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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엔 있다

LIFESTYLE

전통 문화재 보존과 복원을 둘러싼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어떤 시선에 대하여.

불가리가 로마 시에 보존·복원을 약속한 스페인 광장 계단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 계단에서 최근 눈길을 끄는 행사가 열렸다.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 불가리가 스페인 광장 계단 보존을 위해 2015년부터 2년간 로마 시에 150만 유로(약 20억8000만 원)를 기증하는 기념식이 열린 것이다. 불가리의 장 크리스토프 바뱅 대표는 이 자리에서 “스페인 광장 계단은 이터널 시티(‘영원한 도시’란 의미로 로마의 별명)의 건축 보석”이라며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기획한 이 프로젝트로 전 세계인이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계속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불가리는 현재 프랑스의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LVMH) 그룹에 인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은 스페인 광장 계단 보존을 지원함으로써 브랜드의 뿌리인 이탈리아 로마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이탈리아의 세계적 패션 브랜드들이 자국 문화재 보존에 힘쓰고 있다. 2010년 토즈가 내부 균열로 한쪽으로 40cm가량 기운 콜로세움을 보수 . 복원하기 위해 2500만 유로(약 347억7000만 원)를 내놓은 데 이어, 2012년 프리미엄 진 브랜드 디젤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리알토 다리를 위해 500만 유로(약 69억5000만 원)를 기부했다. 펜디는 지난해 전 세계의 모든 동전을 볼 수 있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 복원을 위해 213만 유로(약 30억 원)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는 자국의 세계적 패션 브랜드들이 문화재 보존과 복원을 위해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라고 있다. 올해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 문화재를 위해 쓰는 돈은 전년보다 약 1억 유로 줄어든 14억 유로(약 1조9400억 원). 최근 마테오 렌치 총리는 “이탈리아는 국토 전체가 문화재”라며 “예산이 부족한 정부에서만 문화재를 지킬 게 아니라, 기업들이 앞장서서 문화재를 보수하는 데 힘써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들이 자국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돈을 쓰는 건 그만큼 자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강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토즈의 설립자 렌초 로소는 지난해 말 콜로세움 복원 프로젝트 행사에서 “역사와 문화는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고, 트레비 분수의 복원을 돕는 펜디 또한 창업자의 손녀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가 최근 인터뷰에서 “로마는 펜디 창조 유산의 일부”라고 말했다.

1 토즈의 기부금 2500만 유로로 현재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인 콜로세움
2 펜디가 213만 유로를 들여 복원하기로 한 트레비 분수
3 펜디의 트레비 분수 복원 행사 당시의 칼 라거펠트와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 피에트로 베카리 펜디 회장, 지안니 알레만노 전 로마 시장(왼쪽부터)

이쯤 되니 국내의 상황이 궁금해진다. 우리 문화재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각 말이다. 올 해 문화재청의 전체 예산은 약 6200억 원으로 해마다 소폭 증가하고 있지만, 국가 예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7%로 지난 10년간 거의 변화가 없다. 그 때문에 전국의 1만여 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제대로 돌보는 건 무리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기업들도 사회 공헌 활동 명목으로 문화재 보존을 위해 지갑을 열고 있지만, 한 해에 50개쯤 되는 기업이 문화재청에 기부하는 금액은 20억 원 남짓으로 매우 초라한 수준이다. 실은 이마저도 2005년 정부가 민간의 문화재 복원 . 보존을 촉구하며 시작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캠페인의 도움이 크다. 문화재청의 장영기 전문위원은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기업이 먼저 참여를 타진해오는 사례가 느는 추세지만, 외국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국내 기업들이 우리 문화재의 복원과 보존을 위한 기부에 인색하다는 느낌을 주는 건, 기업의 전체 사회 공헌 활동 비용에서 문화재 부문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 비용은 한 해 평균 2조7000억 원 수준으로, 기업의 매출이나 이익 규모로 볼 때 미국과 일본을 크게 앞선다. 하지만 이들의 공헌 활동은 대개 사회 취약 계층에 쏠려 있다. 기업과 사회가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어야 한다는 전통적 사회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인식은 좀 더 지속 가능하고 상생할 수 있는 활동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부문에서 오랫동안 정부 기관의 민간 전문가로 활동해온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한완선 교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대부분 취약 계층을 돕는 사회 공헌 활동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해 그 자체가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980년대 미국의 신용카드 회사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이하 아멕스)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미국의 최대 카드사 아멕스는 1980년 초 자사 카드 고객이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1센트씩, 신규 가입할 땐 1달러의 성금을 기부하는 이벤트를 진행해 뉴욕을 대표하는 자유의 여신상 복원비로 사용했다. 아멕스는 이 이벤트로 총 170만 달러(약 17억3000만 원)의 기금을 마련했고, 행사 기간에 자사 카드 사용률이 28%나 증가했다. 아멕스의 사회 공헌 활동은 제품 판매와 현금 . 현물 기부를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즉 고객이 제품을 하나 구입할 때마다 일정 금액을 공익 활동에 쓰는 것이다. 사회적 공익이라는 접점에서 기업과 문화재, 소비자가 모두 득을 보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들도 자국 문화재 복원을 지원함으로써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콜로세움 전면에 복원을 진행하는 3년간 토즈의 로고가 들어간 현수막이 걸리고, 입장권에도 토즈 로고가 각인된다. 정부는 예산을 따로 쓰지 않고도 관광 수익과 직결되는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어 좋고, 각 브랜드는 명분과 홍보 효과를 동시에 챙길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가히 이탈리아에 지지 않는 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만하다. 역사박물관과 유물 . 유적이 우리처럼 많은 나라도 드물다. 풍부한 문화유산은 관심 정도와 접근 방법에 따라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과 차별화된 문화 마케팅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장 필요한 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기업의 장기적 관심이다. 현재 문화재청은 각 기업의 특성과 전문성을 살려 우리 문화재 보존과 복원에 적합한 활동을 펼치도록 돕고 있다. 쉽게 말해 문화유산 보호는 전문 기관에 맡기고, 기업은 노하우를 살린 선별적 활동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 계층을 돕는 것도 좋지만, 이와 별도로 각 기업의 핵심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사회 공헌 활동도 전개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도 오르고 사회와 우리 문화재도 함께 윈윈할 수 있는 세상, 그리 어렵지 않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