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국
이종국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국내외 유명인사들이 찾는 요리 연구가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식자재에 자신만의 감성을 더해 ‘접시 위의 예술’을 구현한다. 한편으론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컬렉터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수백 점의 앤티크와 궁중 유물, 현대미술 작품 등을 소장해왔지만, 오랫동안 조용히 향유해온 이유로 그를 컬렉터로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이는 국내 미술계에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예술품이 주는 그 작은 울림에 끌려 수십 년간 작품을 수집해온 컬렉터 이종국.
미슐랭 2스타 셰프, 전 세계를 순회하는 포시즌스 제트기 컬리너리 투어에서 한식 대표 요리사로 선정된 요리 연구가 이종국. 그가 최근 성북동 자택 근처에 가문의 선조인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의 호 백사(白沙)를 이름으로 내건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곳의 주방에서 요리하는 그는 사실 요리사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화가에 가깝다. 그는 접시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담는다. 요리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서양화를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했다는 독특한 이력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한편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컬렉터이기도 하다. 40년쯤 모은 작품이 300~400점에 이른다.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온 궁중 유물과 어디서도 보기 힘든 고가구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억 소리 나는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지난겨울의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자택까지 그의 예술 곳간을 급습했다.

1,2 레스토랑 백사 한편에 전시되어 있는 이민수 작가의 ‘The Memory’와 중국 작가 마수칭(Ma Shuqing)의 ‘Untitled’.
3 지난 40여 년간 모아온 각종 앤티크와 식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레스토랑 백사의 전경.
아직 제대로 오픈하지도 않은 공간인데 안에 있는 작품들은 이미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벽을 뚫고 들어간 불상과 200년은 족히 됐음 직한 나무장과 반상, 벽과 어우러진 여러 점의 단색화, 덩그러니 레스토랑 중앙에 누운 돌덩이까지….
지금은 임시 오픈 상태로 셰프들과 호흡을 맞추는 중입니다. 아직도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많죠. 작품들은 쭉 한번 보셨나요? 이 공간에 걸린 그림과 조각은 전부 제 음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음식이 반영되었다니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제 요리 철학과 한식의 푸근함이 동시에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테리어를 했어요. 특히 곳곳에 걸린 단색화 작품은 너무 많은 의미와 맛이 뒤섞인 요 근래 음식 사이에서 우리 한식 고유의 맛을 표현하겠다는 의지로 걸어뒀죠. 많은 얘깃거리가 있는 작품은 가능한 한 피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제 철학이 맞아떨어지는 작품으로만 구성했죠.
1층부터 3층까지, 대략 몇 점의 작품이 있는 건가요?
40점 정도 될 겁니다. 한데 제 음식이 변화하는 것처럼 작품도 그때그때 바꿀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까 저쪽에 있는 소반들은 잘 찍으셨나요? 2층에 있는 그림들도요?
인터뷰는 자리에 앉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끊겼다. 오후 3시. 브레이크타임으로 1층의 출입문이 잠겨 있는데도 점잖은 차림의 사람 몇몇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예약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종국이 눈짓을 하자 스태프들이 손님을 응대했다. 대화는 계속 끊겼지만 그때마다 작품을 보느라 심심함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미안함에 인터뷰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고, 우리는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성북동 언덕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그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 제일 먼저 마주한 마당과 뜰은 그 자체로 숲속의 미술관을 떠올리게 했다. 오래된 석상과 화려한 조각이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담장 밖 높은 소나무도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우아한 자태로 뻗어 있었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당이 미술관 수준이라면, 집 안은 박물관 수준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각종 고가구와 오묘한 빛깔의 앤티크 소품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엔 이우환과 김기린의 단색화가 보였고, 다른 쪽엔 백남준과 강익중 작가의 설치 작품이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수많은 작품이 눈에 밟혔다. 잠시 후, 그는 원음을 그대로 들려준다는 유국일 작가의 금속 스피커로 파도치는 바닷가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비로소 차분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 공간이 말로만 듣던 자택 겸 음식 발전소인가요?
네. 하지만 지금은 거의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레스토랑 일이 바빠 요새 여기 일은 신경도 못 쓰죠.
아까 보니 저쪽에 문이 없는 작은 방을 따로 만들어두었던데 용도가 뭔가요? 고가구와 멋들어진 병풍,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어요.
작품을 감상하는 방입니다. 인테리어를 하며 고가구와 어울리는 것들을 모아뒀죠.
대충 훑었는데도 레스토랑보다 훨씬 많은 작품이 보입니다. 저쪽에 보이는 건 조선백자인가요?
잘 보셨네요. 가장 아끼는 백자예요. 15세기에 쓰인 궁중 유물이죠. 제가 백자를 참 좋아합니다. 15세기의 조선백자는 대부분 유백색이죠. 저걸 갖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들였어요. 백자가 지닌 포용의 힘, 무한대의 영혼, 흰색이 주는 여백의 미. 이런 것에 빠져들었죠. 세상에 궁중 유물만큼 아름다운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저 옆에 있는 건 오래전 궁에서 실제로 중전이 쓰던 상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어딘가에서 거북이 모양의 커다란 자물쇠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자물쇠 안으로 기다란 청동 열쇠를 강하게 밀어 넣었다. 그가 이리저리 손목을 움직이자 그 낡은 것이 ‘찰칵’ 소리를 내며 결합됐다.
이 열쇠는 일본에 가서 사온 겁니다.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쓰인 곳간 열쇠예요.
이걸 사려고 일본까지 가신 거예요? 궁금해요. 어떻게 이런 귀한 물건을 구하셨는지.
이 열쇠는 저와 자주 거래하는 일본 앤티크 숍에서 구했어요. 나머지 궁중 유물은 해외에 있는 역사학자나 국내의 지인, 앤티크 숍 등을 통해 구했습니다.

4 레스토랑 백사엔 종종 이종국과 가까운 갤러리의 소장품도 전시한다. 사진의 백남준 작품은 더페이지 갤러리의 소장품이다.
5 일본에서 직접 사온,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쓰인 곳간 열쇠.
6 15세기 궁에서 쓰인 백자. 수백 점의 작품 중 이종국 요리 연구가가 가장 아끼는 궁중 유물이다.

각종 앤티크와 식기, 현대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레스토랑 백사의 전경.
언제부터 앤티크와 궁중 유물을 모으셨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모았습니다. 그 시절엔 가진 돈이 없어 작은 가구나 소품 등에 관심을 가졌죠. 나중에 요리를 시작하면서 식문화와 관련한 앤티크와 궁중 유물을 모으게 됐고요.
가만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음식과 관련된 물건도 많이 보입니다.
저도 요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오래전 우리 조상이 쓴 식기 중에서 정말 좋은 것은 탐이 나더라고요. 그런 귀한 물건을 손에 넣게 되면 온전히 그걸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도 늘어나죠. 궁에서 쓰인 유물이나 그릇, 고가구가 품은 저 오묘한 빛깔을 보세요. 수백 년 전엔 누군가가 저것에 실제로 음식을 담았을 텐데…. 저는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저도 그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한데 이런 게 궁금해지네요. 레스토랑과 집에 있는 이 작품과 유물을 전부 혼자 모으신 건가요?
이따금 사람들이 그걸 묻는데, 부모님이나 친지에게 물려받은 물건이나 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성과 한음’의 오성(백사) 이항복 대감이 직계 조상이라고 알고 있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도 없었나요?
아쉽지만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최근 <백사문집>을 2000만 원 정도 주고 샀죠. 사람들 손을 자꾸 옮겨다니는 게 싫었거든요.
그럼 레스토랑과 자택에 있는 미술 작품은 대부분 앤티크를 모으면서 수집하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앤티크로 시작해 궁중 유물, 현대미술 작품 순으로 컬렉팅했죠. 단색화의 경우 최근 4~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외에서 붐이 일었는데, 저는 십 수년 전에 이미 그것에 매료돼 하나둘씩 사 모았죠. 키스 해링이나 앤디 워홀, 쿠사마 야요이, 나라 요시토모 등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작품도 국내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전에 여러 점 사뒀어요. 단색화의 경우 지금도 40점 정도를 가지고 있죠. 해외 작가의 페인팅이나 조각, 고가구, 궁중 미술 등을 전부 합치면 300~400점 정도 됩니다.
참 일찍부터 작품 보는 눈을 키우셨네요.
‘눈’이라기보다는 미술에 푹 빠져 시간이 날 때마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사 모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투자가치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으로 작품을 사죠. 누가 그러더라고요. 한 작가의 특정 시리즈가 아닌,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왜 그렇게 두서없이 사느냐고요. 저는 작품이 좋은 걸 어떻게 하느냐고 되물었죠.(웃음)
다시 말하지만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그렇게 일찍부터 사 모은 건 여러 의미로 대단한 것 같아요. 사실 20여 년 전만 해도 단색화 작품을 되레 ‘한국적 촌스러움’으로 외면하기도 했으니까요.
맞아요. 늦게라도 그들의 작품이 사랑받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한데 뜻하지 않게 요 근래 제 레스토랑에 단색화 작가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열심히 음식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이 모여들었죠. 그중에서도 최명영 작가가 제 광팬입니다. 그분이 이런 얘길 하기도 했죠. “이종국이 만든 걸 어떻게 음식이라 하냐, 그냥 예술이지.” 사실 제가 만든 뭇국을 그분이 그렇게 좋아하세요. ‘각무국’이라고 맑은국에 그냥 무 한 덩어리 넣은 무심한 뭇국이죠. 어쩌면 이렇게 단색화가들이 레스토랑에 모여들게 되며 저도 그들의 작품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단색화 작가 중에 요 근래 눈여겨보는 분이 있나요?
최명영과 김진석 작가입니다. 최명영 작가의 작품은 보고 있으면 아이같이 순수해지기 때문에 좋아하고, 김진석 작가의 작품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냥 좋아했어요. 단색화를 그렸지만,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죠. 하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힘이 좋아 기회가 될 때마다 사 모으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의 작품은요?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집 안 곳곳에 젊은 작가의 작품도 상당한 것 같아요.
저는 젊은 작가, 나이 든 작가, 비싼 작가, 돈 되는 작가를 구분하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삽니다. 최근엔 레스토랑 지하 주방에 아트놈 작가의 회화 작품을 걸어뒀죠. 작가의 가족을 민화에 대입한 ‘모란 가족 행복도’라는 작품이에요. 주방 식구들이 힘들 때 보며 힘내라고 150호나 되는 큰 작품을 샀어요. 처음 그걸 살 때 갤러리 대표가 작품에 때 탄다고 얼마나 말렸는지 몰라요.(웃음)
대학에선 서양화를 전공하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작품 활동은 하지 않으셨죠. 이후 10여 년간 인테리어 사업을 했고, 그 뒤론 계속 한식에 전념했습니다. 작품을 사 모으는 걸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작품 활동은 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 시절엔 딱히 그림을 그려야겠단 생각을 못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작품을 사 모으는 것도 제가 그림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캔버스 대신 저는 매일 접시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직원들 밥에 그림을 그렸고, 별난 사람으로 입소문이 나 한 잡지에 요리 칼럼 기고를 제안받은 뒤엔 요리 연구가로 입지를 다졌는데, 그 후에도 요리 연구소나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죠.
음식과 그림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세요?
저는 음식과 그림이 담는 재료만 다를 뿐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이나 인테리어는 남기 때문에 두고두고 감흥을 주지만, 음식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요리사는 자신의 음식을 맛보는 손님의 가슴에 시 한 편, 소설 한 편을 남겨야 한다고 봅니다. 한 예로 오늘 점심때 지인 한 분이 제가 만든 냉이 요리에 감탄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냉이를 말려 접시에 멋지게 올려놓은 것뿐인데.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얘기고, 실은 그 냉이를 말리기까지 고초가 있었어요. 선이 가장 예쁜 냉이를 찾아서 잘 말려 손님상에 낼 때까지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죠. 어쩌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뇌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종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뭔가요?
사실 어떤 힘으로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겠다 같은 대단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것보다는 이 땅에서 한식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같이 한식을 만드는 이들이 자긍심을 갖게 하고 싶어요. 작품을 컬렉팅하는 일요? 그건 그냥 제 삶이죠. 따로 말해 뭐 하겠어요?
그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낡은 것을 택한다. 또 늘 음식이 돋보이는 백자를 고른다. 모던한 형색보다는 고전적인 걸 추구하고 때론 기분 내키는 대로 요리한다. 작품을 고를 때도 기분을 중시한다. 좋으면 산다. 하지만 벽에 걸어둘 작품은 자신의 철학을 가늠해 고른다. 공간을, 취향을, 컬렉션을 모두 요리와 열정으로 설명하는 그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