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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꿈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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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아이리버의 박일환 대표를 만났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성공 신화가 아니라 음악의 본질과 꿈에 관한 것이다.

한때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지만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그 쓰임이 다한 물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MP3 플레이어. 평소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 정도 가지고 있었고, 새 모델이 출시될 때마다 신선한 디자인과 기능에 관심이 집중되곤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운명은? 그것이 포터블 기기라는 사실 이 무색할 만큼 서랍 속에서 잠든 지 오래다. 이렇게 영광의 시절을 뒤로하고 잊힌 제품 대신 소비자의 사랑을 차지한 건 더 뛰어난 스펙으로 무장한 기기다.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은 포터블 하이파이 플레이어 아스텔앤컨 (Astell&Kern). 2012년 선보인 첫 모델 AK100부터 올해 출시한 AK380까지 계속 후속 모델로 ‘갈아타며’ 사용하는 마니아가 늘고 있다. 휴대용 플레이어 하나에 수백만 원을 지불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천만 원, 억대의 가격인 하이파이 오디오를 집에 들여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 들어오는 포터블 기기로 차원이 다른 고음질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하고 신선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또 스마트폰처럼 적당한 주기를 두고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하니 신제품을 구입해 새로운 기술을 누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국내외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스텔앤컨을 선보이는 회사가 과거 MP3 플레이어로 전성기를 구가한 아이리버라는 것이다. 앞일을 모르는 건 사람이나 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뒤 궁지에 몰려 나락으로 떨어지던 아이리버가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한 건 업계도, 소비자도 놀랄 만한 일이다. 재기를 이끈 인물은 2011년 취임한 박일환 대표. 삼보컴퓨터의 대표이사였던 그는 20년 넘게 컴퓨터 분야에 종사한 IT 전문가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면 무엇보다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을 갖춘 개혁가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음악과 무관한 일을 해오다 아이리버 대표로 취임한 뒤 프리미엄 오디오 브랜드를 만들어 내리막길을 걷던 회사를 짧은 시간 안에 흑자로 전환시킨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이를 지켜본 SK텔레콤은 지난해에 아이리버를 인수해 본격적 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가 처음은 아니다. 박일환 대표는 삼보컴퓨터에서도 위기의 순간에 회생을 주도한 인물이다. 막상 아이리버 하우스를 찾아 직접 만난 그에게서 저돌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목표 한 바를 이루는 날카로운 경영인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부드럽고 느린 말투로 단어 하나하나를 사려 깊게 골라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아스텔앤컨의 성공과 이후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며 그는 요즘 진중하게 음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박일환 대표에게 궁금한 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에 대해서였다. 이야기는 IT 비즈니스건 음악 비즈니스건 경영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이제 취임한 지 꼭 4년이 됐어요. 2011년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떤가요? 어디서 희망을 봤는지 궁금해요.
당시 아이리버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 예전부터 뭔가 더 할 수 있는 기업이 라는 생각을 했어요. 컴퓨터업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죠. CPU와 OS를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가 맡고 있으니 혁신은 그 회사들이 하는 거고, 나머지는 그걸 시장에 얼마나 빨리 경쟁력 있게 내놓느냐의 문제예요. 그래서 컴퓨터 회사가 혁신을 한다는 건 쉽지 않고, 하더라도 외양을 바꾸는 정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죠. 반면에 아이리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재미있는 일이죠.

다른 분야로 온 셈인데, 취임 후 극적인 성과를 내기까지 몇 년이 걸리지 않았어요.
경영이란 어느 회사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어요. 특히 삼보컴퓨터와 아이리버는 기술 회사니까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사의 내부 역량과 시장의 상황을 고려해 최적의 것을 찾는 게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찾은 게 아스텔앤컨이군요.
그렇죠. 과거에 아이리버가 잘하던 3가지 제품이 있어요. MP3, 전자사전, PMP죠. 그 분야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상이 변해서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안 팔렸어요. 스마트폰 때문에 설 자리를 잃은 거죠. 한마디로 하던 일을 열심히 하면 죽는 세상이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던 걸로 돌아가되,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MP3 플레이어는 편리한 기능을 다 갖춘 제품인데 단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이 음질이니, 세계에서 가장 음질이 좋은 휴대용 음악 기기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출발했죠.

당시 추진한 프로젝트의 이름이 ‘티어드롭(Tear Drop)’이었어요.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인 소리를 내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나요? 그 이름에 신사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은 과정이 담겨있어요.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을 보는데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런데 집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죠. 현장에서 노래를 들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 왜 이렇게 다를까 생각한 게 티어드롭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 계기예요. 현장에서는 아날로그 소리를 듣는데 TV로 볼 때는 소리가 MP3 수준으로 낮아지는 거죠. 그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누구는 울고 누구는 울지 않을 정도로.

기본적으로 아스텔앤컨은 현장의 소리를 가공 없이 순수하게 전하겠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가요?
소리가 지닌 정보가 100이라면 100의 소리로 만드는 게 최고로 전할 수 있는 수치죠. 보통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일반 오디오 스피커로 듣는 건 소리의 충실도(fidelity)가 20~30 정도예요. 실제 소리가 지닌 정보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죠. 하이파이 오디오는 그 충실도가 높다는 의미인데, 아스텔앤컨이 재생하는 소리는 거의 90 이상 입니다.

휴대용 플레이어치고는 가격이 상당해요. 그런데도 반응이 어마어마한데, 이렇게 될 걸 예상했나요? 제품 개발을 시작할 때 <나는가수다> 외에 몇 가지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있어요. 당시 유명 스포츠 선수가 사용하던 헤드폰이 50만 원 정도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구입했고, LP가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군요. 사람들이 좋은 음질을 위해 돈을 쓸 마음이 있고 아날로그에 대한 욕구도 있다는 것에서 가능성을 봤어요. 물론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 을 줄은 몰랐죠.

하지만 아스텔앤컨은 결국 디지털 기기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아이리버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디지털 기기라고 생각하는데, 아스텔앤컨이 다루는 파일이 디지털일 뿐이죠. 사실 소리 자체는 디지털일 수 없어요. 소리가 지닌 정보를 아날로그 파형(波形)으로 바꾸고 왜곡 없이 원음을 보존하면서 들을 수 있는 크기로 키워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아스텔앤컨에 들어간 기술은 매킨토시의 진공관 앰프가 그렇듯 아날로그 시그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크기로 확대하는 거예요. 그건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기술이죠.

이제 다른 오디오 회사에서도 비슷한 고음질 포터블 플레이어를 내놓기 시작했어요. 선두주자라는 사실 외에 아스텔앤컨의 경쟁력은 뭔가요?
아날로그 기술은 디지털 기술과 달라 복제가 불가능해요. 같은 악기라도 누가 연주 하느냐에 따라 다르듯 회사마다 만들어내는 소리가 다를 거예요. 어떤 소리가 나은가에 대한 판단은 소비자의 몫이고, 우리의 과제는 소리의 정보를 좀 더 충실히 재현하는 거예요. 100에 가깝게 말이죠.

청음을 해보니 휴대용 기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장감이 느껴졌어요. 작아도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데, 지금까지 왜 없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말이죠. 전통적 오디오 회사는 크고 무겁게 만드는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고, 반면에 디지털 회사는 작게 만들 수 있지만 소리의 충실도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리는 건 시도해보지 않은 거죠.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을 합쳤기때문에 아스텔앤컨이 더 큰 관심을 받는 것 같아요.

올해 처음으로 거치형 모델을 출시했는데, 이제 포터블에 머물지 않고 홈 오디오 시스템으로 확장하는 건가요? 출발은 포터블로 했지만 그 기술이 똑같으니 못할 이유가 없다 싶었어요. 여느 오디오 회사와 다른 점은 하나예요. 하이엔드 아날로그 기기는 일반인이 다루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디지털 기술도 갖추었으니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거죠. 최근 출시한 AK T1은 고음질 음원을 재생하는 MQS 플레이어, 하이브리드 앰프, 스피커를 결합한 올인원 제품이에요.

원래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나요?
제품을 많이 구입하진 않았지만 음악에는 늘 관심이 있었어요.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초기 MP3 플레이어부터 사용했죠. 이 일을 하면서 요즘은 음악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요. 1970년대를 돌아보면 그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없었어요. 라디오를 듣고 음악다방에 찾아가 쪽지에 신청곡을 쓰곤 했죠. 워크맨이 나오기 전까진 그랬어요. 지금은 어디나 음악이 넘쳐나는 시대인데 음악이 예전만큼 우리 인생에 영향을 주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제가 티어드롭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경험한 걸 나누는 것도 중요해졌어요.

한남동에 ‘스트라디움(Stradeum)’이라는 공간을 만든다고 들었어요. 그곳이 그 음악 나눔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네.사람들에게 당신이 듣고 있는 소리의 음질이 20일 뿐이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아요. 아스텔앤컨을 만들면서 저와 직원들이 이 기기를 너무 좋아하게 됐기 때문에 소리로 인한 감동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 로시작한 일이에요. 물론 감상 프로그램을 갖추었지만 일반적 청음 공간은 아니고, 그 공간에서 물건을 팔겠다는 의지도 전혀 없어요.

공사 중인 모습만 봐도 규모가 상당하던데요. 감상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계획이 있을 것 같아요. 프로그램은 어떤 식으로 운영하나요?
아티스트의 라이브와 토크를 통해 음악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과 아트의 컬래버레이션 전시도 하면서 음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도록 할 계획이에요. 음악 감상을 할 때 스토리가 있으면 더 특별한 경험이 되니, 전문가의 뮤직 큐레이션을 곁들여 시간대별로 다른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요.

오디오 회사의 청음 공간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될 것 같네요.
음악이 무엇인지, 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고민하다 만들기로 한 곳이니 그만큼 음악을 통해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해요. 음악을 찾아 듣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싶고, 이 공간이 성공하면 해외에도 선보이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리버 대표로 취임할 때 많은 사람이 제게 회사를 살릴 전략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전략은 없었지만 꿈이 있었어요. 기업으로 말하면 비전이죠. 그런데 그 꿈은 제 개인의 꿈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실행력을 더하면 회사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이 정도면 티어드롭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둔 거죠?
어느 정도 목표는 달성했지만,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뭔가요?
나음과 다름에 관한 거예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죠. 다른 회사보다 나아질 게 아니라 다른 것을 가져야 해요. 남들이 먼저 한 것을 따라 하면 세상이 멋져 보이는 게 아니라 힘들어지지만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하면 조금은 아름답게 보이죠. 앞으로도 나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만들고 싶어요.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보성 패션 스타일링 에디터 이민정 의상 협찬 클럽모나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