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류궈쑹
타이완에서 활동 중인 회화 작가 류궈쑹은 ‘현대 수묵화의 아버지(father of modern chinese ink painting)’로 불린다. 중국 미술계에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파가 득세할 때 기득권층에 편입되길 거부하며 ‘오월회화(the Fifth Moon Group)’를 창립해 전통 회화의 현대화를 이루어냈고, 종이와 거친 나무껍질 섬유를 결합한 ‘류궈쑹 페이퍼’를 개발해 회화도 새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 2000년 티베트 여행 중 고산병으로 왼쪽 귀의 청각을 거의 잃었음에도 “왼쪽 귀로 잔소리를 차단할 수 있어 더욱 청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혀 후배 작가들을 다시 한번 감동시켰다. 주변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위풍당당한 겸손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국과 타이완, 비행기로 2시간 30분 거리, 같은 아시아권에서도 거리상 유독 가까운 나라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양국 간 어떤 교류도 서먹하고 어색했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 단교를 선언한 것이 타이완 정부와 국민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의 정기 항공 노선이 재개됐을 정도로 두 나라의 수교 단절은 10년 넘게 경제, 통상을 비롯해 문화 예술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항공 노선이 활발하게 운항되고 한국의 드라마와 K-팝이 타이완 국민에게 인기를 끌면서 서서히 양국 간 거리는 좁혀지기 시작했다.
문화 예술계에서는 무엇보다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대만 교류전 <대만 현대미술(Rolling! Visual Art in Taiwan)>’이 큰 역할을 했다. 대중문화뿐 아니라 순수예술에서도 두 나라의 접점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 이 전시는 195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32명의 작품을 소개해 동아시아권 국가인 양국의 예술적 유사점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수묵화부터 4차원 입체 영상 작품까지 서울시립미술관을 가득 채운 작품 중 류궈쑹(Liu Kuo-Sung)의 대작 ‘우주는 나의 마음’은 정치색 짙은 다른 작품 속에서 유달리 빛을 발했다. 당시 동행한 큐레이터와 함께 그 작품 앞에서 수묵화로 그린 추상화의 상상을 초월한 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기억한다. 류궈쑹 블루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수묵화에 나타난 신비로운 감색과 강렬한 붓질은 중국의 추상 수묵화가 모더니즘 추상화에서 강조한 회화성과 서예적 즉흥성이라는 전통 중국 회화의 요소 사이에서 태어났음을 관람객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지난 3월 아트 바젤 홍콩의 인사이트 섹션에서 갤러리 드몽은 타이완 현대미술 초기 작가들의 1960~1970년대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에도 류궈쑹 작가의 작품은 그 중앙에 전시되었다. 아트 바젤 홍콩의 인사이트 섹션은 중요한 작가를 선정해 작품을 전시하되 판매는 하지 않는다. 작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아트 페어에서 갤러리스트가 특정 작가를 선정, 그들만의 전시를 꾸미는 일은 그래서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트 페어를 찾는 전 세계 컬렉터가 타이완 추상 수묵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는 갤러리 드몽 대표의 설명에 부응하듯, 부스 한편에서 류궈쑹 작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1시간 동안 수십 명의 컬렉터와 미술계 인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와 격한 포옹을 나눴다. 86세의 노작가 류궈쑹은 놀랄 만큼 젊고 정정했다.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는데,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나 나오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중국 쓰촨 성 남서 지역의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을 여행하면서 새벽녘에 일어나 마주한 아침 햇살의 감동을 화폭에 옮긴다는 그를 아트 바젤 홍콩에서 만났다.

1Zen Pass, Ink on Paper, 86.5 x 56cm, 1963.
2Moon’s Metamorphosis 229, Ink and Color on Paper, 102.3 x 53.2cm, 2015.
아트 바젤 홍콩에 참가한 갤러리 드몽에서 선생님을 위시한 타이완 현대미술 초기 작가들의 1960~1970년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세계적 아트 페어에서 타이완 작가들의 초기 추상 수묵화를 소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 2014년에 홍콩의 갤러리 드몽에서 개인전을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아트 바젤 홍콩처럼 멋진 페어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1960년대에 타이완에선 중국 수묵화가 전통의 보수적인 흐름 속에 있었어요. 저는 당시 서양 회화와 마티스, 피카소 같은 거장의 그림을 보면서 중국의 전통 회화가 시대를 지나면서 점점 단조로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중국 미술계엔 창작과 혁신이 필요했죠. 그러나 보수적인 예술계에서 뭔가 창조적인 시도를 한다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텃세가 심했고, 아무도 그런 도전을 인정해주지 않았죠. 하지만 저는 현재에 머무르기보다는 고꾸라지더라도 도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여기 1960~1970년대 작품들을 보세요. 중국 전통 회화를 꾸준히 모방만 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1957년에 오월회화를 창립하고 타이완에 모더니즘 회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오월회화는 한국 대중에게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데, 우선 간략하게 오월회화의 시작을 알려주세요. 타이완의 국립사범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한 전시에 저와 제 친구 몇 명이 초대를 받아 작품을 보냈습니다. 그때가 12월 즈음이었어요. 선정된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니 “그림이 패기가 넘치고 스타일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저를 비롯한 4명의 작가가 모여 매년 12월에 전시를 하자 하고 시작한 게 오월회화입니다. 많을 때는 멤버가 10명까지 늘어나기도 했죠.
같이 전시를 하기 위한 것이 오월회화의 창립 동기라는 말씀인가요? 네. 초기에는 정말 전시가 목적이었습니다. 중국 미술계는 매우 보수적이었어요. 전통적 회화를 벗어난 그림을 전혀 수용하지 않았죠. 미술대전이 숱하게 많아도 제 작품은 절대 뽑히지 않았습니다. 너무 새로웠으니까요. 당시엔 미술대전에서 상을 타지 못하면 전시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이 운동을 시작했어요. 물론 우리만의 슬로건은 있었습니다. ‘중국 회화의 현대화’. 중국 화법의 혁명과 20세기 중국 미술의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요.
아시아에서 추상회화는 모더니즘의 행보에 따라 193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1940년대 말에 김환기 작가가 초기 추상을 시작했죠. 타이완에서는 선생님 이전엔 초기 추상화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도 그때는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하기 전이었죠. 타이완에서는 1957년에 저희가 처음 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중국 산둥 성 칭저우 출신인데, 중국 국공내전(1927~1950년에 일어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 이후 1949년에 대만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열일곱 살이었죠. 이주 당시 중국과 대만의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중국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승리했고, 그래서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밀려났어요. 저는 중국에 어머니를 두고 학업을 위해 혼자 타이완으로 건너왔어요. 타이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 안부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로 답장이 왔고요. 다시 그에 대한 답장을 보냈는데, 그 후로는 편지가 오지 않았습니다. 국공내전은 끝났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그만큼 악화되어 있었죠.
어머니와 어쩌다 따로 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국민당 장제스 아래에 있던 군인이었어요. 중일전쟁 중에 돌아가셨죠.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1987~2003년)이 난징에 군인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웠는데, 저도 거기에 다녔습니다. 중일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만큼 우리 가족은 가난했어요. 저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죠.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장제스의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학교도 이사를 가야 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죠. 그래서 혼자 타이완으로 갔습니다. 아마 중국에 남았다면 길거리에서 담배나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을 겁니다. 타이완으로 갔기 때문에 학교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죠.

1Which is Earth No. C, Ink on Paper, 115.5 x 77.3cm, 1969.
2Harmonious Reflection, Ink and Color on Paper, 83.2 x 103.2cm, 2013.

Windy Solitude, Ink and Color on Paper, 58.5 x 87.5cm, 1964.
타이완으로 이주한 후 국립사범대학교에서 서양화와 필묵(traditional brush-andink)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림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난징에 살때 학교에 가려면 표구 가게 앞을 지나야 했어요. 매일 하교할 때마다 가게 유리창 앞에서 표구를 맡긴 그림을 구경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제가 매일 같은 시간에 구경을 하니까 하루는 주인이 불러서 “그림 좋아하니? 그릴 줄 알아?” 묻길래 “좋아하는데 종이도, 물감도 없어서 그려본 적은 없어요”라고 하자 그림 도구를 잔뜩 사서주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림을 그려서 가게 주인에게 보여주고 어드바이스를 받았어요. 그분이 제 첫 미술 선생님인 셈이죠.(웃음)
당시 타이완의 미술대학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중국과 타이완의 대학 교육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네, 거의 비슷합니다.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죠. 특히 중국의 미술 교육은 모방하기, 즉 본뜨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중국 전통 회화를 그대로 본떠서 연습하라’고 했죠. 미술 교육을 하는데 마치 기술자를 양산하듯 훈련을 시킨 겁니다. 저는 그런 교육에 반대해요. 예술가를 길러내는 건 높은 빌딩(skyscraper)을 짓는 것처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건 어떤 방식의 교육을 말하는 건가요? 랜드마크가 되는 건축물은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이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남과 다른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나만의 독창성을 구축한 후 그것이 전문가의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연습, 또 연습해서 그 질을 높여야 하죠.
그렇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도 하잖아요. 다른 것을 카피하면 할수록 자신만의 스타일 찾기는 어려워집니다. 제가 홍콩의 중문대학교(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에서 21년간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베껴 그리는 건 절대 못하게 했습니다. 기존의 교육 방식과 다른 부분 중 하나였죠.
대학 시절에 선생님은 미술 외에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들었습니다. 글과 그림이라. 꽤 정적인 학생이었나봐요. 미술 외에 문학도 매우 좋아해서 문학 수업을 들으며 소설도 썼고, 고등학생들이 보는 잡지에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시인과 시>라는 문학잡지의 에디터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운동도 좋아해서 대학교 1학년 때는 (아마추어) 농구 선수로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농구를 너무 좋아해서 제가 미술학도라는 걸 까먹을 정도였죠. 하루는 교수님이 학교 대항 농구 경기에서 뛰고 있는 저를 보더니 “농구 잘하는 줄 알았는데 별로네” 하시는 거예요. 기분이 상한 저는 그 후로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고 그림에 열중했어요. 여름방학 내내 그림만 그렸죠. 개학 후 교수님을 뵈었는데, 제 그림을 보시고 “와, 그림 실력이 많이 늘었네” 하시며 붓과 물감을 새것으로 바꿔주신 기억이 납니다.(웃음)
1966년에는 록펠러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뉴욕에 9개월간 머무셨습니다. 리 노드니스(Lee Nordness) 갤러리에서 작품을 소개하며 ‘타이완의 뛰어난 청년 10명 중 한 명’으로도 뽑히셨습니다. 그즈음 작업하신 것이 태양과 달, 음과 양, 남과 여를 상징하는 ‘우주’ 시리즈죠? 그렇습니다. 제가 달을 주로 그리던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시기를 ‘우주 시대’라고 부르더군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작업한 작품입니다. 달과 태양을 형상화한 ‘우주’ 시리즈를 작업할 때도 여전히 그림의 아랫부분은 추상 스타일을 고집했습니다. 수묵으로 시작하다 조금씩 컬러를 넣기도 했고요. 저는 전통적 중국 화법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접근 방식을 추구했는데, 특히 북송 시대(960~1126년)와 남송 시대(1129~1279년)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추상적 표현주의 같은 현대 스타일과 테크닉을 입혔습니다. 콜라주와 수묵화를 조합하거나 특수한 종이에 먹과 색을 함께 입히는 방법도 사용했죠.
서양의 추상과 동양의 추상,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선 서양 회화는 선을 끊임없이 그려나가는 레이어링을 기본으로 합니다. 계속 덧붙이고 덧칠을 하는 데 반해 중국 회화는 먹의 선과 점을 통해 화면을 채워나가는 방식입니다. 제가 구축한 추상은 그것과는 또 다릅니다. 우선 ‘류궈쑹 페이퍼’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네요. 저는 특별 주문한 종이를 사용하는데, 종이의 섬유질을 더 크고 거칠게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일반 종이를 손전등으로 비춰보면 아주 가는 섬유질이 모여 매끈한 표면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아주 크고 거친 섬유질을 더 얹는 거죠. 그 종이에 잉크를 칠한 후 거친 섬유질을 살짝 떼어내면 자연스러운 화이트 라인이 만들어지면서 흑과 백이 오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제 생각대로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섬유질의 모양대로 라인이 생겨나는 거죠.
흰 선의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색 선을 강조한 것, 흰색은 오브제, 검은색은 배경으로 접근한 것, 물과 태양, 달의 다변적 조합 등을 보면 선생님의 창의력과 테크닉은 최고의 궁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아이디어와 작업 에너지는 어디서 얻으시나요? 제 영감과 에너지는 모두 일상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쓰촨 성에 있는 계곡 주자이궈우, 티베트의 에베레스트에서 느낀 감동이나 경험이 모두 작품에 투영되죠. 제가 좋아하는 송 왕조(the Song dynasty)의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받습니다. 송 왕조 예술가들은 그 시대에 선구자였고 첫 추상 미술가였으며 서양보다 700년 앞선 인물들이니까요.

타이완의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류궈쑹 작가.
지금도 작업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시나요? 네. 타이완과 상하이에 작업실이 있는데, 주로 타이완의 작업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여전히 글을 좋아해서 잡지나 신문, 책도 많이 읽고요. 아, 여행과 산행도 즐기는 편이에요. 해외 미술 행사엔 자주 가는 편이 아닙니다. 대신 평소 수묵화 전시와 세미나에는 자주 참석하고 있습니다. 국립사범대학교 순수미술학과의 석좌교수로 재직할 때도 그랬지만 저는 제 아이디어를 젊은 예술가들과 공유하는 것을 매우 즐깁니다.
중국의 추상 수묵화가 전 세계 아트 마켓에서 주목받기까지 1세대 현대미술 작가들의 노고가 참으로 컸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을까요? 저는 1960년대부터 전시회와 세미나를 통해 중국 전통 수묵화의 현대화를 알리는 데 매진해왔어요. 현재의 이런 결과로 그 보답을 받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중국의 수묵화가 이제는 글로벌 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제대로 평가받게 되어 기쁘고요. 올해도 유수의 해외 미술관에서 수묵화 전시를 앞두고 있고, 매년 홍콩에서 개최하는 아트 페어 INK Asia도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지금껏 한국과 타이완의 예술적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한국의 미술 애호가들도 추상 수묵화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 매력을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제공 갤러리 드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