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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라는 무한한 팔레트

ARTNOW

건반 음악의 정수를 향해 나아가는 피아니스트 문지영.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와 페루초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문지영은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세계적 무대에서 독주회를 개최하며 가장 주목받는 젊은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2024년 금호아트홀 ‘이상’ 시리즈 공연을 통해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독일 피아노 음악을 탐구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마다 그만의 개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문지영의 연주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청각이 촉각으로 전이된달까. 손가락이 건반에 닿을 때 그 깊은 촉촉함이 공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꼭 마법 같다. 문지영의 특별함은 스무 살의 나이로 우승한 페루초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이 시대에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음악성의 자연스러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심사위원장 외르크 데무스) 이런 자연스러움은 삶의 태도에서 온 것 같았다. 미소는 수줍고 말투는 조곤조곤했으며, 문지영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드러내기보다 얼마나 더 알아가고 경험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여수에서 태어나 금호문화재단 음악 영재로 발굴되고, 운명처럼 만난 스승 김대진과 오랫동안 공부하고, 순수 국내파로서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와 부소니 콩쿠르에서 연달아 입상하고,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때도 그녀는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대륙을 오가는 바쁜 스케줄에 이은 소소한 여유에 행복을 느끼며. 크고 유명한 홀보다 이탈리아 작은 마을에서 하는 연주가, 이름 없는 극장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에 감동하며. 피아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의 촉촉한 눈가는 그 말이 진실이라 속삭였다.
오는 12월, 문지영은 오랫동안 이상으로 품어온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전곡 연주를 앞두고 있다. 올 한 해 금호아트홀에서 직접 프로그래밍해 선보인 독주 시리즈 ‘이상(理想)’의 마지막 연주다.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는 여섯 곡으로 구성된 모음곡 형식으로, 곡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 여러 나라의 음악적 특징이 깃들어 있다. 문지영은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나가듯, 정해진 틀 안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바흐의 파르티타 전곡을 자신의 손끝으로 채워나간다.

잘츠부르크에 거주한다고 들었는데, 파리로 이사하셨군요. 작년 10월쯤 왔어요. 제게 파리는 항상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어요. 올 때마다 매번 아름답고 특별하다고 느꼈거든요. 한국에서 공부를 끝냈을 때 유럽에서 살아보자 마음먹었고, 처음엔 자주 방문해 익숙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정착했어요. 베를린에서 공부할 때도 그곳에서 통학했고요. 이젠 공부도 끝났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정말 제가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왔죠. 용기를 내 파리로 왔어요.
금호아트홀 ‘이상’ 시리즈의 마지막 연주를 앞두고 있습니다. 독일 작품을 바로크, 고전, 낭만으로 나눠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의 작품으로 프로그래밍한 대장정입니다. 재작년부터 매년 금호아트홀에서 연주하고 있어요. 올해는 주제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는데, 바흐의 파르티타가 떠올랐어요. 지금껏 전곡을 연주한 적은 없거든요. 이제 때가 온 것 같았죠. 탄생 250주년인 2020년에 워낙 많이 연주한 베토벤은 다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해보고 싶었고, 바흐와 베토벤을 거쳤으니 ‘3B(Bach, Beethoven, Brahms)’로 불리는 거장 중 한 명인 브람스까지 욕심냈죠. 정말 고생스러웠지만,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 작곡가의 중요한 레퍼토리를 배우며 좀 더 성장하고,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어요. 1년 동안 한 공연장에서 세 번 연주를 한다는 건 흔치 않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모네의 ‘수련’ 연작. 연작을 모두 합치면 전체 길이가 100m에 달하고, 생전 모네의 뜻에 따라 전시 공간 천장에 창을 내어 자연광이 비춘다.

‘이상’이라는 타이틀은 직접 지었나요? 네. 도달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평생 노력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게 이상이잖아요. 그 시리즈에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음악의 정수, 이상을 모았어요.
그중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는 언젠가 꼭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작품이라고요. 바흐는 건반악기를 위한 곡을 다수 작곡했지만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제외하면 연주 프로그램에 오르는 작품이 생각보다 드물어요. 그런데 이 파르티타는 거대한 우주거든요. 여섯 작품이 무한하게 다르고, 끝없는 캔버스에 한 곡 한 곡 다른 스케일로 쓰인 게 경이롭죠. 이걸 한 프로그램에 넣는다면 연주자인 저도 또 관객도 끝없이 배우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 무한한 매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바로크 음악이 딱딱하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사실 바흐나 바로크 시대 작품은 굉장히 자유로워요. 악보에 쓰인 지시 사항이 없거든요. 베토벤 시대만 와도 작곡가가 악보에 써둔 많은 지시 사항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느냐에 따라 연주에 큰 차이가 생기죠. 바흐는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다 보니 마치 빈 캔버스 같아요. 작곡가가 짜놓은 틀 안에서 연주자의 취향과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니까요. 바흐의 아들 C. P. E. 바흐는 “정해진 연주법을 잘 따르는 것보다 좋은 취향을 갖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그것이 가장 음악적인 접근 방식이라고요. 또 파르티타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한 독일 음악이 아니라 그 안에 프랑스 서곡, 이탈리아 춤곡 등 여러 나라의 문화와 전통이 녹아 있어서, 다양한 색과 캐릭터가 있어서예요.
김대진 피아니스트에게 영재 시절부터 한예종 학부, 전문사 과정까지 오랜 기간 배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가 김대진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지 못했다면 지금 제가 피아노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수 출신인데 한국 클래식 음악 교육은 상당 부분 서울에 몰려 있고, 당시 여수엔 클래식 음악 공연장도 없었어요.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다 김대진 선생님을 만난 것이 엄청난 우연이고 행운이었죠.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요.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에는 제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셨고요.
이후 세계적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를 사사했지요. 전문사를 졸업하고 혼자 공부하다가, 베를린에 있는 바렌보임-사이드 아카데미에서 언드라시 시프가 레슨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디션을 치르고 들어갔어요. 그 정도 명성의 연주자가 티칭을 하는 건 흔치 않거든요. 시프 선생님은 연주에 대한 가르침보다 음악가로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는 멘토 역할을 해주셨어요. 제 개성을 열린 마음으로 존중해주시고요. 평소 제 몸과 마음 건강에 관심을 갖고 연주자로서 무리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시죠.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해주실 때마다, 그래도 내가 아직 옳은 길에 있구나 하는 믿음이 생겨요. 희망을 갖고, 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게 되죠. 삶의 등불 같은 분이세요.
언드라시 시프는 바흐 연주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항상 “바흐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고, 바흐만큼 영혼을 고양시키는 작곡가는 없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단지 선생님을 닮아가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음악가로서 정신을 배웠어요.

크누아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에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협연하는 피아니스트 문지영.
아래 문지영은 스위스 로망드, 모스크바 솔로이스츠,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등 국내외 대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이어오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성격이나 개성은 연주에서 드러나게 마련인데, 자신의 연주가 실제 모습과 얼마나 비슷하다고 느끼나요? 다를 수가 없어요. 연주자라는 자리가 참 어렵죠. 연주를 들으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전부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마치 목소리처럼 삶의 어떤 것은 숨길 수가 없죠. 가끔 연주와 전혀 다른 캐릭터를 가진 음악가를 만나면 무섭기도 해요. 어릴 때부터 어떤 피아노를 치든 저만의 소리를 내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같은 홀의 같은 피아노를 연주해도 어떤 연주자는 첫 소절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반면, 피아노를 잘 치고 해석도 탁월한데 그 ‘소리’가 없는 연주자도 있거든요. 아무리 기교적으로 뛰어나도 소리가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어느 정도는 자신의 소리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원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있고, 그 소리를 어디서든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편이에요. 어떤 피아노를 연주하든, 어떤 환경에 놓이든 간에요. 이 소리를 말로 표현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추상적이고, 곡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제 생각에 소리는 음악가의 팔레트예요. 일단 팔레트가 커야 해요. 그래야 많은 색을 담을 수 있고, 또 여러 조합을 시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 목표는 그 팔레트를 크게 만드는 거였어요. 단순히 제가 찾는 소리나 지식만이 아니라 삶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일, 또는 사소한 감정으로 팔레트를 넓혀나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삶과 음악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것 같아요.
음악 외에 영감을 주는 예술 작품이나 사조가 있다면요? 진부해 보일지 몰라도, 저한테 가장 깊숙이 다가오는 건 인상파 작품이에요. 제게 파리가 특별한 이유도 그거예요. 드뷔시를 연습하다가 영감이 필요하면 오랑주리에 가서 모네의 작품을 볼 수 있고,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에도 자주 가죠. 하루에 많은 작품을 보기보다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보고, 돌아와서 그 영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제겐 너무 중요해요. 잘츠부르크에 살면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에요.
파리는 센강에 부서지는 햇빛과 인상파의 미술 작품, 그리고 라벨과 드뷔시의 반짝이는 화성이 공존하는 곳이죠. 지금까지 프랑스 음악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는데, 차차 해나가고 있어요. 언어도 배우기 시작했고, 음악에 대한 이해도 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삶의 경험과 생각이 조각조각 모여서 음악이 되고, 삶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영감이 제 팔레트의 일부가 되겠죠. 지금은 프랑스 작곡가 포레의 작품에 마음이 많이 가네요.
피아니스트로서 어떤 이상을 품고 있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연주자라는 것을 행운으로 느끼는 동시에, 연주에 만족할 수 없어 평생 고통받는 모순이 있어요. 항상 부족한 면에 더 집중하게 되니까요. 한편 부족한 걸 스스로 아니까 더 발전시켜나갈 테고, 결국 제가 만족하게 되는 날이 오면 성장이 끝나리라는 생각도 들어요. 차라리 부족한 점을 깨달을 수 있어 감사하죠. 지난 5월엔 피아노를 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는데, 피아노를 치지 못하니 삶의 이유가 없어진 듯했어요. 피아노를 못 친다면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순간적으로 무섭더라고요. 연주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잠시나마 그 감정을 스치듯 느꼈을 때 다시금 제 삶이 얼마나 음악을 중심으로 흘러가는지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몸과 마음 관리를 잘해서 오랫동안 발전하고 성장하는 게 제 이상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저 자신에게 거짓 된 게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음악에 헌신하는 삶 말이지요.

 

전윤혜(음악 평론가)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금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