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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선사한 마법

LIFESTYLE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고스란히 담은 와인. 땅속의 미묘한 생명체와 동고동락하며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건강하고 신선한 맛,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이다.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서는 소뿔을 자연 퇴비로 활용한다. 사진 제공 나라셀라

어떤 와인을 시음하는 자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뱉은 이가 소믈리에인지, 브랜드 관계자인지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다. 다만 유기농과 자연주의, 바이오다이내믹 등의 용어를 섞어가며 최근의 와인 트렌드를 이야기하던 중 그가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을 믿지 않아요.” 이유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주창하던 이웃의 포도원에서 야밤에 사람들 눈을 피해 비료를 뿌리는 걸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들짝 놀란 일행이 그곳이 대체 어디냐고 캐물었으나 끝내 그 이름을 들을 순 없었다.
그런데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에 대한 누군가의 신뢰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그 포도원은 진짜 거짓말쟁이였을까? 바이오다이내믹(프랑스어로는 비오디나미(Biodynamie)), 한국어로는 대체 불가능한 단어를 쓰는 이 농법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눈속임이 아니라 달의 시계에 맞춰 행한 일련의 과정일 수 있다. 이미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바이오다이내믹을 유기농과 친환경의 유사어 정도로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유기농법은 일반적으로 화학비료, 제초제,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 작물을 뜻하는데 바이오다이내믹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엄격하다기보다는 초자연적이며 철학적인 믿음이 더해진다. 루는 것. 따라서 그 나무에서 난 열매는 그야말로 자연이 만든 것이 되고, 이를 사용한 와인은 생생한 자연의 맛 그대로가 될 것이다. <올댓와인 1·2>의 저자로 와인 수입사큐리어스와인을 경영하는 조정용 대표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대해 와‘ 인은 포도밭에서 만든다’는 명제를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이오다이내믹은 철저히 화학 물질의 침투를 배제하지만 천연 퇴비나 미네랄 조제품은 일정 한도 내에서 허용한다는 사실. 조정용 대표는 주로 구리와 황을 물에 녹여 분무기로 뿌린다고 했다. 문득 앞서 말한 야밤의 비료 살포 사건은 비료의 성분 분석표를 보기 전까지 어떤 추측과 판단도 내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함, 신비주의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을 지닌 사람이므로.

니콜라이호프 그뤼너 벨트리너 큐리어스와인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의 종주국은 오스트리아다. 오스트리아의 인지과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가 창시한 개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바하우(Wachau) 지역의 니콜라이호프(Nikolaihof)가 원조 격. 1971년부터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 와인을 만들었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독일의 유기농 인증 기관 데메테르(Demeter)의 승인을 받았다. 국내에 갓 출시한 니콜라이호프의 그뤼너 벨트리너 2012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강렬한 땅의 기운을 품어 미네랄 풍미가 두드러졌는데 생동감 넘치는 산미 또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음식 친화력이 뛰어나 소믈리에들이 선호하는 화이트 와인. 게다가 20~3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니 셀러에 여유 공간이 있다면 넉넉히 쟁여놔도 좋을 듯하다(합리적인 가격이라 부담 없다). 프랑스에서는 루아르 지방의 니콜라 졸리가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은 무엇인가?>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지금까지 200곳 이상의 포도원에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전파했다. 부르고뉴에서는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와 도멘 르루아의 랄루 비즈 르루아 여사가 선두에 서서 바이오다이내믹 와인 영역을 이끈다. 샹파뉴 지방에서는 플뢰리(Fleury) 가문이 이 지역 최초이자 최대(약 15헥타르) 규모의 생산자임을 자랑한다. 1895년에 설립한 이 명망 높은 샴페인 하우스는 1970년대에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연구를 시작해 1992년부터 모든 포도원을 바이오다이내믹 원칙에 따라 경작하고 있다(이곳 역시 데메테르 인증을 받았다). 4대 손인 모간 플뢰리 여사는 소의 뿔과 배설물을 땅에 묻어 만든 퇴비로 토양과 포도나무의 뿌리를 건실하게 관리하며, 소뿔에 석영을 넣어 숙성시킨 후 물에 희석해 줄기와 잎에 뿌려 광합성을 돕는다고 이곳만의 방식을 설명한다.

제라르 베르트랑 시갈뤼 루주 까브드뱅

핑구스 PSI CSR와인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 길진인터내셔날

플뢰리 소나트 넘버 나인 엑스트라 브뤼 크리스탈와인

플뢰리 와인 중에서도 테루아를 가장 잘 표현한 와인으로 평가받는 것이 소나트 넘버 나인 엑스트라 브뤼(Sonate N°9 Extra Brut)다. 흰 꽃과 싱그러운 과일 향, 탄탄한 산미가 받치는 드라이한 맛, 풍성한 버블과 미네랄 캐릭터가 긴 여운을 남기는 와인. 가녀린 듯하지만 끈질기며 힘이 있다. 서울 신라 호텔의 함규연 소믈리에는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은 자연이 선사한 마법, 순수함의 절정”이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생산자는 랑그도크 지역의 도멘 레옹 바랄(Domaine Leon Barral). “전체 포도원 규모가 33헥타르인데 그중 포도밭은 13헥타르고 나머지는 밀, 보리, 올리브 등을 재배하고 있어요. 땅의 기운과 영양분을 다른 작물과 나눠 갖는 거죠.” 또한 소, 말, 돼지를 방목해 이들의 배설물을 퇴비로 이용하고, 밭을 일구는 연장도 오래된 수집품만 고집한다고. “저는 이곳 와인 중에서도 자디스(Jadis)를 가장 좋아해요. 신선한 과일향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퍼져 나오는 제비꽃 같은 퍼플계열의 꽃향기가 정말 매혹적입니다.” 어디 이뿐이랴. 랑그도크의 또 다른 거인 제라르 베르트랑(Ge´ rard Bertrand)도 검은 과일의 아로마와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을 지닌 바이오다이내믹 와인 시갈뤼 루주(Cigalus Rouge)를 자신 있게 선보인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파소로블스 지역에 위치한 태블러스 크릭(Tablas Creek)의 포도원에서도 포도나무 사이로 자유로이 뛰노는 양, 알파카, 당나귀를 목도할 수 있다. 토스카나의 노른자 땅, 키안티 클라시코의 포제리노(Poggerino)는 포도 수확이 끝난 가을부터 봄까지 다른 작물을 심어 기른 후 밭을 갈아엎어 자연 퇴비로 활용한다. 덴마크 출신으로 보르도와 소노마를 거쳐 스페인 리베라델두에로에 정착한 천재 와인메이커 페테르 시세크의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을 향한 의지도 높이 살 만하다. 그가 만든 핑구스 PSI(Pingus PSI)의 경우 버려진 포도밭을 다시 일궈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이상향, 바이오다이내믹의 꿈을 실현한 와인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의 많은 포도원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동참하고 있지만 여전히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하나의 마케팅 수단이며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캘리포니아 UC 데이비스 캠퍼스의 앤드루 워커 교수도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은 과학적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농법을 따르려면 엄청난 관심이 필요하다며 그런 노력이 포도나무의 건강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쨌든 이 농법을 시행하는 정상급 와인 양조장이 지속적으로 훌륭하고 독특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