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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서 벗어난 어느 날

LIFESTYLE

연습실에서 공연 리허설을 관람한 특별한 경험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리소 인쇄 체험기.

잠깐이나마 앤디 워홀이 되어보는 꿈을 꿀 수 있었던 리소 인쇄 체험

청명한 가을이 오니 불현듯 집을 꾸미고 싶어졌다. 그렇다. 나는 지금 북한의 선전용 아파트처럼 오랫동안 방 안 곳곳을 폼으로만 채우고 있는, 사놓고 한 번도 걸지 않은 숱한 액자와 디자인 포스터를 뒤로한 채 또다른 ‘물적 허영’을 즐길 거리를 찾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 어떤 약으로도 고치지 못한다는 고질적인 물적 허영. 한데 이번엔 뭔가 조금 달랐다. 작은 종이 포스터 내지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카드가 갖고 싶어진 것. 그러니까 나의 물적 허영 세계에도 요즘 유행인 ‘미니멀리즘’과 ‘DIY’의 바람이 도래한 것이다. 이튿날 나는 곧장 그 꿈을 이뤄줄 공방을 찾아 나섰다. 아침 해가 내리쬐는 창문에 그대로 붙여 방 안의 분위기를 혁신해줄 나만의 작고 예쁜 소품을 만들어줄 그런 공방 말이다. 한데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포스터를 만들려면 그 바탕이 될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막대기 모양’ 정도로 인간을 표현하는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갖춘 나로선 그 작업이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내 안도했다. 그 어떤 엉망진창인 그림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인쇄 공방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바로 ‘리소 인쇄 (Risograph)’ 스튜디오. 다음 날, 나는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 있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겸 리소 인쇄 공방 ‘코우너스’의 ‘리소 인쇄 워크숍’에 참여했다. 코우너스로 말할 것 같으면, 그간 다양한 그래픽디자인 작업과 수려한 리소 인쇄물로 몇몇 ‘핫’하다는 미술 공간에서 전시를 해온 예술 집단. 김대웅 대표는 이날 나를 리소 인쇄의 신세계로 이끌 스승으로,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는 상반된 섬세한 예술혼으로 일반 인쇄기로는 구현할 수 없는 리소 인쇄만의 매력과 원리를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그건 그렇고 ‘리소 인쇄’가 뭔지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여기에 설명을 조금 붙여보자. 리소 인쇄? 미술 기법처럼 들리지만, 이는 1980년대 말 일본의 ‘리소’사에서 개발한 디지털 인쇄기이자 이것으로 만든 인쇄물의 총칭이다. 원리가 등사판이나 실크스크린 등 공판 인쇄와 유사한 데다 일반 오프셋 인쇄와 달리 한 번에 한 가지 색만 인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러 색을 인쇄할 경우 인쇄한 종이를 다시 기기에 넣고 다른 색상을 인쇄해야 해서 각 인쇄물마다 차이가 발생한다. 쉽게 말해 한 장 한 장 각기 다른 예스럽고도 키치적 결과물이 나오는 것. 이날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리소 인쇄의 기본 용지인 A3 종이 위에 가장 자신 있게 그릴 수 있는 강아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것을 다양한 색으로(인쇄용지 색을 바꿈으로써) 시각화하는 걸 고려해 그림의 선을 따라 손톱만 한 스티커를 정성스레 붙이는 작업도 행했다. 그 순간 하나의 ‘원본’으로 여러 장의 명작을 만든 앤디 워홀이 되어보는 상상도 잠깐 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망상임을 깨닫고 워크숍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완성한 그림을 리소 기기에 넣고 차분히 결과물을 기다렸다. 결과물을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심심하다’ 정도? 2시간가량 이어진 이 날 작업에서 나는 총 3장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살짝 포장해 말하면, 내게 리소 인쇄는 ‘비어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를테면 절제와 중용의 미학 같은 것. 절제와 중용은 그림 실력이 뛰어난 어떤 이와 대결해 완승할 수 있는 나만의 비밀 무기 같은 것이다(라고 해 두자). 이날 밤, 집에 돌아와 나는 끝내 그 결과물을 창문에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조용히 창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정한 고수는 무기를 탓하지 않는다. 단, 실력이 좋다고 해서 어떤 무기든 상관없을 리는 없다.”

 

공연 애호가로 살다 보면 가끔 리허설을 관람할 기회가 생긴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리허설 하나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백스테이지 투어를 하던 중 만난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습 장면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습하는 모습에 홀리고, 처음 들어보는 홀의 음향에 반해 잠시 멈춰 서서 감상하는 나를 가이드가 이끌고 나간 아쉬운 기억이다. 이렇게 연습 현장을 맞닥뜨리는 행운을 얻지 못하더라도 찾아보면 리허설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꽤 있다. 뉴욕 필하모닉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 트라는 관객에게 막바지 연습을 공개하는 ‘오픈 리허설’을 운영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학생들을 위해 교육 적 차원에서 리허설을 공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해외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일정을 들여다보며 부러운 감정에 휩싸이던 어느 날, 서울시향도 공개 리허설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이름은 ‘리허설 룸 콘서트’. 장소는 기존에 오픈하지 않던 서울시향의 실제 연습실이다. 처음 찾아가본 연습실은 시설이 훌륭해 보였다. 연습실이자 아시아에서 내로라하는 녹음 시스템을 갖춘 스튜디오라고 한다. 연주자들 주위에 자연스레 배치한 의자 중, 나는 목관 파트의 바로 뒤에 자리 잡고 마치 악단의 일원인 양 지휘자를 바라봤다. 내 공연 인생에서 오케스트라와 가장 가까이에 앉은 순간이라 생각하니 기분 좋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악기 조율을 끝내고 시작한 곡은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며칠 뒤 한강공원에서 강변 음악회로 연주할 프로그램이다. 최수열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연습은 부분적으로 끊어서 진행했다. 티셔츠에 카디건을 걸친 그의 편안한 차림도, 몇 마디씩 집어가며 필요한 지시를 하곤 빠르게 악보를 넘기는 태도도 신선했다. 15분쯤 흐른 뒤 협연자인 트리오 오원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자 연습하다 합류하는 모양. 첼리스트 양성원 외에 피아니스트 에마뉘엘 스트 로세와 바이올리니스트 올리비에 샤를리에도 한국 무대에서 종종 만나 낯익은 연주자다. 프로들의 호흡이란 이런 걸까? 오케스트라와 함께 몇 마디 연주해보곤 금세 다시 맞춰볼 부분과 넘어갈 부분을 논의하며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연습을 했다. 지휘자와 협연자의 곡 해석이 달라 아슬아슬한 기싸움을 벌이는 건 아닐까, 내심 예상 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습실에서 리허설 중인 최수열 지휘자와 서울시향 단원들

뮤지컬 <곤 투모로우>에서 고종 역을 맡은 김민종과 김옥균 역을 맡은 이동하의 연습 장면

앙상블을 만들어가는 날것의 음악을 감상한 기분을 되새기며 다음 날 나는 또 다른 리허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뮤지컬. 클래식 공연보다 거칠고 펄펄 날뛰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찾아간 곳은 남산창작센터의 연습실이었다. 이곳에서는 감히 올가을 최고 화제작이라 할 만한 <곤 투모로우>의 런스루(run-through, 공연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는 것)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연 개막을 5일 앞둔 터라 분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분주했다. 이날은 연습실에서 런스루를 진행하는 마지막 날. 스태프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먼저 연습실을 휘둘러봤다. 김무열, 임병근, 박영수 등 주요 배역에 캐스팅된 배우들이 거의 모여 있었다. 한 스태프가 “곧 런을 돌겠습니다!” 소리치자 제 각각 상대 역과 합을 맞춰보던 배우들이 한가운데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제자리를 잡았다. 김옥균 역은 이동하, 홍종우 역은 이율, 고종 역은 김민종이 맡아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무대장치, 의상, 소품, 마이크가 없는 상태에서 막 전환을 지시하는 무대감독의 목소리에 따라 실제 공연을 하듯 극이 진행됐고,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배우들의 날렵한 동작과 비장한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기는 이미 수차례 공연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함께 지켜보던 이지나 연출가는 바꿔야 할 부분을 계속 체크하고 있었으니, 최종 결과물은 공연장에서 확인해야 할 일. 약 70분에 이르는 1막이 끝나자 현 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박수로 호응했다. 나는 연습실을 빠져나오며 이런 예상을 했다. 격동의 시절을 그린 대형 창작 뮤지컬은 아마도 꽤 세련된 작품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그리고 공연 애호가로서 나의 생활도 당분간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에디터 |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 박용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