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든든한 동반자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음악계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정 공연장이나 단체가 음악가와 함께 만들어가는 상주 음악가 제도의 면면에 대하여.

116년 역사의 위그모어홀은 상주 작곡가와 상주 음악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음악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 Benjamin Ealovega
현재 세계 정상의 비르투오소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는 한국에도 몇 차례 내한한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는 지난가을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대신 지휘봉을 들고 포디엄에 올라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데뷔 무대를 치렀다. 그뿐 아니다. 뉴욕 필하모닉 2016~2017년 시즌에 바로크와 현대음악 레퍼토리를 넘나들며 수차례 공연하고, 뉴욕 필하모닉이 위촉한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가 쓴 곡의 세계 초연 일정이 잡혀 있다. 바로 상주 음악가(artist-in-residence)로서의 활동이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라면 작업실과 전시 공간 등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미술계의 입주 작가 프로그램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음악가들의 프로필에서도 ‘상주(residence)’라는 단어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번 시즌 뉴욕 필하모닉이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준 상주 예술가 제도는 해외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미 활발히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 공연기관이나 단체, 음악홀, 페스티벌 등에서 매 시즌 새로운 아티스트를 선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한 해 동안 다양한 공연을 개최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런던의 위그모어홀은 연주자와 작곡가를 상주 예술가로 꾸준히 선정하고 있는 대표적 공연장.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 등 세계적 연주자들이 위그모어홀의 상주 예술가 시리즈를 거쳤다. 음악 단체로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를 지난 시즌 상주 음악가로 선정했고 마스터클래스, RCO 클럽 나이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대중과 호흡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 빈 심포니의 2015~2016년 시즌 상주 예술가인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는 1년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완주하며 베토벤을 집중 조명했고 실내악 연주 무대도 마련했다.
최근 독특한 상주 예술가가 눈에 띄는 단체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랜 기간 상주 음악가 프로그램을 탄탄하게 운영하며 유명 음악가들과 함께해온 베를린 필하모닉은 지난 시즌 연출가 피터 셀라스(Peter Sellars)를 선정해 무대연출을 협업했다. 이번 시즌에는 작곡가 존 애덤스(John Adams)가 직접 작곡한 곡을 선보이고 지휘를 하며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세계 주요 음악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상주 예술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본적 이유는 미술계의 레지던시와 비슷하다. 운영 단체는 음악가와 손잡고 다채로운 공연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연주자는 무대에서 1년간 안정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음악 세계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를 갖는 것. 그리고 팬들은 연주자의 그 음악적 여정에 동행하는 기회를 누릴 수 있다.

1 이번 시즌 뉴욕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로 활약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 Marco Borggreve
2 피아니스트 김정원은 올해 세종체임버홀의 상주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세종체임버 시리즈의 연간 프로그램을 이끈다. ⓒ Jino Park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주 예술가’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한국 음악가들의 활약이 대단한 요즘, 한국에서도 상주 예술가 프로그램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 이 개념을 처음 소개한 것은 통영국제음악제인데 2005년 진은숙을 상주 작곡가로 발표했고, 2011년부터는 4년 연속으로 매년 상주 작곡가와 상주 연주자를 선정해왔다. 소프라노 서예리와 피아니스트 김선욱, 노부스 콰르텟이 모두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 예술가 출신. 지금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사라진 대신 TIMF앙상블이 통영국제음악재단의 상주 연주 단체로 활약하고 있다.
공연장 중에서 처음으로 상주 음악가 프로그램을 도입한 곳은 금호아트홀. 2013년 피아니스트 김다솔을 선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통영국제음악제가 관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금호아트홀은 젊은 연주자의 음악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좀 더 무게중심을 둔다. 금호 영재 콘서트, 라이징 스타 시리즈 등으로 클래식 유망주를 발굴하는데 적극적인 금호아트홀은 상주 음악가 프로그램으로 젊은 클래식 연주자가 음악 활동에 집중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상주 음악가로 선정되면 신년 음악회를 시작으로 1년간 5~6회의 음악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확고히 드러낸다. 첫해에 김다솔은 금호아트홀 상주 음악가 시리즈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음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그 이후 김다솔의 행보는 많은 이들이 아는 대로다. 국내외 여러 악단과 협연했고 2015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데뷔 앨범을 발매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다솔 이후 금호 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는 2014년 바이올리니스트 박혜윤, 2015년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2016년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으로 이어졌고, 올해는 첼리스트 문태국이 선정됐다.
2015년 상주 아티스트 제도를 시작한 세종체임버홀은 실내악 전용 홀의 강점을 살리기 위한 기획 공연으로 ‘세종체임버 시리즈’를 만들었다. 실력과 명성을 갖춘 아티스트가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 세종체임버홀의 상주 아티스트 제도. 첫해에 첼리스트 양성원, 다음해엔 지휘자 임헌정이 참여했고, 올해는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상주 아티스트로서 4회의 음악회를 개최한다. 이미 궤도에 오른 음악가들이 연간 프로그램을 이끄는 예술감독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협연자를 직접 선정하므로, 함께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도 뛰어난 기량으로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이들이다. 김정원은 올해 상주 아티스트로 선정된 데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실내악 프로그램을 기획해 음악의 가치를 최대한 드러내면서 함께하는 음악가들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싶다. 그런 진심이 관객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며 상주 아티스트로서 소신을 밝혔다.
교향악단 중에서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2014년부터 상주 작곡가를 위촉해 작곡가를 발굴하며 창작 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임기 중 완성한 작품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으로 공연하는데, 지난 2월에 열린 <두 명의 상주작곡가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2015년 상주 작곡가인 김택수, 폴연리(이수연)의 곡을 세계 최초로 공개한 무대였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는 공모를 통해 위촉하며 현재 작곡가 김택수와 박명훈이 활동하고 있다.
어느덧 한국에서도 상주 음악가 제도의 성과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단계가 됐다. 몇 년 사이 이뤄낸 변화와 발전이다. 얼마 전에는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대구의 수성아트피아가 지역 아티스트들을 중심으로 상주 예술가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음악가들에게 포근한 창작의 산실이자 동반자가 되어주고, 관객들이 음악으로 폭넓게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상주 음악가 제도가 보다 확산되고 안정적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