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을 기억하리
국내외에서 바쁜 한 해를 보낸 문화 예술계 인물들에게 물었습니다. 올해 당신이 기억하는 엔딩 장면은 무엇인가요? 그들이 꺼내놓은 이야기는 아름답기도, 가슴 아프기도 했습니다. ‘미디어시티서울 2016’을 감독한 백지숙 큐레이터가 기억하는 전시장의 마지막 장면부터 12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 출연하는 배우 김재범이 잊지 못하는 장면까지. 그들의 소중한 엔딩 신을 감상하며 2016년이 가기 전에 그 여운을 함께 누려보는 건 어떨까요?

#1 그 무대의 마지막
“10월 23일 내한 리사이틀을 마친 안드라스 쉬프는 다시 무대에 올라 앙코르곡으로 모차르트의 소나타 제16번 1악장을 연주했다. 평생 다듬고 다듬으면 천상의 것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었다.”
류태형(음악평론가)
“연극이 끝나자 막이 올라가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것은 텅 빈 객석. 그제야 관객들은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가 바로 극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 2막 7장에 나오는 제이퀴스의 대사 ‘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무대(All the world is a stage)’가 떠오르는 인상적인 엔딩이었다. 우리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무더웠던 여름, 국립극장에서 본 <햄릿>의 마지막 장면이다.”
김보라(미술평론가)

#2 10월 2일 자라섬의 밤
“10월 2일 밤 9시 30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파티 스테이지,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고 전설적 드러머 마누 카체(Manu Katche)의 메인 스테이지 공연도 끝난 시간. 우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대기하고 있었고,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추위에 맞서 남아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조명이 켜진 뒤 연주를 시작했고, 우비를 입은 채 스테이지 앞에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관객은 우리의 연주와 함께 열정적으로 뛰며 자라섬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 잊지 못할 밤을 기억하며 우리는 또 2017년을 준비한다.”
신현필(재즈 색소포니스트, 스텔라모멘츠 리더)

#3 생애 최고의 한 장면
“2016년엔 많은 좋은 일이 있었다. 뉴욕과 파리, 빈, 뮌헨, 서울, 방콕을 비롯해 핀란드, 터키까지 정말 다양한 곳에서 좋은 연주를 한 뜻깊은 한 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순간은 지난 5월, 3년 동안 만나온 오스트리아인 남편과 아름다운 선상 결혼식을 올린 것. 오스트리아에서 지인들 1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에 나올 법한 결혼식을 현실로 경험했다. 올해 마지막 일정으로는 12월 31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열리는 송년 음악회에서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그 또한 특별한 엔딩이 되지 않을까!”
최나경(플루티스트)

#4 말의 가치를 되새기며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의 마무리 작업을 하며 ‘올해의 엔딩 신’을 꼽아 본다. ‘그건 비밀이 아니야. 모든 힘은 근원과 목적이 하나라고 생각해. (중략) 나의 이름도 너의 이름도 모두가 별들의 반짝임에 의해 아주 천천히 말하는 위대한 언어의 음절들이야. 그 밖에 다른 힘은 없어. 다른 이름도 없고.’ 이 텍스트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의 마지막 출구 벽면에 마치 쉼표처럼 끼워 넣은 어슐러 르 귄의 글이다. 이번 전시는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보자는 의도로 시작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말의 가치에 대해 묵상해본다.”
백지숙(미디어시티서울 2016 예술감독, 큐레이터)
#5 빛나는 순간!
“허수경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간에 대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시간은 지층처럼 켜켜이 쌓이고 바닷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기도 한다. 그 시간 속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두 번은 없을 ‘순간’이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도 없을 순간. 마지막 시 ‘나는 춤추는 중’에 그 순간이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지금을 사는, 관통하는 순간이!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오은(시인)

#6 간직해야 할 용기
“화창한 어느 날, 미국 LA의 한 거리를 걷다 헌 책방을 발견했다. 다양한 예술 서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은 바로 줄리아 캐머런의
양정아(국제 사진 기획자, 사진 큐레이터)
#7 야누스를 노래하다
“음반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는 1978년 오픈해 지난해에 문을 닫은 재즈 클럽 ‘야누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곳에서 27년간 피아노를 연주한 임인건은 ‘야누스’의 주역이었던 소위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의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 회고한다. 앨범 막바지에 수록한 ‘야누스 블루스’는 재즈맨들의 힘찬 희망가.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음반의 마지막 트랙 ‘바람이 부네요’는 무대가 끝난 뒤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들의 고독을 담았다. 가슴이 저리다.”
황덕호(재즈평론가)

#8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기억하며
“바이올리니스트 고(故) 권혁주가 하우스콘서트에 처음 출연한 건 2007년에 열린 164번째 하우스콘서트였다. 187명이 참여한 그 공연은 당시까지 하우스콘서트 중 가장 많은 관객이 관람한 공연이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우리가 전 세계 28개국에서 425번의 공연을 펼친 ‘One Month Festival’ 당시 1만2000명이 페이스북 라이브로 그의 공연을 관람하며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이 무대는 하우스콘서트와 함께한 권혁주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지난 10월 12일, 우리는 이제 겨우 31세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떠나보냈다.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이름, 권혁주. 그와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무대까지, 그와 함께 만든 무대와 그가 우리에게 남긴 음악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다.”
박창수(더하우스콘서트 대표, 작곡가, 피아니스트)

#9 간절함과 영원함
“짧은 시간 세상을 뒤흔들다 무대 뒤로 사라진 비틀스가 이 세상과 작별 하고자 준비한 마지막 공연이 있다. <비틀스: 에잇 데이즈 어 위크 – 투어링 이어즈>에 그 옥상 공연 장면이 등장한다. 영원한 청춘처럼 느껴지던 그들의 얼굴 위로 드리운 세월의 무게가 깊은 슬픔과 감동을 준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자백>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1만7000여 명의 후원인 리스트가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이 얼마나 진실에 목마른 채 살아왔는지, 그 염원을 느낄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그 염원을 되새겨본다.” 오멸(영화감독)
#10 위로를 건네는 땅에서
“지난 5월 아이슬란드를 여행했다. 이 사진은 그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은 장면이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시내 카페에 들러 커피를 시켰을 때 카페 주인이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아이슬란드 중심부에 고속도로를 뚫는 공사를 하다 중단했다. 그 이유는 국민 대다수가 아직 이 땅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당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미 열흘간 아이슬란드의 아름다움을 느낀 나는 어느새 그 이야기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치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야의 계절이 지나 어둡고 추운 시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힘들고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춥고 고독한 땅에 일군 아름다운 이 모습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함경(오보이스트,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 단원)

#11 불편함을 응시한다는 것
“해릴린 루소의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차별적 시선에 맞서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뜨겁고 진솔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서 장애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비장애인 자아’, 장애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멸시를 받아온 ‘괴물 자아’를 차례로 내면에서 떠나보내고, 마지막 남은 거울 속 자신의 ‘장애인 자아’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편지를 쓴다. 지금까지 이렇게 잊기 힘든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윤이형(소설가)

#12 우리가 꿈꾸는 나라
“2016년엔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그중 최근 공연한 뮤지컬 <곤 투모로우(Gone Tomorrow)>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던 인물이 모든 것에 실패한 상황에서 울부짖는 장면. 내가 맡은 홍종우라는 인물이 맞닥뜨린 상황은 너무나 처절했다. 그는 결국 죽음을 택하는 데 그 장면을 연기할 당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고, 결국 얼굴에 분장한 피와 섞여 범벅이 되어버렸다. ‘멈춰버린 회색 구름/ 다 타버려 갈린 검은 땅/ 세상 끝에 몰린 절망/ 터져버린 붉은 심장.’ 이 작품의 가사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김재범(뮤지컬 배우)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