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미학
요즘 디자인 분야에서 핫이슈로 떠오른 ‘음식’. 식탐 부려 찾아낸 푸드 디자인의 새로운 트렌드.
마레이 포엘장의 셰어링 런치 퍼포먼스

배설을 예술로 승화시킨 <잇 싯(Eat Shit)> 전시
디자인을 입고 진화하는 식문화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을 둘러싼 의식주, 이 세 영역 중에서 1990년대 이후 가장 혁신적으로 변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식문화다. 의복과 주거 환경에 비해 진화가 더디고 그나마 유수한 전통의 재현을 반복하는 보수적인 영역에 머물렀으나,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조리법과 예술적 감성을 결합해 새로운 요리를 개발한 스타 셰프의 활약에 힘입어 놀라울 정도로 약진했다. <타임>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아방가르드 퀴진의 선구자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 법학도 출신으로 이탈리아 전통 식자재에 현대미술의 감성을 접목한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봄날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가르구유(gargouillou) 플레이팅을 선보인 미셸 브라(Michel Bras) 등의 요리를 통해 경험한 감각적인 식사가 디자인과 예술계를 각성시켰다. 음식과 관련한 디자인 영역이 단순히 조리 도구나 식기 디자인에 머물지 않고 조리법과 플레이팅, 먹는 방법과 경험의 가치에 이르는, 전방위적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계기가 된 것. 한편 디자인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 스페인 디자이너 마르티 긱세(Marti Guixe)가 처음으로 푸드 디자인(food desig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이래 많은 디자이너가 식문화의 디자인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예술계에서도 2010년대 이후 뉴욕의 MoMA, 밀라노의 트리엔날레 등 역사와 전통이 깃든 미술 기관에서 와인, 요리와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전시를 열며 이러한 트렌드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최근 샤넬과 모스키노의 런웨이와 컬렉션 테마에도 등장한 ‘음식’. 올해 5월부터 10월까지 열리는 2015 밀라노 엑스포의 주제 역시 ‘음식과 영양’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식문화에 대한 디자인, 예술, 문화적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 엑스포보다 3주 앞서 진행한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행사, 2015 살로네 델 모빌레 인테르나치오날레(Salone del Mobile Internazionale)에서도 푸드 디자인을 주제로 한 전시와 작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페란 아드리아의 푸드 디자인 전시

넨도가 <초콜라텍스처>전에서 선보인 초콜릿 작품
푸드 디자인을 이끄는 차세대 디자이너
2015 살로네 델 모빌레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언론과 대중에게 특히 주목받은 2명의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먹는 방식을 디자인하는 사람, 스스로 이팅 디자이너(eating designer)라 명명한 네덜란드의 마레이 포엘장(Marije Vogelzang)과 컨템퍼러리한 감성으로 미니멀리즘을 표현하는 일본 디자이너 넨도(Nendo)가 그 주인공이다. 마흔을 목전에 둔(아직은 너무나 젊은!) 두 디자이너는 각각의 개성적 관점을 통해 식문화의 디자인 가능성을 조명했다.
마레이 포엘장은 2000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 재학 중 밀라노에서 열린 졸업 전시를 통해 데뷔했다. ‘하얀 장례식(white funeral)’이라는 타이틀로 전통적으로 검은색 혹은 짙은 보라색 일색의 어두운 유럽 장례 문화를 흰색의 디스플레이와 의상, 이와 어울리는 오거닉 푸드로 연출해 인생의 마지막 행사를 영적으로 아름답게 조명했다.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음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디자인 소재’라는 것을 깨닫고, 음식의 심리학적·사회학적 효과를 활용해 음식과 이를 먹는 방식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팅 디자인에 대해 설명할 때 그녀는 종종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순간’ 아이의 감정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언어 이전에 음식을 통해 보다 본능적이며 직접적으로, 그러나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음식을 먹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고 상호 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파스타 반죽을 멜로디가 나오는 밀대로 얇게 밀어 자른 후 등 뒤에 매달고 사우나를 통과하면서 열기로 면을 익힌 후 소스에 찍어 사람들과 나눠 먹는 파스타 사우나(Pasta Sauna),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구멍이 뚫린 하나의 흰 천으로 엮어 타인의 동작을 인지하며 식사하게 하는 셰어링 런치(Sharing Lunch)는 마치 축제처럼 흥겹게 즐길 수 있는 퍼포먼스다. 그 밖에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헝가리 백인 여성에게 불법체류자인 집시 여성이 자신의 스토리가 담긴 음식을 먹이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해를 돕는 잇 러브 부다페스트(Eat Love Budafest) 같은 사회적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이팅 디자인 영역은 다양하다. 또한 자신의 실험실이자 레스토랑, 멀티 퍼포먼스 공간인 프루프(Proef)를 운영하며 이팅 디자인을 알리고 이와 관련한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상업적·비상업적 활동 모두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 지난해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는 세계 최초로 디자인 학부 내에 푸드 논 푸드(Food Non Food) 전공을 개설하고 마레이 포엘장을 대표 교수로 초빙했다. 2015 살로네 델 모빌레 인테르나치오날레에 그녀는 전시 지도 교수로 참여해 <잇 싯(Eat Shit, 먹다, 배설하다)>이라는 도발적인 주제의 전시를 선보였다. 배설은 먹는 행위의 피드백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중요성이나 관심이 음식에 비해 낮고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생물학적 배설에서 나아가 생활 쓰레기, 노숙자나 무국적자 등 사회적으로 무방비하게 방임되는 대상을 다양하게 다루며 이들의 권리 찾기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디자인적 방안을 제시했다. 단순하고 재미있는 활동 위주의 푸드 걸(food girl)을 뛰어넘어 사회적 문제 해결사로 성장한 그녀의 모습을 행사 기간에 많은 언론이 주목하고 격려했다.
일상생활에 작은 느낌표(!)를 던지는 것이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라고 말하는 넨도의 디렉터 사토 오키(Oki Sato)가 푸드 디자인 영역에 던지는 느낌표 또한 신선하고 흥미롭다. 제품, 가구, 인테리어, 건축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그는 최근 하겐다즈, 고디바 같은 글로벌 식품 브랜드와 협업해 감성적 식품 디자인에 도전하고 있다. 2015 살로네 델 모빌레 인테르나치오날레 기간에 무세오 델라 페르마넨테(Museo della Permanente)에서 개최한 회고전 < Nendo Works 2014-2015 >를 통해 그는 또다시 독특한 컨셉의 푸드 디자인을 선보여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직접적 행동 방식을 제안하는 마레이 포엘장과 비교해 그의 푸드 디자인은 자신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로 보다 중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특히 근래 작품을 보면 모국인 일본의 감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의 차세대 디자이너로서 그의 사명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2015 메종 & 오브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초콜라텍스처 (Chocolatexture)>전은 소재의 촉감을 의미하는 일본의 9가지 의성어를 초콜릿 디자인으로 승화, 각각 폭 26mm의 정육면체 안에 들어가는 작은 초콜릿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또 비에 대한 다양한 일본어 단어를 유리병 위에 비 내리는 날의 전경으로 표현한 레인 보틀(Rain Bottle)도 큰 호응을 얻었다. 넨도가 자신만의 디자인 메시지를 식문화와 연관된 콘텐츠를 활용해 표현하는 것은 식문화가 우리 생활에 친근한 영역이자 동시에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고찰한 영민한 선택이다. 그의 작품이 여운을 남기며 디자인 전문가 사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회자되는 이유에 이러한 숨은 의도가 일조하고 있다.
최근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디자이너 2명의 접근 방법을 통해 현재 푸드 디자인이 진화하는 2가지 대표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포엘장처럼 식문화와 관련해 상대적으로 기존에 관심이 부족하던 사회적·심리적·과학적·행태적 영역을 파고들어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창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사토 오키처럼 푸드 디자인을 디자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기존 식문화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식문화를 한층 입체적으로 변화시키고 디자인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식문화에 대한 디자인적 관심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고, 현재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기류를 볼 때 앞으로도 당분간 이 분야에서 다양한 디자인적·예술적 실험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푸드 디자인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글 여미영(디자이너, d3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