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리 기틀리스, 자유로운 삶을 연주하다
현존하는 최고령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클래식 음악 마니아 사이에서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통하는 이브리 기틀리스. 5월 25일 LG아트센터에서 ‘Celebration of Legacy’ 독주회를 펼칠 그를 파리에서 먼저 만났다. “죽음만이 내 연주를 영원히 멈추게 하리라”라는 말을 편안히 웃으며 할 수 있는 아흔둘의 마에스트로. 그와의 특별한 만남.
프랑스에서는 웬만한 정치인보다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 1922년~). 이 노장 바이올리니스트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은 것은 프랑스 지인들에게 단번에 부러움을 살 만한 소식이었지만 정작 그를 마주하기까지 과정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러 차례 통화 끝에 어렵사리 잡은 약속이 당일에 취소된 것만 네 번. 꽃다발과 함께 찾은 그의 집 근처에서 발길을 돌린 적도, 에디터의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 당황한 그에게 두 번째 꽃다발만 안겨주고 돌아온 적도, 겨우 시작한 인터뷰를 갑자기 중단해야 한 적도 있다. 그에게 전해주지 못해 집으로 가져온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휴대폰에 저장된 그의 번호를 끈기 있게 누른 건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해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e단조 Op.64’ 연주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지인이 사랑한 이 서정적인 작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느슨해진 나사를 조일 힘을 전해주곤 했다.
이브리 기틀리스가 사용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상시(Sancy)’는 이제 그의 일부분이다.
생제르맹데프레 지구에 자리한 이브리 기틀리스의 작은 아파트.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를 마주할 기회를 얻은 것은 부활절 당일이었다. 프랑스에서 바람맞은 상황을 묘사하는 ‘토끼를 놓아둔다(poser un lapin)’라는 표현을 빌리면, 야속한 토끼만 계속 놓아두던 장본인을 결국 부활절 토끼 대신 만나게 된 셈이다. 무심한 정원사를 둔 잔디밭처럼 제멋대로 뻗은 백발과 안단테 악장을 닮은 걸음걸이를 제외하면 92세라는 그의 나이를 짐작케 하는 단서는 없다.
악수를 위해 맞잡은 오른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던 그의 손이 작은 바이올린과 조우한 것은 그가 다섯 살 되던 무렵이다. 1920년대에 이스라엘 하이파 지방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평범한 부모님을 둔 그에게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강요한 사람은 없다.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 것은 어린 날의 그였다. “왜냐고요? 글쎄요, 그건 하늘에 계신 분께 여쭤보세요. 하지만 그분이 답변을 해줄지는 모르겠네요.(웃음)”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아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 한 부모님과 마음 씀씀이 넉넉한 동네 사람들이 내놓은 푼돈으로 그는 어렵사리 악기와 레슨비를 마련했다.
이렇게 소박하게 시작한 이브리 기틀리스의 경력은 자녀의 예체능 교육에 몰두하는 모든 한국 엄마의 열정을 더욱 불타게 할 만큼 완벽하다. 부모님의 뒷바라지 없이도 이미 여덟 살에 첫 콘서트를 열었고,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시한 인물로 브람스에게 직접 사사한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Bronislaw Huberman)의 추천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음악원에서 1등을 거머쥔 열세 살 무렵에는 이미 전도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극찬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가히 모차르트가 부럽지 않을 천재의 이력 속에서 그가 특별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선생님과 학교 친구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인 소박한 강당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어린 제자에게 변변한 무대를 마련해주지 못한 게 맘에 걸린 선생님께서 어디선가 나무 박스를 구해오셨어요. 엉성한 못질을 가려줄 작은 덮개까지 챙겨서 말이죠.(웃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그의 눈빛은 분명 ‘천진난만’했다. 생물학적 나이쯤 훌쩍 뛰어넘는 맑은 영혼을 투영하는 이 순수함은 칼 플레시(Carl Flesch), 자크 티보(Jacques Thibaut), 조르주 에네스코(Georges Enesco) 같은 당대 최고의 스승이 먼저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파리를 떠나 정착한 런던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키워가던 1940년대 초반, 전 세계가 전쟁의 참혹함에 빠져들던 그 암울한 시대에 막 성인이 된 그는 제 발로 군수공장을 찾았다.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예술과 음악을 현실과 동떨어진 숭고한 그 무엇이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본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4개의 현과 활을 어루만지던 두 손으로 군수물자와 무기를 다루며 틈틈이 영국군을 위해 마련한 무대에 섰다. 이스라엘 태생의 순수 유대인인 그에게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던 그 시대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을 법한데 그는 어떤 원망도 남아 있지 않은 청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유대 민족이 겪어야 한 아픔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날의 제가 본능적으로 바이올린을 가지고 싶어 한 건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많은 상처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은 유대인은 음악, 아니 최소한 ‘소리’와 깊은 인연을 지닌 사람들이 아닐까요? 기도문을 외우는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감동적인 멜로디가, 비통한 절규에는 장엄한 레퀴엠만큼 가슴을 후려치는 강렬함이 담겨 있으니까요.”
군수공장에서 보낸 피곤한 하루의 끝자락에도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은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화려한 데뷔 무대를 치렀다. 하지만 히틀러가 사라진 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선입견은 유럽 전역에 여전히 건재했다. 1951년에 참가한 자크 티보 콩쿠르에서는 그가 전쟁 중 훔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한다는 억울한 루머가 돌았고, 결국 그는 실력과 상관없이 5위에 머물렀다.
음악사의 치욕으로 남은 이 사건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보여준 진심 어린 선율을 더욱 특별한 울림으로 각인시켰다. 이브리 기틀리스의 이름에 웅장한 존재감이 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그는 BBC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음악가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최고의 무대에 섰다.
하지만 지문 하나 없이 반들반들하게 닦인 피아노처럼 반듯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틀 속에 자신을 구겨 넣는 것은 자유분방한 그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지금도 ‘커리어’라는 단어를 그의 이름에 이어 발음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커리어에선 너무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이라고. 그 대신 쿠바에 머물던 중 우연히 피델 카스트로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가 얼떨결에 투옥된 무용담이나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무대에 선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여전히 신나는 일이다. 전 세계 클래식 애호가들의 찬사를 받는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라기보다 장난기 넘치는 소년의 모습이다. 엄숙한 콘서트홀에만 머물지 못하는 그의 자유로운 발걸음은 그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중적 드라마에서는 노숙자 악사 역할을 맡았고,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런 그에게 ‘논컨포미스트(nonconformist)’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논컨포미스트의 사전적 의미가 반순응주의자라면, 과연 어디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요? 바이올리니스트 하면 떠오르는 고고한 이미지는 음악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억지로 지어낸 거죠. ‘세상을 만난 순간 터뜨린 울음소리’는 음악입니다.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삶은 영원히 음악과 함께 하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영원하지 않은 건 아마 인간뿐 아닐까요?”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자리한 음악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은 바이올린과 함께한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연주한 선율이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투명한 크리스털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나 현란한 기교 대신 직접 소박하게 써 내려간 자서전의 제목처럼 ‘영혼과 현(l’a^me et la corde)’만으로 음악 속에 자신을 녹이는 바이올리니스트. 정성스러운 손길로 장인이 완성한 메커니컬 워치만큼이나 정확하고 인간적인 테크닉으로 음악 그 자체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그를 세상은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그에겐 또 다른 바람이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과 최대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나게 하는 것. 그래서 1970년대 초반에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우드스톡에서처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방스(Vence) 페스티벌을 개최했고, 당대를 풍미한 인기 가수들과 함께 TV 쇼 프로그램에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별생각 없이 보던 TV 화면에 등장한 이브리 기틀리스를 통해 멀게만 느끼던 클래식 음악을 부담 없이 만난 경험은 프랑스인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흔히 클래식 음악을 범접하기 힘든 예술이라고 하지만, 50여 년 전 남아프리카의 시골 마을에서 제가 경험한 일을 들어보실래요? 마을 입구에 놓인 작은 조각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난생처음 보는 제게 그 작품을 선물로 줬어요. 고마운 마음에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을 위한 소박한 무대를 마련했죠. 피아노 반주도 없이 정성스레 바흐의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바이올린을 처음 보는 분이 태반이던 관중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당황한 저는 연주를 중단했지만, 그 웃음은 그들이 느낀 감동의 표현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란 그런 겁니다. 순수한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걸로 충분하죠. 또 하나, 음악사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긴 모차르트나 차이콥스키 같은 작곡가가 얼마나 쉬운 멜로디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는지 아세요? 빰빰빰 빰, 빰빰빰 빰(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1악장의 도입부를 따라 부르며)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하지 않나요?(웃음)”
1713년에 만든 그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상시(Sancy)’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리 특별한 구석은 없다. 여느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현과 활이 마찰하면서 진동을 일으키는 단순한 원리로 작동한다. 공연을 앞두고 마땅한 악기를 찾고 있던 차에 우연히 소개받은 바이올린 딜러가 보유한 유일한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만난 탓인지 상시와 그는 서로에게 익숙해지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상시를 보듬는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 그 모습은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감동적인 선율 그 이상의 뭉클함을 전해줬으니까.
“텅 빈 집에서 혼자 연주할 때면 누군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바이올린은 너무 당연한 제 일부분이기 때문에 함께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거든요. 우리에게도 언젠가 헤어져야 할 날이 찾아오겠지만, 그 순간까지 상시와 저는 하나로 남을 겁니다.”
첫 내한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1994년, 서울의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경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편평한 대지와 봉긋하게 솟은 우아한 자태의 야트막한 산이 그려내는 곡선은 여느 수려한 풍경화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20년 만에 다시 볼 그 풍경보다 그에게 더 반가운 것은 한국의 관객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만남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영원히 지속될 순수한 음악을 한국 관객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 자유로운 삶을 연주하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거장 이브리 기틀리스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현지 취재 배우리(파리 통신원) 사진 신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