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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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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대함에는 빛나는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자체로 역사가 된 것들의 위대한 첫걸음을 돌아봤다.

1 코너 맥그리거의 데뷔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코너 맥그리거는 현재 세계 종합격투기의 아이콘이다. 헤비급이 아닌 경량급 선수가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만도 대단한데, 이 남자는 자신의 스타성을 무기로 UFC와 힘싸움까지 벌이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단순한 챔피언이 아닌 혁명가에 가깝다. 맥그리거의 UFC 첫 게임은 2013년 마커스 브리매지 전이다. 브리매지는 이전 경기에서 3연승을 달리며 신성이라 불리던 선수. 하지만 맥그리거는 자신의 장점인 엄청난 거리 감각과 독특한 자세, 정확도 높은 펀치를 구사하며 상대를 KO시켜버린다. 동시에 모든 관계자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UFC 역사상 가장 화려한 챔피언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1 ‘에어 조던 1’은 여전히 패션 아이템으로 군림하고 있다. 2, 3 나이키는 최근 ’12 솔즈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에어 조던 9와 11을 다시 공개했다.

2 에어 조던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는 나이키가 아니라 아디다스였다. 하지만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과 계약을 체결하고 ‘에어 조던 1’을 발매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이클 조던의 활약은 신화적이었고, 더불어 그의 이름을 붙인 농구화가 불티나게 팔리며 나이키의 매출 역시 기록적으로 성장한다. 평범한 흰색 농구화가 대부분이던 그 시절 강렬한 붉은색을 입힌 에어 조던의 디자인은 파격 그 자체였는데 시카고 불스의 레드 컬러 유니폼과 어우러지며 더욱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스타의 이름을 딴 소위 ‘시그너처 슈즈’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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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2년 만들어진 페리에 주에 보틀의 원형 2 페리에 주에 벨레포크의 현재 모습

3 페리에 주에


페리에 주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급 샴페인이지만, 이 아름다운 샴페인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꽃무늬로 장식한 페리에 주에 보틀의 원형이 100년이 넘었다는 사실도. 지금 보는 이 보틀은 최근의 형상이 아니라 1902년 세계적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가 제작한 것이다. 페리에 주에의 뚜껑을 따면 은은하게 퍼지는 백색 꽃향기를 형상화한 것인데, 100년 전에 디자인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현대적 디자인이다. 이 기념비적 보틀 이후 꽃은 페리에 주에의 상징이 되었다. 67년 후, 이 병을 모티브로 페리에 주에 벨레포크를 출시했다. 벨레포크는 현재 페리에 주에의 상징 같은 모델이 됐다.


조동진 1집

4 조동진 1집


한국 가요사의 흐름을 말할 때 늘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신중현이나 들국화, 조용필과 유재하 같은 이름. 하지만 이 와중에 여전히 숨어 있는 이름이 있다. 한국 포크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동진이다. 조동진의 영향 아래 어떤날과 유재하가 등장했고, 이들의 영향으로 유희열과 고찬용, 김현철 같은 뮤지션을 만날 수 있었다. 무려 30년 전에 발매한 조동진 1집은 사색적이고, 고요하고, 서정적이다. 한국적 서정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그 시초로 이 앨범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조동진은 최근 20년 만에 6집 앨범을 냈다. 앨범 타이틀은 ‘나무가 되어’ 한국 포크의 거목다운 제목이다.


김훈 <문학기행>

5 김훈 <문학기행>


김훈은 지금 한국 문학의 정상에 서 있는 작가지만, 그 시작은 기자였다. 물론 기자 시절에도 그의 문장은 대단했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 한국일보를 사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중 인기 코너가 김훈과 박래부가 함께한 ‘명작의 무대, 문학기행’이다. 1986년 5월부터 3년간 연재한 이 칼럼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을 두고 두 기자가 매주 번갈아 나라 곳곳을 뛰어다닌 기록이다. 김훈은 늘 문학이 의식주보다 한참 아래 있는 것이라지만, 이 글을 읽어보면 실제로 그가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초판은 1997년에 나왔으나 절판됐고, 현재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와 있다.


카멜레온의 시

6 카멜레온의 시


허영만은 두말할 것 없는 시대의 만화가다. 하지만 김세영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허영만의 이름도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스토리 작가 김세영은 1986년 허영만과 만난 뒤 그 유명한 <타짜>를 비롯해 <카멜레온의 시>,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등을 협업했다. <카멜레온의 시>는 허영만과 김세영이 처음으로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소년이 인간과 세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아직 만화를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여기던 당시 충격을 던졌다. 허영만의 세련된 그림체와 김세영의 문학적 스토리가 일으킨 시너지는 만화가 오락을 넘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허영만이 라이벌 이현세와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작가라는 걸 보여주는 시작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두카티의 쿠촐로

7 두카티의 쿠촐로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가장 섹시한 바이크 두카티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두카티는 원래 바이크가 아니라 전자 기기를 만들던 회사다. 라디오, 영사기, 타자기와 면도기, 심지어 카메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이 파괴됐고, 두카티는 그제야 비로소 바이크를 제작한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처럼 멋진 형상은 아니었다. 두카티가 처음 개발한 건 쿠촐로(Cucciolo)라는 엔진이다. 이 48cc 엔진을 자전거에 붙이는 형식이었다(1980년대의 한국만 생각해도 짐 나르는 남자들이 엔진 사이클을 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그런 형식이었다). 쿠촐로는 전후 이탈리아에서 혁명적 이동 수단이 됐고, 1946년부터 5년간 20만 대 가까이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마 그들은 지금처럼 섹시한 바이크가 될 줄 몰랐겠지만 말이다.


포르쉐 911

8 포르쉐 911


이 기념비적 스포츠카가 처음 등장한 건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RR 구동 방식과 6기통 복서 엔진, 매끈한 타원형 보디와 동그란 헤드램프, 5개의 원형이 연결된 계기반.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911만의 특징이다. 역설적으로 첫 911의 디자인이 얼마나 완성도 높았는지 알려주는 단서기도 하다. 이후의 스토리는 당신이 아는 바와 같다. 911은 세상 모든 스포츠카가 동경하고 질투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모든 포르쉐 시리즈의 상징이 됐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라이카 I

9 라이카 I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카메라는 일반인이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다. 휴대용 카메라가 아주 먼 얘기처럼 들리던 그때 한 기술자가 1925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이 카메라를 선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에른스트 라이츠(Ernst Leitz, Leica라는 이름은 라이츠에 카메라를 합해 만들었다). 사진 속 ‘라이카 I’이 최초로 시판된 라이카 카메라다. 지금의 표준과 큰 차이가 없는 50mm 화각과 F3.5 조리개값을 가진 이 카메라는 간결하고 튼튼한 만듦새로 당시 환호를 받았다. 물론 지금의 라이카도 마찬가지.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비싼 물건이라는 것이다.


100년 전과 지금. 호텔이 변한 만큼 도시의 풍경도 급격하게 변했다.

10 웨스틴 조선 호텔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호텔인 조선 호텔은 1914년 9월 30일, 서양식 호텔로 서울 소공동에 신축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Georg de Lalande)가 건축을 맡은 이 호텔은 건평 583평에 몸체 4층, 지붕층을 더한 5층 규모로 이루어졌다. 약 70개의 객실, 당구장, 볼룸 등의 부대시설에 엘리베이터와 당시 최고의 부를 상징하던 욕조와 샤워기 등을 갖춘, 20세기 초 이 땅에서 가장 호화로운 서양식 건물이었다. 건축을 위한 석재와 벽돌은 한국산을, 기타 자재는 일본산을 썼다. 실내 타일은 미국과 독일 제품, 실내장식 및 침구는 미국과 독일, 프랑스에서 제품을 들여왔다. 1967년 옛 조선 호텔이 철거되면서 다양한 물품이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이 경매에 부쳐질 만큼 품질이 우수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경이로울 정도다.


코닥 DC40

11 코닥 DC40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개발한 건 캐논이나 니콘이 아니다. 필름 회사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의 원조다. 코닥 DC40이 처음 등장한 건 1995년. 아직 MP3도 등장하지 않았을 때다. 38만 화소에 4MB 메모리를 내장한 이 카메라는 혁명적 제품이었다. ‘필름 없이 사진을 찍는다’는 개념은 지금으로 치면 ‘일반인이 우주여행을 한다’는 개념쯤 될까. 화각 42mm, F2.8이라는 밝기는 꽤 훌륭했지만 판매는 시원찮았다. 가격은 2만 달러가 넘었고, 크기는 기존 카메라의 2배나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주는 제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닥은 눈 앞의 미래를 놓치고 만다. 다시 필름카메라 시장에 주력했고,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갔다. 그 결과 코닥은 2012년 파산 보호 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제일 먼저 디지털 기술을 갖췄음에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죄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유니더스 ‘롱 러브’

12 유니더스 ‘롱 러브’


콘돔 제작업체 유니더스는 2000년 11월 29일 코스닥에 상장했다. 큰 기대를 모았지만 주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섹스는 여전히 대놓고 말하기 힘든 단어였고, 콘돔 역시 다소 꺼림칙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2004년 주가가 급반등한다. 유니더스의 야심작 ‘롱 러브’가 나오면서다. 롱 러브는 국소마취 성분인 벤조카인을 콘돔 끝부분에 넣어 사정을 억제하도록 고안한 발명품이었다. 조루로 고민하던 수많은 남자가 이 제품에 몰려들었다. 성 개방 풍조가 들이닥친 당시 분위기 덕에 콘돔은 더 이상 부끄러운 물건도 아니었다. <르몽드>가 1면에 특집 기사로 실을 정도로 롱 러브의 인기는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롱 러브의 대성공에 힘입어 유니더스는 현재 세계 1위 콘돔 제작업체가 됐다.


연덕춘

13 연덕춘


한국 골프는 세계 무대에서도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다. 뜻밖에 그 시작점은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1930년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캐디로 일한 연덕춘이 그 주인공이다. 캐디로 일하며 골프를 익힌 그는 1935년 일본프로골프협회 프로 자격증을 획득한다. 1941년에는 조선인 신분으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당시 국내 프로 골퍼는 오직 연덕춘 한 명이었으며,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멸시도 여전하던 시기였다. 그의 우승은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은 대단한 성과였다. 그가 있었기에 현재 한국 골프가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펜더 에스콰이어 프로토타입

14 펜더 에스콰이어 프로토타입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은 2009년 펜더사에서 오직 한 대뿐인 기타를 헌정받았다. 전설적인 음악인에게 단 하나뿐인 기타를 헌정하는 ‘펜더 커스텀 숍 트리뷰트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누군가 펜더의 기타를 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펜더 기타의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청년 신중현이 미8군에서 연주를 시작할 때쯤, 펜더의 역사도 시작됐다. 지금 보는 이 모델은 1949년에 제작한 펜더 최초의 솔리드 보디 프로토타입이다. 이 모델은 후에 펜더의 히트작 텔레케스터의 원형이 됐다.


가우디의 카사 비센스

15 가우디의 카사 비센스


안토니오 가우디는 1878년에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는 자격증을 따자마자 곧바로 한 저택의 설계를 의뢰받는다. 그게 바로 가우디의 처녀작으로 일컬어지는 카사 비센스다. 가우디는 1883년에 이 건물의 공사에 착수해 1888년에 완공했다.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을 짓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 건 수많은 타일의 사용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가우디에게 건축을 의뢰한 이는 타일 공장 경영자였다. 당연히 타일 공급에 대한 부담이 덜했을 테고, 가우디의 상징과도 같은 타일 장식은 꽃과 나무, 나뭇잎 등을 형상화하며 벌집 같은 느낌의 외관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카사 비센스는 가우디의 후기작에 비해 상당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천장에선 스페인 전통 양식이, 기와에선 중동의 느낌이, 창살에선 동양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묻어난다. 말하자면 카사 비센스는 동서양의 여러 양식을 혼합한 실험적인 건축물이다. 젊은 가우디가 얼마나 즐겁게 설계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울티마 온라인

16 울티마 온라인


>MMORPG의 뼈대를 만든 게임.’ 울티마 온라인을 두고 회자되는 말이다. 이 게임이 등장한 건 1997년. 인터넷이 막 등장한 시기라 통신 환경도 불안하고 결제 시스템도 엉망이었지만, 울티마 온라인은 발매 6개월 만에 유료 회원 10만 명 돌파라는 신화를 쓴다. 수많은 사용자가 함께 하는 멀티플레이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캐릭터를 키우는 자유 개념은 이후 ‘에버퀘스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메가히트작으로 발전했다. 울티마 온라인은 놀랍게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버를 운영 중이다. 올드 게이머라면 한 번쯤 접속해보는 것도 좋겠다.


1세대와 6세대 그랜저의 모습. 불과 30년만에 현대자동차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7 현대 그랜저 1세대


지금의 현대차를 있게 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쏘나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질적 성장, 즉 고급에 대한 수요가 생긴다. 그랜저는 바로 이 질적 성장에 대한 욕구로 탄생한 모델이다. 하지만 1986년 당시만 해도 독자 개발은 무리였다. 현대는 미쓰비시에 도움을 청했다. 디자인은 현대가, 그 외의 기계적 부분은 미쓰비시가 담당한 결과 우리가 ‘각 그랜저’라고 일컫는 1세대 그랜저가 등장했다. 실내 공간은 당시로서는 광활하다 할 정도였고, ABS와 차체 자세 제어 시스템과 속도 감응형 와이퍼, 크루즈 컨트롤, 풀 오토 에어컨 등 화려한 첨단 장비를 도입했다. 특히 V6 배지가 달린 그랜저의 위엄은 지금의 수입차 이상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그랜저 IG는 현대차의 수준을 다시 보게 한 훌륭한 차다. 30년 전만 해도 독자 개발이 힘들던 브랜드가 이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칭찬을 아낄 이유가 없다.


아널드 파머의 첫 마스터스 우승

18 아널드 파머의 첫 마스터스 우승


잠깐, 아널드 파머라는 이름이 들어간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류 브랜드, 골프장, 골프 대회, 심지어 아이스티와 와인까지. 아널드 파머는 이미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된 골프의 왕이다. 전설의 시작은 1958년 마스터스 우승이었다. 1958년 마스터스 대회 마지막 결승전을 앞두고 밤새 내린 비로 그린은 엉망이었지만, 아널드 파머는 그 유명한 마스터스의 아멘 코너(11번 홀과 13번 홀 사이의 코스)에서 18피트 퍼팅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우승을 거뒀다. 그 우승 때문인지 그는 TV 중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이후 마스터스에서 세 번 더 우승하고 PGA 투어 통산 62승을 거두는 전설적인 활약을 보였다. 아널드 파머는 이후 2004년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마스터스 골프 대회에 참가했으며, 2004년 50번째 마스터스 출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에디터 이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