이번 시즌에 잭슨 폴록의 프린트를 가미한 옷을 선보였고요.”
그런가 하면, 열일곱 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언니 정윤민 디자이너는 맨해튼 음악대학에 진학해 성악을 배웠다. “음악을 사랑했지만, 무대 안팎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힘들었어요. 오페라에서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거식증에 걸려 입원한 적도 있죠. 저같이 예민한 사람은 무대에 서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어요. 제가 어릴 때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섬유 박람회 ‘프르미에르 비종’에 가본 적이 있거든요. 원단에 펼쳐낸 그림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결국 성악을 그만 두고 텍스타일 디자인과 패션 마케팅을 공부했죠.”
두 디자이너는 공부를 마친 후 각자 영역에서 활동하다 힘을 합쳐 라실루엣드유제니를 세웠다. 둘은 매 순간 함께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기술적 조언을 놓치지 않는다. 정윤민 디자이너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디자인을 말하면, 정유진 디자이너가 그림으로 현실화한다. “제 상상을 그림으로 실현해내죠. 반대로 저는 동생에게 제 전문 분야인 원단에 대한 의견을 줄 수 있고요.” 하지만 디자인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적으로 자신만의 개성과 고유의 특징을 살리고,조언은 하되 간섭은 없다. “저와 언니는 같은 전시를 봐도 꼭 다른 그림을 고를 만큼 취향이 달라요. 하지만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요. 디자인에 정답은 없으니 열린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죠.”
서로 다른 취향만큼이나 특화 분야도 달라 각자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날개를 펼친다. 정유진 디자이너는 격식을 차리면서도 평소 입을 수 있는 우아한 맞춤복과 기성복을 만든다. 미술학도를 꿈꿀 만큼 자유로운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그녀지만 자신의 몫은 옷을 입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맞춤옷이 흔하지 않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기본을 중요하게 여겨요. 독특한 패턴과 절개선을 부담스럽지 않게 활용하면서 제가 원하는 선을 지키고, 입는 사람의 몸에 자연스럽게 떨어지면서 실루엣을 살리는 옷을 만들죠. 입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어요. 쇼룸에 커다란 작업실을 두고, 아틀리에 정신을 갖고 임해요. 제가 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당당해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만드는 저부터 만족해야 하니까 작은 러플이라도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디테일을 계속 수정해요.” 아무리 디자이너라 해도 옷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옷에 관한 건 다 좋아해요. 다른 디자이너가 풀어낸 방식을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상상한 것을 만들어볼 수도 있으니 너무 감사하죠.”
한편 정윤민 디자이너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무대의상, 연주복, 드레스,혼주복을 만든다. “대상이나 주제가 있어야 옷을 만들 수 있어요. 제 작품 세계를 펼칠 수도 있지만, 특정한 신이 필요해요. 한 장면과 한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옷을 만들 때는 이전 연주를 다 찾아봤어요. 하루 종일 그녀의 음악을 듣고, 초기에 입은 옷을 찾아보고, 인터뷰 기사를 읽었죠. 제가 만든 옷을 입을 사람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목표예요. 발레리나 황혜민과 함께 작업할 때도 전적인 이해와 존중감을 갖고 임했어요.”
옷을 입는 사람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 노력은 국제 무대로 뻗어나갔다. 미국 슈퍼볼에서 클래식 성악가 최초로 국가를 부른 르네 플레밍과도 작업했고, 세계 5대 소프라노 중 한 명인 안젤라 게오르규의 의상도 만들었다. “처음 안젤라 게오르규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두려움이 앞섰어요. 그녀의 전 인생을 탐구했고, 전성기 모습을 되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임했죠. 한국의 색깔을 알리고 싶어 고려청자의 빛을 따왔어요.안젤라 게오르규도 만족했는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제 옷을 올렸어요. 옷 잘 입는 성악가로 유명한 그녀에게 인정받은 셈이죠.”
정상급 음악가의 까다로운 취향도 만족시킨 그녀지만, 국립발레단 <허난설헌-수월경화>의 전막 의상 제작은 큰 도전이었다. “허난설헌이 살던 강릉 앞바다에도 가보고 그녀의 시선과 생각을 상상했어요. 그녀의 삶은 비극에 포커스를 맞출 때가 많지만, 저는 아름다움에 집중했어요.” 그녀가 이 공연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어느날 정윤민 디자이너에게 강효형이라는 학생이 의상을 리폼해달라며 찾아왔다. 학생이 고가의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 진심에 감동해 최선을 다해 작업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허난설헌-수월경화>의 안무가로 성장한 강효형은 정윤민을 찾아와 작품의 모든 의상을 맡겼다. 한번 진심을 다해 맺은 인연이 소중한 결실로 찾아온 것이다.
정유진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누구나 어려움을 경험하죠. 저도 집안일로 힘들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어요. 얼마 전 그 친구들과 아기들을 위해 제가 직접 지은 옷을 입히고 한껏 꾸민 다음 기억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었어요. 힘들 때 친구들만큼 저를 지탱해준 존재가 바로 옷이거든요. 제가 만드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행복해요.” 삶의 굴곡을 겪은 누군가에게 옷을 통해 위안을 주고 싶다는 그녀에게 패션 디자이너는 아무래도 천직인 듯하다. “평생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절충하면서 일해야겠죠. 주변에선 패션쇼를 준비하라고 성화지만 욕심 내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시간을 갖고 제게 맞는 때를 기다리려고요.”
이어서 정윤민 디자이너는 곧 예술의전당 기획 콘서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연말엔 발레리나 김주원과 이벤트를 선보일 거라고 귀띔했다. 의상에 관한 종합예술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도 밝혔다.
마음 같아서는 정윤민 디자이너의 인생에 남을 만한 영상 작품과 정유진 디자이너의 패션쇼를 당장 만나고 싶지만, 둘의 행보를 찬찬히 지켜보며 오래도록 응원을 보내고 싶다. 두 디자이너의 옷이 누군가의 순간을 찬란하게 빛내는 것처럼 앞으로 정윤민과 정유진 자매의 삶 또한 매 순간 반짝이길 바란다. 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김제원   시계 & 주얼리 협찬 Piag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