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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계속된다

LIFESTYLE

한국문학의 대들보, 작가 황석영의 눈빛은 팔순을 넘은 나이에도 형형했다.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군산으로 이사하신 지 1년이 넘었는데, 이 도시와 별다른 연고가 없어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간을 마련해준다고 해서 왔습니다.(웃음) 예상보다 준비가 길어지고 있는데, 올해 안에는 개관할 수 있을 거예요. 되도록 문학관 같은 거창한 이름은 붙이지 않으려 해요. 누구나 아는 해외 작가도 생가에 동판 하나 남은 정도인데, 집필실이나 서재 정도가 적당할 겁니다. 완전히 새로 짓는 건 아니고, 남조선전기사옥이라는 일제강점기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근대의 극복과 수용을 주제로 글을 써왔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제는 명실공히 만년 문학에 도달했습니다. 만주국 신경(중국 장춘)부터 서울 영등포까지 근대산업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 그 흔적이 남은 군산은 어딘가 익숙하고, 삶을 포장하고 정리하기 적절한 곳이라 느껴집니다.
여전히 정정하신걸요. 새 작품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작업 루틴은 각지를 돌며 전화나 인편으로 원고를 신문사에 넘기던 <장길산> 연재 시절과는 차이가 많을 거예요. 그때는 원고 펑크도 많이 냈죠. 하지만 옥살이 후에는 재깍재깍 원고를 넘기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백낙청 교수가 “한국 교도 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농담하기도 했지요. 집필 습관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컴퓨터의 도움이 커요. 손으로 쓰는 것보다 피로가 덜하고, 무엇보다 원고를 이메일로 발송하면 끝이니까. 밤에 작업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요즘은 저녁 식사 후 산책하고, 오후 8~9시부터 시작해 아침까지 글을 씁니다.
컴퓨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 전 작업에 챗GPT를 활용한다고 밝히셨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신 듯합니다. 작가에게 가장 힘들고 지루한 과정은 자료를 모으고 소화하는 일입니다. 저는 장편소설을 위해 6개월에서 1년가량 예비 작업을 하는데요. <장길산> 연재 당시에는 자료를 수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물의 번역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때라 규장각에서 작업에 필요한 페이지를 사진 찍어 일일이 확인해야 했어요. 지금은 완전히 다르죠. 챗GPT와 문답을 이어가다 보면 손쉽게 전 세계의 심도 있는 자료에 접근할 수 있더군요. 다만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답이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요. 아직 부족한 점이 보이지만, 구성이 명징한 추리소설은 조만간 챗GPT가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른 작가님들도 알게 모르게 활용하지 않을까요? 소설가의 권위 혹은 신비감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 수도요. 챗GPT는 도구예요. 유용한 도구인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리고 저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그렇게 지고지순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이야기, 즉 서사이기 때문이죠. 현실의 여러 사건을 매일 재구성하고 상징화해 이야기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에요. 우리가 꿈꾸는 한 서사는 영원합니다. 소설은 서사의 한 형태일 뿐, 변화를 받아들여 동시대와 호흡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000년대 후반 블로그에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고요. 소설가가 웹툰 등 오늘날 서사를 전하는 강력한 매체를 활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몇 달 전 부커상 파이널리스트로서 런던에 다녀오셨죠. 2019년 <해 질 무렵>이 부커상 1차 후보로 선정됐지만, 최종 후보는 <철도원 삼대>가 처음입니다. 그간 많은 상을 받으셨지만, 부커상은 감회가 남다르실 듯해요.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영광스러운 일이고, 기왕 간 김에 수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은 못 받았지만, 개의치 않아요. 수상은 시기의 문제도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나 필립 로스 같은 훌륭한 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오히려 워털루 역내 서점 인기 코너 한가운데 놓인 <철도원 삼대>를 발견한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철도원 삼대>의 어떤 점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들도 겪은 일이기 때문이죠. 철도가 생기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산업 노동자의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인 거죠. 그러면서도 서구 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지점이 있으니 어필이 됐을 거예요.
그 지점은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등 작가님의 21세기 주요작을 설명하는 키워드인 ‘민담 리얼리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도원 삼대>는 근현대사 속 민중의 모습이 부각되어 <삼포 가는 길> 등 20세기 리얼리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현재 인물이 죽은 과거 인물과 교감하고 현실과 과거의 경계가 흐릿한 것 등 환상적 요소가 존재하지요. 이를 두고 서구 평론가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연관 짓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다른 개념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문화적으로 과거를 온전히 소환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아즈텍과 잉카 등 그곳에 꽃피운 문명은 말살되다시피 했고, 언어도 백인의 것으로 대체되었거든요. 그래서 이야기가 신화화되고 마술적으로 느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불러올 과거가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죠. 역사 기록물뿐 아니라 역사가 되기 전 단계 이야기인 민담까지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담은 그리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민담의 적당한 부풀림과 자유를 활용한 것이 민담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려보면, 민담을 작업에 끌어온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10년간 <장길산>을 연재하며 온갖 자료를 찾아봤고, 문화 운동을 하던 시기에 마당극도 썼습니다. 민담과 가까울 수밖에요. 이어 자기 양식을 찾는 과정에서 오랜 관심이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죠. 시대적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제3세계 개념이 부상하며 앞서 말한 라틴아메리카 문학 등이 주목을 받았죠.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개성은 무엇인지 고민했고, 민담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계적으로 우리 민담과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선녀와 나무꾼>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백조와 사냥꾼> 이야기와 유사해요.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도 마찬가지죠. 상투적 표현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황석영의 어린이 민담집> 시리즈를 펴내셨죠. 내년 여름에 30권까지 발간될 예정이라고요. 집필 활동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어린이 민담집을 내놓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70대에 어린 손녀에게 재미난 민담을 들려주고 싶었는데, 밖으로 나돌다 보니 시기를 놓친 것이 아쉬웠습니다. 또 나이가 들고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후대를 위해 뭔가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이제 조금 철이 든 거죠.(웃음) 서재를 정리하던 중 민담을 정리한 옛 노트를 발견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많은 민담 중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 오늘날 윤리와 가치관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추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뿌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 한국 고유의 신명이 드러나는 이야기를요.
어린이 민담집은 애니메이션, 무빙툰 등 다양한 2차 콘텐츠로 제작할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작업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책보다 태블릿이 익숙하니까요. 그래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가야 한다고 봐요. 다만 영상이 책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한 영상과 달리 책은 읽는 순간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머릿속에 그 장면을 그려야 하죠. 아이들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 독서만 한 것이 있을까요.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을 주체로 남아 있게 하는 창의성의 가치는 높아질 것입니다.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젊은 작가들과 겨루고 싶다. 새롭게 찾아낸 형식과 표현으로 경쟁하고 싶다”라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후 내놓은 <철도원 삼대>도 그렇고, 작가님의 작품에는 동어반복의 느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청춘으로 느껴지고요. 작업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가짐이 남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으로,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2017년 자전 에세이 <수인>을 쓴 뒤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빠져나간 듯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더는 나올 것이 없다는 위기감, 다시 시도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 그만 쓸 생각도 했죠. 가와바타 야스나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맹 가리 같은 작가들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다만 <철도원 삼대>는 진즉 했어야 하는 이야기로, 한국문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은 근대산업 노동자의 삶을 채워 넣겠다는 책임감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쓰다 보니 다음 작품이 떠오르고, 앞으로 세 작품 정도 더 내놓으려 합니다.
가장 먼저 선보일 작품은 군산 하제마을의 600년 넘은 팽나무가 주인공이라고요. 제목은 ‘할매’로, 나무를 둘러싼 사람과 자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미군 기지가 들어서며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팽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데, 이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죠. 다음으로 홍범도 장군을 다룹니다. 만주 벌판을 호령한 장군의 모습이 아닌,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극장 관리인으로 보낸 말년의 이야기가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35년에 걸친 도망자 인생을 그린 소설을 계획 중입니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열혈 독자의 욕심으로 몸 건강히 집필 활동을 이어가셨으면 합니다. 그래야죠.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어요.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