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단단한 영화제를 위하여
국내의 영화제는 부산과 부천, 전주에만 있지 않다. 온 지천에 널려 있고, 잘 찾으면 진주 같은 보석도 캘 수 있다. 단, 그걸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국내 최초 국제단편영화제인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지난해 개막식 현장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라면 단연 1996년에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BIFF)다. 매년 10월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등지에서 열리며, 짧은 역사임에도 국내를 넘어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물론 인기도 최고 수준. 거의 모든 상영작이 온라인 예매 시작 1시간 내에 매진된다. BIFF는 국내 영화감독과 배우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인까지 참여하는 축제로 올해(10월 6일~15일)도 여느 때처럼 흥미로운 뉴스거리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
부산에 BIFF가 있다면 부천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있다. BIFF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1997년부터 전 세계의 공포와 호러 장르 영화를 전문적으로 개척해 소개해온 탓에 마니아가 많다. 네임 밸류로만 치면 2000년 후발주자로 나선 전주국제영화제(JIFF)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대안적 독립 영화를 엄선해 들여와 명성을 쌓았다. 여기까지가 보통의영화 팬들이 알고 있는 국내 영화제에 대한 일반 정보다.
지난해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상영한 지구촌 먹거리 문제에 관한 영화 <움켜쥔 땅>
하지만 국내엔 이들 영화제 말고도 수많은 영화제가 존재한다. 지금 당장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국내 영화제만 대략 70~80개. 제대로 홍보되지 않은 영화제까지 치면 100개가 훌쩍 넘는다. 하지만 이렇게 군소 규모로 운영하는 영화제에도 분명 보물은 있다. 규모는 작지만 독특한 개성과 상영작으로 중무장한 그런 영화제 말이다. 국내의 눈에 띄는 소규모 이색 영화제를 한번 살펴보자.
‘충무로뮤지컬영화제(CHIMFF)’는 작년 프리페스티벌에서 관객에게 호응을 얻고, 지난 7월 서울 충무아트센터와 DDP 등지에서 개최한 세계 최초의 뮤지컬 영화 전문 영화제다. ‘뮤지컬을 컨셉으로, 영화를 주요 콘텐츠’라는 구호로 <오즈의 마법사>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록키 호러 픽쳐 쇼> 같은 뮤지컬을 주요 컨셉으로 한 영화를 다룬다. 첫 회 행사인 올해 10개 섹션의 총 29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6일 동안 1만5000여명의 관객이 찾아 앞으로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봤으며, 영화제 폐막작으로 마이클 잭슨과 다이애나 로스가 주연한 <마법사(The Wiz)>를 상영해 뮤지컬 영화 팬은 물론 마이클 잭슨 팬까지 포용하는 진기를 선보였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 전문 공익 재단 ‘환경재단’이 개최하는 영화제도 있다. 바로 ‘서울환경영화제(GFFIS)’다. 수많은 영화 중 ‘환경’을 화두로 삼은 작품을 선별해 상영하는 GFFIS는 올해 13회째를 맞아 기후 변화 같은 환경문제를 다룬 작품과 생태계의 아름다움, 건강한 먹거리 등을 주제로 한 영화를 상영했다. 이들은 2004년에 첫발을 내딛고 점점 몸집을 키워 매년 100여 편의 환경 영화를 발굴해 소개하는데, 나들이철인 5월에 행사를 개최해 가족 단위 관객도 많은 편이다. 올해 이들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교육과 성 평등, 환경 등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를 개막작으로 골랐다.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활동하는 독립 애니메이터를 육성·지원하는 든든한 영화제도 있다. 바로 ‘인디애니페스트(Indie-AniFest)’다.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에서 매년 9월에 개최하는 이 영화제는 국내 유일의 독립 애니메이션 축제로, 12년째를 맞았음에도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올여름 최고의 흥행작인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도 소싯적에 이 영화제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으로 상을 받았으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선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다. 올해는 9월 22일부터 27일까지 남산의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등지에서 영화제를 개최하며, 개막작은 세계적 거장 미카엘 두도크 데비트와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의 합작인 <붉은 거북(The Red Turtle)>이다.
올해 인디애니페스트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붉은 거북>
또 국제 단편영화의 장인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도 있다. 이름에 ‘아시아나’가 붙어 아시아 영화만의 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 아시아나항공이 후원하는 영화제로 지상과 하늘(기내)에서 동시에 열리는 독특한 형식이 눈길을 끈다. 다시 말해, 지상 영화제가 끝난 후 수상작을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노선에서 상영하는 것. 올해로 14회째 를 맞이하는 AISFF는 11월 3일부터 8일까지 씨네큐브 광화문과 메가박스 아트나인 등에서 개최하며, 집행위원장은 배우 안성기가 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적 화두인 ‘드론’을 테마로 한 영화제도 있다. ‘서울이카루스드론국제페스티벌(SEDIFF)’이다. 10월 21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물빛무대, 너른광장 등에서 개최하는 SEDIFF는 드론을 활용해 촬영, 제작한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을 소개하는 축제. 지난해에 뉴욕에서 열린 뉴욕시티드론필름페스티벌(New YorkCity Drone Film Festival)에 수많은 세계 드론 영화인이 참여한 것처럼 SEDIFF도 그 바람을 이어갈 전망이다. 이외에도 강바람을 맞으며 이불을 덮고 누워 영화를 보는 ‘한강이불영화제’, 나무와 풀밭 등 눈앞의 자연에 그대로 스크린을 걸고 영화를 보는 ‘무주산골영화제’, 침을 꼴깍 삼키게 하는 요리 영화를 관람한 후 쇼콜라티에나 셰프 등이 참여해 관객과 대화를 이어가는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스낵 컬처 시대에 맞게 정확히 29초 분량으로 제작한 단편영화만 상영하는 ’29초영화제’ 등도 작지만 눈에 띄는 영화제다.
한데 이쯤 되니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이 많은 영화제가 과연 전부 필요한 걸까. 영화제는 본디 예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영화를 공개적으로 상영하고,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목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인데, 이렇게 많은 영화제로 어떤 변별력이나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의문.
실제로 관객 입장에서 영화제는 멀티플렉스와 상업 영화 중심의 환경에서 보기 힘든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대상이다. 또 영화인에겐 독창적 창작물을 소개하는 통로인 동시에 신진 창작자를 발굴 및 육성하고 지원하는 장 역할 또한 톡톡히 해낸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국내엔 이름도 모르는 많은 영세 영화제가 난립해 ‘부실 콘텐츠’라는 비난도 받아왔다. 조금 풀어서 말하면 한국 영화 시장의 급작스러운 성장에서 파생한 성과와 폐해가 영화제라는 우물 안에서 극명하게 교차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 지자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하는 어느 프로그래머는 “도서관과 미술관을 두고 ‘난립’한다고 말하진 않는다”며 “국내 영화제가 그간 성장에만 힘썼기에 최근 인적 구성원 사이의 불협화음이나 예산 운영 등의 문제를 겪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에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제 관계자나 관객이 국내의 많은 영화제가 원래 목적에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고 있는지, 딴 길로 새진 않는지 내·외부적으로 잘 살피면 될 것이다. 또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대형 영화도 중요하지만, 대작의 기반이 되는 잡초처럼 생존하는 작은 작품과 그것을 상영하는 군소 영화제를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제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영화제가 열리는 이 나라가 하루빨리 더 작고 단단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틀을 쌓았으면 한다.
에디터 |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