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친구와의 여행
오랜 시간 단테를 연구해온 박상진 교수는 오늘도 시공을 초월해 더욱 깊어진 그와의 우정을 되새긴다.

“요즘 제가 꽂혀 있는 <신곡(神曲)> 속 문장은 ‘e io sol uno(그리고 나 하나 홀로)’예요. 단테가 내세 여행을 떠나기 전에 했던 혼잣말이죠. 가끔 혼자 입으로 발음해보는데, 그의 심정이 더욱 깊이 와닿아요.” 친구는 닮는다고 했던가.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년)를 평생 친구라 여기는 박상진 교수는 12세기 시인 단테가 그랬듯이, 요즘 혼자만의 고독과 방랑에 빠져 있다. 지난해 여름 미국 UC 버클리로 연구년 1년을 계획하고 홀로 떠났다가, 팬데믹 때문에 일찍 귀국했다. 그리고 올봄에 여행기 <단테 × 박상진>을 탈고했다. 그는 우리나라 ‘단테 연구의 일인자’로 불리는 학자다. 부산외대 만오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작가로서 서양 중세 문학의 상징, <신곡>과 단테에 관한 쉬운 해설에 매진한다. “집필하는 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데 꼭 어떤 계기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전공하고 이후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호기심이 생길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도록 파고들지는 몰랐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이론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던 2002년, 한 출판사에서 <신곡>의 번역을 의뢰해 일을 시작했다. 단테가 700여 년 전 ‘지옥’과 ‘천국’ 그리고 ‘연옥’ 총 세 편에 걸쳐 쓴 이 대서사시는 완독이 곧 도전일 만큼 어렵고 묵직한 작품. 그는 이른 저녁 잠들었다가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글을 쓰는 ‘새벽형 인간’인데도 완역하는 데 꼬박 5~6년 걸렸다. “2007년 <신곡> 번역서를 냈어요. 지금은 2021년 단테 서거 700주년을 앞두고 해설을 강화한 주석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 베네치아 산타 크로체 교회 앞의 단테 전신상.
2 피렌체 전경.
이후로 교정 안팎에서 이탈리아 고전문학에 관해서라면 그를 찾는 일이 늘었다.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과 함께 화제가 된 <신곡>(2007년) ‘천국’, ‘지옥’, ‘연옥’ 세 권은 2013년 기준 25쇄 이상 찍으며 특별판이 새로 나왔고, <데카메론>(2012년) 번역판에 이어 그가 2013년 고문을 맡은 국립극장 연극 <단테의 신곡>(2014년)은 연일 만석을 이루며 프리뷰 강연까지 인기가 높았다. 지난해 펴낸 해설서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을 비롯해 EBS <인문학 특강>, 두산아트센터의 시즌 프로그램 ‘두산인문극장’ 등 지금도 많은 대중 강연에서 고전을 쉽게 풀어주는 그를 찾곤 한다. 그런 가운데 박상진 교수는 재작년 이탈리아를 두 번이나 다녀왔다. 작가의 일대기를 더 친근하게 다루는 신간을 준비하기 위해 피렌체를 중심으로 단테의 삶과 궤적을 좇아 걸었다. 출간은 5월 예정이다. “주변에 <신곡>을 끝까지 못 읽었다고 하소연하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읽고 싶었으니 그런 하소연도 하겠지요. 저도 이번 책 서문에 단테에 대한 우리 인식은 신비로움과 친근함 중간 어디쯤이라 썼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나 환경, 언어나 내용이 낯설어서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일단 단테를 알아나가면 그의 말이 웅장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오히려 소박하고 친근하다는 걸 깨닫지요. 클래식 음악이 처음에는 어려워도 친해지면 굉장히 깊고 넓은 세계가 있는 친구로 여겨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물론 ‘교수 박상진’은 단테의 작품을 즐기기보다는 해부와 분석·평가 같은, 도전하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제게 ‘완독’이란 평생 유보될 것 같아요. 단테라는 세계가 워낙 넓고 깊어서, 만약 권태라는 것이 온다면 그건 싫증보다도 압도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럼에도 계속 하게 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위안이나 공감을 얻어요. 그는 매우 지적이면서도 소박하고, 자신의 내면을 작품에 솔직히 드러내거든요.” 당시 이탈리아어는 귀족이나 종교인이 즐겨 쓰던 라틴어보다 하층민의 언어였는데, 정치가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단테는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썼다. “대화하는 상대가 굉장히 똑똑하면서도 사려 깊고 정서가 풍부하다면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번 여행에서 비록 시간은 다르지만 단테가 살던 곳에서 그가 당시에 마신 공기와 빛을 느꼈어요. 학자의 의무에서 벗어나 제 감상을 더 입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 각별했죠.” 더불어 우연이 삶을 정하고 채운다는 평소 지론을 확인했다. “이탈리아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단테를 배우거든요. 숙소 주인은 자기가 보던 <신곡>을 꺼내 앞에 놓고 저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지요. 어느 카페에선 단테와 함께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르노 강변이나 이름 모를 시골길을 거니는 상상을 했지요. 행복보다는 슬픔이 더했습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대해 품은 절절한 사랑, 현실에서 겪은 철저한 좌절을 생각하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잘 살았다고 위로해주고 싶었죠. 동시에 나 자신을 향한 위로기도 하고요.”

3 <신곡>의 원제는 ‘La Divina Commedia’. 신성한 희곡이란 뜻이다. 인간 본질을 비롯해 세상에 의문을 갖는 철학서로도 의미가 있어 <지옥의 문>을 조각한 로댕을 비롯해 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영감을 받았다.
이토록 위대한 문학가와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는 걸까. “단테의 <신곡>이나 <새로운 삶> 같은 책이 어렵고 생소한 것은 사실이에요. 우선 유명 작가의 평전을 읽어보는 게 좋겠죠. R. W. B. 루이스의 <단테>는 얇고 평이한 반면, A. N. 윌슨의 <사랑에 빠진 단테>는 꽤나 자세하고 두꺼운 소개서예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작가의 비평이 매서우면서도 공감을 자아냅니다. 특히 단테는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글에 버무려 넣는 경우가 많아 물리적 차원의 접근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능한 한 작가와 똑같은 경험을 해보라는 거죠. 그가 걷던 길, 바라보던 밤하늘, 스쳐 지나던 바람, 회한 따위를 가능한 대로 경험해보세요. 제가 낸 두 권의 학술서는 안 읽어도 돼요. 그거 읽으면 정나미가 떨어질지도 모르거든요(웃음).” 인류 고난의 시대, 박상진의 기록을 가이드 삼아 지중해로 곧장 떠날 수는 없지만, 문학을 돛 삼아 머리로나마 쉬고 싶기에 남은 ‘단테 읽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더 근본적 차원까지 내려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죄가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지, 공동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윤리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 답을 구하기 위해 신의 나라로 뛰어든 단테가 우리에게 더 깊고 먼 성찰과 공감을 제공할 겁니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