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뭐예요
언젠가부터 차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세단·SUV·스포츠카 등 전통적 세그먼트 분류는 이미 고루하고, 최근 신차 중 그 형태와 쓰임새의 변주가 다양해진 모습이 눈에 띈다. 스포츠카 같은 세단, 세단의 안락함을 갖춘 SUV… 정체불명의 애매한 모습을 품고 있으면서 예상치 못한 반전 매력을 발휘하는 차량. 그래서 따져 물었다. 대체 네 이름이 뭐니?
BMW 뉴 X6
레인지로버 이보크 2016년형
폭스바겐 컨셉카 티록
재규어 컨셉카 C-X17
내 기억의 한도 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변종’은 2004년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벤츠의 CLS였다. 쿠페란 매우 좁게 설계한 그린하우스와 활처럼 날렵하게 휜 루프 라인에 걸맞게 2짝 문으로 이루어진 스포티한 차를 이르는 용어인데, 4도어 쿠페라니? 파격이었다.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했다. 본질은 세단이지만 뭐, 그런 건 중요치않았다. CLS는 곧 새로운 장르를 창출했다는 기념비적 명예를 안으며 대단한 성공을 거뒀고, 이후 모든 장르에서 쿠페 디자인을 적용할 정도로 열풍을 몰고 왔으니까.
쿠페 디자인과 결합해 가장 재미를 본 세그먼트는 단연 SUV다. 본성이 거칠고 투박한 SUV가 도심에 어울리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화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쿠페의 날렵하고 스포티한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결합한 크로스오버 SUV는 각 브랜드에서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화제의 중심에 서며 인기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쿠페형 SUV의 개척자는 BMW X6. 2008년 시장에 데뷔한 이 차는 도심형 SUV로 선보인 X5의 플랫폼을 활용해 기존 SUV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세그먼트로 자리매김했고, 지난해 풀 체인지 모델인 2세대를 출시하며 또 한 번 주목받았다. SAC(Sports Activity Coupe)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BMW는 지난해에 X6의 콤팩트 버전인 X4도 선보였다. 스포츠카처럼 좀 더 노면에 밀착된 차체 덕분에 한층 스포티한 느낌을 준다. 2011년 첫선을 보인 랜드로버 이보크도 빼놓을 수 없다. 차체가 조금 높을 뿐 완벽한 쿠페 라인을 지닌 이보크는 유니크하고 스타일리시한 품새로 SUV를 선호하지 않는 이들의 구매욕을 충동질했다. 지난 4월에 열린 서울모터쇼에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끈 컨셉카 중 하나도 폭스바겐에서 선보인, 오픈 에어링까지 가능한 쿠페 스타일 콤팩트 SUV ‘티록’이었다. 재규어에서 2016년 판매 계획을 발표한 브랜드 최초의 크로스오버 모델 ‘F-페이스’도 201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공개한 컨셉카 C-X17의 양산형 모델이다. 지금껏 스포츠 세단과 쿠페, 로드스터 등의 차종 위주던 재규어 입장에선 신선한 파격적 시도일 듯하다. 아직 티저 이미지만 공개했지만, 고성능 스포츠카 F-Type의 이미지와 성능을 접목한 SUV라는 것을알 수 있다. 이 2대의 미래형 차는 SUV 디자인의 트렌드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이 아닐수 없다.
메르세데스-벤츠 뉴 GLA 45 AMG 4매틱
메르세데스-벤츠 뉴 CLS 250 블루텍 4매틱 슈팅 브레이크
이런 쿠페형 SUV 외에도 각 차종의 특징을 묘하게 섞어놓은듯한 이종교배 모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BMW는 SAC 말고도 ‘융합형’ 모델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올 초에 선보인 액티브 투어러는 2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소형 해치백임에도 차체를 살짝 높여 콤팩트한 SUV 느낌이 난다. ‘달리는 즐거움’을 위해 가속이나 코너링 시 다이내믹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후륜구동만 선택하던 BMW가 이 차에 전륜구동 시스템을 적용해 실용성과 편의성을 높인 것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또 3시리즈 GT 같은 독특한 컨셉의 차도 있다. 앞에서 보면 3시리즈 특유의 다이내믹한 스포츠 세단 모습을 띠고, 뒤에서 바라보면 세단보다 크고 전고가 높은 SUV의 모습이다. 실제로 3시리즈 세단보다 휠베이스가 길어 실내 공간이 넉넉하고 실용성이 좋다. 측면 뷰는 날렵한 루프 라인에 후미로 갈수록 살짝 치켜올린 듯한 독특한 쿠페 라인을 품었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최근 다양한 크로스오버 차량을 내놓았다. 2013년 국내시장에 들어온 후 올해 2월 신형을 출시한 CLS 슈팅 브레이크는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단연 눈에 띄는 모델. ‘슈팅 브레이크’는 사격을 뜻하는 단어 ‘슈팅(shooting)’과 대형 사륜마차를 가리키는 ‘브레이크(break)’를 합쳐(후에 brake로 바뀌었다) 만든 이름이다. 19세기 영국 귀족이 사격이나 사냥을 위해 총기를 싣던 전용 마차에서 유래한 것으로, 슈팅 브레이크라 부를 수 있는 차는 세단을 기본으로 적재 공간을 넓혀 실용성을 높인 ‘세단형 왜건’이다. 이전에도 슈팅 브레이크에 해당하는 모델은 여럿 있었지만, 벤츠는 세단에 왜건의 요소를 더해 슈팅 브레이크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이 애매한 세그먼트를 대중화시켰다. CLS 슈팅 브레이크를 보면, 밋밋하면서 투박한 직각의 전형적 왜건이 아니라, 쿠페형 세단답게 뒷부분이 유연한 쿠페 스타일로 매끈하게 빠졌다. 뒤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루프 라인과 윈드실드만큼 기울어진 리어 글라스를 적용한 트렁크 게이트로 인해 왜건보다는 실용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차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왜건만큼은 아니지만 꽤 쓰임새가 좋으면서 세단이나 쿠페만큼 멋지고, 심지어 독특한 개성까지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지난해 하반기에 내놓은 GLA 클래스는 아담한 SUV에 세단의 장점을 살짝 비벼 얹은 모델. 고급스럽고 안락한 벤츠 세단도 갖고 싶고 젊은 감각의 SUV도 타고 싶은 이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만하다.
볼보 크로스컨트리
마치 자동차 회사들의 ‘파생 상품 작전’처럼 보이는 이러한 트렌드는 투박한 이미지로만 여기던 볼보의 해치백도 세련되게 바꿔놓았다. 볼보 크로스컨트리는 소형 해치백 모델 V40에 SUV의 감각을 담아 좀 더 높게 만든 모델. 차고를 높였지만 디자인이 매끈하게 빠진 데다 지붕도 높지 않아 전체적으로 낮아 보인다. 이름처럼 도심이든 험난한 시골길이든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이 차는 스타일리시하면서 굉장히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젊은 층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때 각 자동차 브랜드에서 ‘정통’이란 단어를 강조하던 때가있다. 세단은 세단답게 조용하고 안락하며 중후해야 하고, SUV는 크고 실용적이며 거친 오프로더의 캐릭터를 온전히 살려야 ‘있어 보인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정통을 고수하는 모델이 이상하다거나 시대에 뒤처졌다는 건 아니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은 변화의 시대고, 우리는 빠른 변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엔 받아들이기 어렵던 변화도 이제는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자동차 디자인은 점점 변화무쌍해지고, 제조사들은 틈새시장까지 빈틈없이 공략하고 있다. 그 덕분에 도로 위는 평범하거나 재미없지 않은 다양함으로 넘치고, 우리에겐 선택지가 많아졌다.
많은 사람에게 두루 잘 팔리는 무난한 디자인이 싫다면, 이걸 고를까 저걸 살까 고민하며 결정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다면, 이런 모호한 성격의 차를 고르는 것도 괜찮은 해답일 듯하다. 물론 따질 건 따져야 한다. 어떤 장점을 모아놓았는지, 그래서 어떤 복잡미묘한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당신만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딱 어울리는 차여야 하니까.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