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미술이다
복잡다단한 현대미술의 다양한 담론 속에서 재료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따져봤다.

저 석양은 진짜일까?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안개와 빛, 습도 등을 바탕으로 작업한 ‘Weather Project’
현대미술에 관해 품는 궁금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이게 정말 미술일까?’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사실 우리가 오랫동안 ‘미술’과 ‘일상’을 구분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기에 생긴 것일 테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캔버스에 물감을 발랐다면, 또 석고로 어떤 형태를 만들고 거기서 어느 정도 조형미가 느껴진다면 눈앞의 작품을 ‘미술품’으로 구분하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또 예전엔 미술 재료가 거의 정해져 있었기에 미술품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혼선을 빚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한데 지금은 다르다. 요새 미술관과 갤러리엔 예의 뒤샹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머리를 긁적일 만한 작품이 넘쳐난다. 전원을 끄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빛으로 만든 영상이 흐르고, 때만 되면 곳곳에서 일시적 이벤트나 해프닝이 벌어졌다가 사라진다. 여기에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는 작품까지, 이제 관람객에게 미술은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 후각과 청각 등의 감각 또한 ‘미술 향유’의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라이언 갠더의 몸으로 느끼는 작품 ‘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ze’
ⓒ Ryan Gander
2012년 제13회 카셀 도쿠멘타에서 선보인 라이언 갠더(Rayn Gander)의 작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의미가 필요해(NI eed Some Meaning I Can Memorize)’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 작품은 마음으로 느끼게 하기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지각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여기에 이렇다 할 물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전시한 프리데리치아눔 1층에 관람객이 들어서면 그저 멀뚱멀뚱 서서 텅 빈 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린 걸음으로 뭘 봐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관람객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자신만 그런가 하고 주변을 살피면 비어 있는 넓은 홀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 또한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제야 이들은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바람’이 바로 작품이라는 것을.
갠더가 제시한 작품은 전시장에 설치한 공조기를 통해 불어오는 비물질적 바람이다. 하지만 그 공간에 관람객이 들어서면 바람은 가시적인 것이 되고, 미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무엇이 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앞머리가 흐트러지고, 갑자기 목뒤로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 주변을 살피는 관람객의 모습이 모여 실시간으로 갠더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미술품의 배경으로 쓰이던 ‘벽’에 집중하게 한 마틴 크리드의 ‘Work No.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
ⓒ Martin Creed
영국 출신 작가 마틴 크리드(Martin Creed)는 갠더만큼이나 독특한 발상의 비재료 작품으로 2011년 터너상까지 받았다. 빈 벽으로 둘러싸인 갤러리에서 5초 간격으로 불이 켜졌다 꺼지는 ‘작품 227번, 점멸하는 불빛(Work No.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을 완성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쏟아진 모든 비난에 콧방귀를 뀌며, 작품을 통해 미술관을 이루는 ‘미술품’이라는 구성 요소를 제거하고, 미술품의 배경으로 쓰이던 ‘벽’에 감상자들이 집중하게 하는 이전에 없던 진기를 선보였다.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미술 재료로 사용한 하상현의 ‘0kg Today’
이제 이런 ‘비재료적 재료’의 사용은 서울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그리 큰 이슈는 아니다. 지난해에 서울 연남동의 ‘플레이스막’에서 소개한 하상현 작가의 ‘0gk Today’(2015년)는 바람도 빛도 아닌, ‘숨’을 소재로 한 작품. 그는 동명의 퍼포먼스에서 자신의 날숨을 시간대별로 봉지에 담아 보관한 뒤, 정해진 한 장소에서 3시간 동안 이를 다시 들이마셔 들숨으로 바꿔놓았다. 당연히 관람객은 그의 작품을 이루는 ‘숨’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살아가는 데 필수 요소인 숨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 지닌 의미를 환기시켰다.
이외에도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교감하는 상호작용을 전시한(결코 음식을 전시한 것이 아니다) 리크릿 티라바니야(Rirkrit Tiravanija), 뉴욕 모마에서 썩어가는 생선의 ‘악취’를 전시한 이불, 인간의 후각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냄새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노르웨이 작가 시셀 톨라스(Sissel Tolaas), 벽에 비디오 장치를 하고 관람객이 들어가면 시각적 감상과 함께 자신의 심장박동과 숨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모나 하툼(Mona Hatoum) 등이 냄새와 공기, 소리 등을 재료로 그간 현대미술의 폭을 넓혀왔다.
우린 위에 열거한 몇몇 작가의 작품만으로도 이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미술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미술이란 보는 것’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오랜 시간을 들여 차분히 깨부숴왔다. 한데 이것이 결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작품이 사라지면서 더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뭔가를 보기 위한 기본 조건인 빛과 작품을 위한 조연에 불과하던 벽, 작품 앞에서 온갖 의문을 품는 자신, 그리고 그것을 전부 감지해내는 자신의 예민한 감각 등을 비로소 비재료적 작품에서 발견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여기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우리 인간이 관념이 아닌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한, 그 어떤 미술 재료도 결국 ‘물질’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 재료를 이루는 물질의 조형적 승화든 정서의 표현이든 일단 모든 작품은 물질에서 출발해(어떤 작품이든 기초 재료나 도구를 사용해 만들기 시작 한다는 개념에서) 어떤 작품은 ‘물질’의 차원을 고수하고, 어떤 작품은 ‘비물질적’ 속성을 띤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에 근거해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굳이 현대미술에서 ‘재료’와 ‘비재료’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이로 인해 좀 더 열려 있는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진 않을까?
21세기에 들어 현대미술은 점점 ‘무엇이 미술인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괘씸한 존재가 됐다. 미술가들은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되었고, 미술의 본질에 대한 유희를 벌이는 이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감상하는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현대미술은 늘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