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의 수도 릴, 가을의 도시
9월 26일부터 내년 1월 17일까지 ‘르네상스’라는 테마로 프랑스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릴에서 ‘릴 3000’ 페스티벌이 열린다. 도시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도시 재발견의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한다는 의미의 이 행사는 ‘3000년까지 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깊은 속뜻을 품고 있다. 한국 대표 작가들이 서울을 테마로 준비한 <서울, 빨리빨리(Seoul, Vite Vite)>전은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릴(Lille)은 프랑스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인구 20만 명의 도시다.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 에리크 종카가 1998년에 제작, 발표한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의 배경 도시이기도 하다. 인생의 고달픔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거나 또는 너무 힘들어서 꿈조차 잃어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청춘의 위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릴의 모습 또한 그래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20세기 초반 석탄과 철강 그리고 방직 산업으로 부를 누린 릴은 1970년대 들어 노동력 싼 아시아에 일을 빼앗기면서 쇠퇴했고 높은 실업률로 몸살을 앓았다.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 속 릴의 이미지는 많은 프랑스 사람의 뇌리에 박힌 릴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하지만 릴은 프랑스를 영국과 벨기에로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였고, 이를 적극 이용했다. 특히 릴에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 역사적 사건이 1994년 11월 14일 일어났는데, 바로 프랑스와 영국을 가로막고 있던 도버 해협에 해저 터널을 뚫어 그 사이를 운행하는 고속열차가 개통된 것이다.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발하는 이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기 전 릴을 지나게 되었고, 릴은 영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지로서 빛을 발하게 됐다. 릴의 야심은 이를 통해 경제적 부흥을 꾀하고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멋진 건축물을 짓기 위해 세계의 훌륭한 건축가를 초대하고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러면서 빛을 본 것이 바로 2004년에 기획한 ‘릴 3000(Lille 3000)’이라는 대규모 문화 행사다.
영국인 아티스트 부부 루시 오르타와 조지 오르타의 작품 ‘Cloud Meteoros’(2013년).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에 설치했다. / ⓒ Lucy+Jorge Orta(ADGAP) Photo by Sam Lane

코리 발도프(Corrie Baldauf)의 컬러 프레임을 사용한 작품 ‘Frames for the People: A City of Halos’ / ⓒ Sebastian Sullen

릴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트리포스탈에 전시하는 쥘리 포르티에(Julie C. Fortier)의 작품 ‘La chasse’(2014년)/ ⓒ Julie C Fortier

서울 특별전과 함께 개최하는 에인트호번 특별전에 참가하는 바르트 헤스(Bart Hess)의 작품 ‘Vous Avez Dit Bizarre’
예술과 축제가 어우러진 행사, 릴 3000
릴 3000은 ‘릴 2004 유럽 문화의 수도’라는 이름의 조직위원회에서 기획했다. 비엔날레와 페스티벌을 섞어놓은 형식으로 2006년 시작해 3년마다 열리는데, 길거리 축제와 대규모 퍼레이드, 공연과 전시가 이어지고, 그 옆으로 다양한 음식 행사도 마련한다. 그 기간에 열리는 이벤트 수만 500개가 넘고 방문객 수도 900만 명에 달한다.
올해 5월 파리와 릴 두 도시에서는 프랑스와 외신 기자를 초청한 릴 3000 프레스 콘퍼런스가 열렸다. 릴 시장 마르틴 오브리(Martine Aubry), 행사 총괄 디렉터 이반 르나르(Ivan Renar)와 함께 행사 관계자들이 참석해 릴 3000이 릴 도시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것을 드러냈다. “올해 탄생 10주년을 맞는 릴 3000은 릴 고유의 에너지와 창조력, 삶 속에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보여주었고 릴의 전체 모습까지 바꾸었습니다. 현시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창작 활동을 통해 새로운 문화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모습을 함께 탐구해볼 수 있었거든요. 이 행사로 우리는 하나 되고 세계를 향해 활짝 문을 열었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마르틴 오브리 시장은 이렇듯 자랑스럽게 릴 3000을 소개했다.
그의 말처럼 릴 3000의 의의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릴 3000은 프랑스 밖의 문화를 적극 소개하고자 했다. ‘릴의 뭄바이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 첫 번째 축제를 개막했다. 인도와 관련된 음악, 영화, 연극, 춤, 전시를 선보이며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인도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 관객이 문화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게 기획한 행사다. 이후 2009년엔 ‘유럽 XXL’이라는 제목으로 동유럽 국가를 초대했고, 2012년에는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으로 다이내믹한 기획을 선보이며 회를 거듭할수록 참여하는 단체와 기획 공연, 전시, 그리고 무엇보다 관람객 수가 증가하고 있다.
르네상스, 새롭게 태어나다. 5개의 도시, 5개의 문화
4회째를 맞는 올해의 테마는 ‘르네상스’다. 재생과 부활을 뜻하는 르네상스의 의미에 부합하는 5개 도시의 문화를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 이번 행사의 의도. 5개 도시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미국 디트로이트,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베트남 프놈펜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이다. “15세기의 르네상스가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다면, 21세기의 우리는 새로운 세계와 이 세계의 균형, 발명과 혁신이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방식도 변하고 있지요. 이런 거대한 ‘변신(metamorphose)’은 새로운 매체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지적·예술적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르네상스를 함께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릴 3000의 총괄 디렉터 이반 르나르는 올해 행사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릴 3000이 올해 소개할 5개 도시는 과거에 경제적 위기나 사회적 침체를 경험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21세기 들어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맞춰 특유의 강점을 찾아내고 이를 발전시키며 변화를 이룬 도시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올해 행사에서 각 도시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선보일 계획인데, 특히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도시를 바라보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물론 현대미술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브라질의 삼바 축제 단체를 5팀이나 초대해 개막식 당일 길거리 곳곳에 삼바 음악과 춤으로 축제 분위기를 한껏 띄울 계획이라고 하니 9월 26일 개막식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올해 릴 3000 페스티벌의 서울 섹션에 참가하는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품과 최우람 작가의 작품 ‘URC-1’

올해 릴 3000 페스티벌의 서울 섹션에 참가하는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품과 최우람 작가의 작품 ‘URC-1’

서울 섹션에 참여하는 정연두 작가의 작품 ‘Hero’(1998년)
서울, 한강의 기적에서 한류의 기적까지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던 한국이 이렇듯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낸 변화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를 ‘기적’이라 표현하듯 지구 상에 이렇듯 단기간에 큰 변화를 겪은 나라는 거의 없다. 올해 릴 3000에서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이 이제 한 템포 속도를 늦추고 보다 풍성한 문화를 창조하고자 노력하는 지금, 그 중심에 있는 서울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서도호, 이불, 최우람, 최정화, 문경원 & 전준호, 이세현 등 정상급 작가들이 릴의 대표적 현대미술관 트리포스탈(Tripostal)에서 전시를 연다.
마침 2015년과 2016년은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두 나라의 교류전이 활발히 열리고 있는 상황. 그중에서도 이 전시는 프랑스 미술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한국 현대 미술을 소개하는 장이 될 전망이다. 트리포스탈은 프랑수아 피노의 컬렉션 전시와 영국을 대표하는 컬렉터 찰스 사치 소장전, 에마뉘엘 페로탱 갤러리의 업적을 기리는 대규모 전시 등을 기획하면서 프랑스 북부 지역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파리지앵도 트리포스탈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를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1시간 30분 거리의 이곳을 찾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서울을 조명하는 전시 <서울, 빨리빨리 (Seoul, Vite Vite)>는 프랑스 미술계의 대표적 독립 큐레이터 장 막스 콜라(Jean Max Colard)가 기획자로 참여했다. 그는 이 전시를 통해 한국이 이루어낸 성공과 발전, 미래를 향한 다이내믹한 움직임, 그리고 이렇게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 겪어야 한 소외감과 불안 등 한국이 지닌 양면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장에서 발견한 싸구려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최정화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릴의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트리포스탈의 넓은 전시 공간 1층에는 거대한 미래의 생명체 같은 최우람 작가의 조각 작품을, 2층에는 유토피아나 폐허를 연상시키는 거울을 이용한 이불 작가의 설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분단이라는 한국의 아픈 역사와 한국인의 한,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을 붉은색 풍경화로 그리는 이세현 작가의 대형 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또한 전시 공간에 서울 시민의 한 아파트를 재현해 설치할 예정이라 벌써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을 직접 방문해 작가들을 만나고 지금의 서울을 관찰한 기획자 장 막스 콜라가 기획한 이 전시의 중심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고자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과 예술에 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 대화의 일부를 싣는다.
Interview with Jean Max-Colard
이번 전시를 위해 서울을 두 번 방문했다고 하셨는데, 한국과 한국 현대미술 현장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요?
한국을 방문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훌륭한 한국 예술가를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불·김수자·구정아·서도호 등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고, 프랑스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는 한국의 젊은 작가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그러나 서울에 직접 가보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정말 풍부한 한국의 미술 현장을 실감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을 비롯한 미술관의 주요 프로그램, 그리고 지난해 10월에 직접 찾은 광주비엔날레 등을 돌아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시 제목을 ‘서울, 빨리 빨리’로 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에 관한 필리프 피키에(Philippe Picquier)의 소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수필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한국 미술계, 나아가 한국의 복잡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저는 한국 영화를 비롯해 문학(그는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디자인과 음악 등 여러 분야를 탐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 사람이 즐겨 쓰는 ‘빨리빨리’라는 표현이 지닌 이중성에 흥미를 느꼈어요. 첨단을 걷는 한국의 현대화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야기되는 문제와 사고에 대한 우려도 내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빨리빨리’라는 표현에 내포된 비판정신이 전시에 초대한 작가의 작품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랬군요. 이번 전시에 참여할 작가와 작품을 선정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중점적으로 봤나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이 지닌 깊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요소죠. 동시에 한국 현대미술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에 중심을 둔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 전시는 릴에서 열리는 5개 도시에 관한 축제 및 전시 행사의 일환으로 기획했다는 걸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르네상스’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 대규모 행사에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베트남 프놈펜, 미국 디트로이트, 벨기에 에인트호번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을 소개합니다. 현대엔 어떤 국가보다는 도시의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미술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한국 미술계의 풍부함과 장황함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어요. 작가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 역시 일반적 한국 현대미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아니라 이렇게 특정 주제가 하나의 프리즘으로 작용하는 전시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러나 이 전시는 도시화나 건축에 관한 전시가 아니라 현대미술 전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도시와 예술 작품 사이의 역동적 대화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시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 도시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나 잠시 그 도시를 방문한 작가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지, 그래서 작가들이 서울에 대해 어떻게 작품에 표현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시의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시에 서울의 어떤 점을 담고 싶은가요?
서울의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현대미술 작품을 통해 상상한 아름다운 서울의 정신을 담고 싶습니다. 저는 미술계가 다양한 미적 가치와 예술 작품이 긴장감 있는 관계를 맺고 서로 충돌하는 세계라는 것을 압니다. 서울은 저에게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북한과의 대치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자체도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죠. 북적거리는 강남, 전통적인 북촌, 작가들이 거주하는 소격동 등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매우 강렬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저는 서울이 지닌 거친 단면과 지역성의 대조, 도시 생활의 다양한 속도에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이 부분을 여러 작가가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정소영 작가의 ‘조각난 풍경’이나 문경원·전준호 작가의 영상 작품 ‘q0’을 통해 잘 드러나죠.
프랑스인이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대부분 한국 문화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한국 영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모두 한국 영화를 매우 좋아합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선 K-Pop이 인기를 끌고, 미술 분야에서는 페로탱 갤러리에서 선보인 단색화 작가(박서보, 정창섭)의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한국 문화를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전시가 한국 문화에 대한 복합적 시선을 선물하고 한국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최선희(아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