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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가 빈 건물을 활용하는 방법

LIFESTYLE

예술가에게 대도시의 작업실 확보는 먼 나라 이야기. 하지만 세계 미술계의 중심지인 런던의 예술가는 저마다 작업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보아츠의 리브/워크 프로그램의 주무대인 런던 포플러에 있는 밸프런 타워

영국 현대미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얘기 중 하나가 예술가의 작업실에 관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국 예술가는 대부분 런던에 작업실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런던의 살인적 물가를 고려할 때 그들이 런던에서 작업실을 구하는 건, 개인이 살 집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흥미롭게도 지금 영국 런던에선 예술가를 위해 작업실 임대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지역 주민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작업실이 늘고 있다. 런던을 중심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예술가에게 작업 공간을 대여하고 있는 몇몇 단체를 살펴본다.
보아츠(Bow-Arts)는 작업실을 갖지 못한 예술가들이 예술과 사회가 어우러진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공헌할 수 있도록 예술가와 지역 주민을 이어주는 비영리단체다. 여전히 많은 변화가 필요한 이스트런던의 보(Bow)와 포플러(Poplar) 지역을 위주로 활동하는 이들은 1995년 예술가들의 경제적 자립과 지역사회의 예술 교육을 위해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한 예로 현재 런던 시에선 저소득 임차인에게 할인된 임대료로 공공 임대주택인 카운슬 하우스(council house) 또는 카운슬 플랫(council flat)을 제공하고 있다. 한데 이런 시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우범 지역으로 낙후되기 마련. 보아트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리브/워크(Live/Work)’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예술가가 직접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 예술가에겐 매우 저렴한 가격(16.5m2(약 5평) 방 2개와 거실이 딸린 공간의 월 평균 임대료 약 1800파운드(약 300만 원)라고 볼 때, 보아츠를 통하면 약 600파운드(약 100만 원)에 작업실 임대가 가능하다)에 작업실을 겸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빌려주고, 지역사회엔 예술가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예술가들은 주민과 협업해 공공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소규모 아트 페어를 열어 여러 지역 주민에게 저렴한 가격에 아트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현재 150명이 넘는 예술가와 그들의 가족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런던 중심가의 작업실과 주거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민와일 스페이스의 대표적 예술가 임대 작업실인 코트렐 하우스
ⓒ Meanwhile space

코트렐 하우스에선 이따금 지역 디자이너들의 패션쇼가 열리기도 한다.
ⓒ Meanwhile space

“여기 사는 20년 동안 전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냈어요. 바로 한 달 전 이웃으로 이사 온 작가가 저희 집 문을 두드리며 인사하기 전까지는요.” 리브/워크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인터뷰이의 코멘트는 지역사회의 변화에 이 프로그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실제로 많은 리서치를 통해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프로그램의 감성적 장점이 지역사회의 변화와 함께 드러나고 있다.
한편 런던에선 비어 있는 공간도 과세 대상이다. 2011년부터 런던 시가 상업용 유휴 공간의 과세 대상 기준을 기존 월 1만8000파운드(약 3000만 원)에서 2600파운드(약 430만 원)로 대폭 확대해 실질적 과세 대상자가 30%에서 90%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상업용 유휴 건물을 소유한 대부분의 건물주는 차라리 빈 공간을 기부하고 세금을 감면받는 걸 택한다. 이에 사회적 기업 민와일 스페이스(Meanwhile Space)는 그 이름처럼 ‘잠시’ 동안 이러한 런던의 유휴 공간을 아티스트와 연결해 지역을 바꾸는 사업을 펼친다. 쉽게 말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민간으로부터 유휴 공간을 빌린 후 이를 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일시 활용’하는 것. 이들은 이제껏 영국 내 17개 지역에서 24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중 대표적 프로젝트는 윔블던 지역의 ‘코트렐 하우스(Cottrell House, 이들은 이 공간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정부에게 시세의 반값 이하로 빌렸다). 35년간 빈 공간으로 방치돼 있던 자동차 쇼룸 코트렐 하우스는 현재 아티스트와 지역 주민의 협업으로 보기 좋게 개발돼 아티스트는 물론, 이제 막 소규모 사업을 시작한 지역 주민에게까지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건물엔 현재 여러 명이 작업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워크숍 공간, 개인을 위한 사무실, 취약 계층 여성이 일하는 식당이 있고, 한쪽엔 탁구대를 비롯한 간단한 체육 시설까지 마련했다. 물론 건물의 새로운 임대가 결정되거나 매매자가 나타나면 이 공간을 비워줘야 하지만, 예술가에겐 단기간 동안이라도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영국 전역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민와일 스페이스는 2012년 ‘재생 & 재건 상(Regeneration & Renewal Award)’을 받기도 했다.

예술가와 지역 주민이 함께하는 보아츠의 파티

보아츠의 오픈 스튜디오는 예술가와 지역 주민들의 소통의 장이다.

1972년부터 아티스트에게 합리적 가격대의 스튜디오를 제공하는 아크메 스튜디오(Acme Studios)는 런던 내 아티스트에게 작업실을 지원하는 대표적 자선단체다. 정부 예술 기관의 후원과 다양한 기업의 펀딩으로 아티스트를 위한 스튜디오를 개발해왔다. 이들은 단순히 예술가의 작업실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별도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해마다 입주 예술가를 대상으로 1년 작업실 무상 임대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현재 아크메 스튜디오는 런던 곳곳에서 15개의 건물을 아티스트의 작업실로 임대하고 있으며, 570여 개의 스튜디오에서 500여 명의 예술가가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세계적 작가 레이첼 화이트리드도 이들이 임대한 스튜디오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들은 최근 설립 40주년을 맞아 스트랫퍼드의 와턴 하우스(Warton House)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이전보다 많은 작업 공간을 확보한 상태다. 그런가 하면 최근 런던 버먼지 지역에 있는 대규모 아티스트의 작업 공간이 아파트로 재개발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40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자연스레 작업 공간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크메 스튜디오는 그간 아티스트들이 재개발과 지역 재생 프로젝트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해왔는지, 그리고 그 후 비싼 임대료를 이기지 못해 얼마나 많은 아티스트가 런던 외곽으로 쫓겨났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크메 스튜디오의 이런 코멘트를 계기로 최근 런던 시는 버먼지 재개발 사업으로 작업 공간을 잃은 아티스트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조사 계획을 발표했다.
런던의 수많은 유휴 공간과 정부 소유의 건축물을 임대해 활용하는 여러 단체와 예술가들의 활동 이면엔 지역 주민과 정부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예술가가 한곳에 모여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 덕에 런던이란 도시는 더 큰 힘을 얻게 된다. 예술은 도시에서 주로 소비되지만, 임대료가 비싼 도시에 예술가를 위한 공간은 거의 없다. 유휴 공간을 활용해 아티스트와 지역 주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이를 통해 공간의 가치를 높이는 런던의 작업실 임대 프로그램은 한국 미술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티스트의 창작 환경 문제를 결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 사회가 올 때, 한국 미술계도 비로소 한 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양혜숙(기호 리서처)  사진 제공 보아츠, 민와일 스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