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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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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은 요새 통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 출연 중인 드라마가 끝나면, 아마 아주 먼 유적지에서나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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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드라마 촬영이 있었죠? 오전에 있었는데 조금 일찍 끝났어요. 그런데 분장을 한 상태라 사우나 가서 씻고 쉬다 왔어요.

인터뷰하러 오실 때 어떤 마음이었어요? 여기 일정이 끝나면 다시 촬영장으로 가야 하잖아요.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매니저는 왜 이런 걸 잡았지?’라고 투덜대는 마음이었죠. (웃음) 드라마 대본은 미리 나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기가 어렵거든요. 게다가 이번엔 제 분량도 적지 않은 편이고요.

심지어 촬영에 들어가면 병을 얻을 정도로 공들인다고 알려지셨죠. 일이라는 건 원래 힘들어야 되는 것 같아요. 쉬우면 더는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죠. 쉽다는 건, 익숙해지거나 새롭게 도전할 만한 무엇이 없다는 의미니까요. 근데 전 연기가 일이고 직업이니까, 쉽게만 하면 뭔가 스스로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져서…

지난 몇 달간 강석현이라는 인물로 지내는 건 어떠셨어요? 전 드라마를 볼 때마다 저 사람 참 머리 아프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지난해에 제작 발표회에서 제가 ‘더러운 가문의 수장’이란 표현을 했어요. 세상에 떳떳하지 못한 가문이란 말이었죠. 극에선 물론 풍자적으로 표현돼 있지만요. 강석현이란 인물은 과거를 괴로워하고 반성하는 동시에 딸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껴 결혼에까지 이르는 캐릭터예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은수(최강희 역)랑 결혼할 땐 저도 ‘정말 그게 가능할까?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계속 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강석현이란 인물과 많은 걸 공유하고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론 어떠세요? 연기를 하는 동안엔 아무래도그 인물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죠. 그 인물처럼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거죠. 대본에 없는 상황이라도 누가 ‘이랬을 때 어떨 거 같아?’라고 물으면 ‘강석현은 이랬을 거 같아’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니까. ‘강석현이라면 커피를 마실 거 같아, 홍차를 마실 거 같아?’라고 물으면 그 답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거죠.

굳이 분류한다면 정진영이란 배우는 역할 속에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리는 유형은 아닌가요? 작품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맡은 인물이 심리적으로 복잡한 캐릭터면 저 역시 심리적 내상을 입기도해요. 많은 이가 좋아해준 <왕의 남자>의 연산군도 그런 역할이었죠. 전 그저 제가 맡은 역을 열심히 연기하는 것뿐이에요. 쉽게 말해 이런 거예요. 지금 제가 맡은 역은 현재의 애인이고, 다른 애인이 생기면 이전의 그 사람은 제 일기장이나 앨범 깊숙이 넣어버리는 거죠.

최근에 ‘할배파탈’이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드라마로 이렇게 큰 관심을 받는 건 처음인데, 부담되진 않나요? 부담은 없고 좀 신기하긴 해요. 이 작품을 시작할 때, 멜로와 로맨스가 부각될 거라곤생각도 못했거든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슬럼프도, 전성기도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딘가 절박한 것도 없이 터벅터벅 20년 가까이 걸어온 것 같다”고도 했고요. 아니요. 그 두 번째 말은 좀 이상하네요. 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 같거든요. 앞의 말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상할 게 없지만, 뒤의 말은 당시 제가 말을 잘못 했거나 기자분이 잘못 적었거나 그랬을 거예요. 근데 그런 문장이 있으니 뭔가 비슷한 말을 하긴 했을 텐데, 아마 이런 표현 아니었을까요? ‘어딘가에 정박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무래도 그랬겠죠?(웃음) 네. 당시 어딘가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을 했을 것 같은데, 정말 ‘정박’했다면 뒤에 이어지는 말도 ‘터벅터벅’ 걷는 게 아니라 ‘항해’라고 했어야 할 테니까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어쩌면 제가 머릿속에 ‘정박’과 ‘항해’라는 표현을 동시에 떠올렸다가, 그 메타포가 너무 관습적이란 느낌이 들어 갑자기 ‘항해’를 ‘걷는다’고 바꾼게 아닐까 하는 거죠.

갑자기 문학 수업이 시작된 거 같아요. 사실 전 굉장히 절박하게 연기해요.(웃음) 3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했으니 절박하지 않을 수 없었죠. 또 제가 배우로서 재능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 겨우 남들만큼 나온다는 걸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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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무렵 예산 부족으로 배우가 모자라 엉겁결에 배우로 데뷔했는데,
당시의 연기 용도가 너무도 분명해 ‘약’이라 표현했어요.
이후 30대 중반, 비교적 쉽게 상업 영화계에 들어간 뒤
관객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를 하자는 생각에 영화를‘술’이라 표현했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 궁극적으로 제가 진짜 하고싶은 건
약과 술을 넘어선 ‘차’ 같은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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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재능이 많지 않다니요? 제가 원래 소리가 잘 안 나는 배우예요. ‘스타성’이 없는 편이죠. 그게 운명인 거 같기도 하고요. 이를테면 인터넷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배우는 아니란 말이죠. 물론 어떤 작품이든 기본적인 안정감은 줘요. 그것 말고는 특별히 언급할 게 없는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에요. 그럼에도 계속 배우를 하는 건, 특별히 언급되든 안 되든 ‘내 일을 할 뿐’이란 생각으로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그간 맡은 배역이 이야기를 이끌기보다 주로 ‘운반’하는 역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지금 하는 드라마에서처럼 이 다음엔 극을 이끄는 역이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그럼 할수 없는 거죠.(웃음) 이런 역이든 저런 역이든 전 맡으면 최선을 다하니까.

실제로 연기 말고 다른 일을 할 때도 고민이 많으세요? 연기 말고 다른 일은 별로 하는 게 없어요.

되게 게으르다는 얘긴 좀 있더라고요. 다른 걸 안 한단 말이죠. 제가 좀 단순해요. 작품 들어오면 그걸 하는 동안 다른 건 일 절 안 하니까요.

그간의 인터뷰를 보면 답이 짧든 길든 늘 인문학적 풍모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독서를 많이 해온 영향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의 정진영이 있기까지, 예전에 국문학과에서 공부한 경험과 독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보세요? 문학에 적을 뒀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고, 그걸 업으로 삼을 생각도 해보진 않았어요. 어쨌거나 오래전 꿈은 영화감독이었고요. 물론 지금은 배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배우가 되는 데 가장 근접한 분위기에서 지내온 것 같긴 해요. 배우는 결국 사람의 감정을 포착하고 그걸 연기하는 부류잖아요.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제가 연기를 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었던 것 같아요.‘어떤 공부’를 해서 되는 것과는 다른, 그 사람의 기본적인 ‘눈과 ‘시야’에 대한 문제죠.

이 말 기억하세요? “영화를 처음 했을 때 그것이 약이었다면, 상업 영화를 하게 되면서 영화는 술이었다. 그런데 이제 차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 10여 년 전, 한 강연에서 하신 말이에요. 기억해요. 팬중 한 분이 그걸 서예로 써서 족자까지 만들어주셨으니까요. 아직도 제 방에 그게 걸려 있죠. 사실 제가 당시 한 말은 제 개인 이력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해요. 서른 살 무렵 영화감독을 꿈꾸며 연출부에 들어갔지만, 예산 부족으로 배우가 모자라 엉겁결에 배우로 데뷔했는데, 당시의 연기 용도가 너무도 분명해 ‘약’이라 표현한 거고, 이후 30대 중반, 비교적 쉽게 상업 영화계에 들어간 뒤 관객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를 하자는 생각에 영화를 ‘술’이라 표현했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 궁극적으로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약과 술을 넘어선 ‘차’ 같은 작품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말한 거죠. 근데 거기에 무슨 순서나 단계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저 열심히 하는 거죠.

이따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전체적인 연기는 옹골차 보이지만,늘 그 눈빛 어딘가가 공허하다고 느껴졌어요. 개인적 느낌입니다만, 왜 그런 걸까요? 글쎄요. 그런 배역을 맡았을 때 그런 연기를 한 거겠죠.(웃음) 일상에서 실제로 그런 눈빛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분명 앞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나이를 좀 먹고 보니, 저 역시 알게 모르게 현장에서 ‘취업을 위한’ 액션도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드라마 때문에 요새 여행은 통 못 다니시죠? 지금 하는 드라마가 끝나야 뭔가 할 수 있겠죠. 근데 ‘자연’은 제 취향이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오래된 유적지를 둘러보는 걸 좋아해요.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정말 그러실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웃음)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류형원 의상 스타일링 강지영 헤어 김승원 메이크업 공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