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 55년
작곡가 김희갑을 빼고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가거라 38선’, ‘꿈에 본 내 고향’, ‘눈물 젖은 두만강’, ‘돌아와요 부산항에’, ‘목포의 눈물’, ‘사랑의 미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향수’ 등 3000곡 넘는 음악을 작곡한 동시에 300여 편의 영화음악과 뮤지컬 작곡까지 손대지 않은 구석이 없는 그는, 그래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목’으로 불린다. 올해 작곡 인생 55년을 맞은 그를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반가운 입추(立秋)에 만났다.

역시나 듣던 대로 뮤지컬 <명성황후>의 백미는 엔딩이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한 후 비탄에 잠겨 있는 백성 앞에 혼이 되어 나타나, 험난한 앞날에 맞설 것을 당부하며 부르는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그야말로 “소름 끼칠 정도의 감동”이라는 찬사 외에는 다른 표현이 불가능했다. 결연에 차 힘찬 걸음을 내딛으며 조선의 국모가 부르는 이 곡의 클라이맥스 가사는 이렇다.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 2000만 신민 대대로 이어 살아가야 할 땅 / 한 발 나아가면 빛나는 자주와 독립 물러서면 예속과 핍박 /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 하리 /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가사만으로도 가슴이 절절 끓게 하는 이 노래는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의 반복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이끌며 관객에게 극적 희열을 선사한다. 사실 가사가 반복되는 부분은 음도 같이 반복돼 이론적으로는 단조로운 선율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듯 들을 때마다 놀라운 감동을 주는 것일까? 그건 바로 김희갑 선생이 머릿속에 계산해둔 공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총 8소절이 반복되는데, 그냥 반복이 아니라 한 음씩 키가 바뀌면서 올라가요. 그러다 보면 마지막 부분은 첫 키보다 3도 높여 부르게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고의 클라이맥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뮤지컬 공연은 2시간이 넘어요. 긴 스토리를 모두 노래로 전해야 하니 아리아가 그야말로 구구절절하죠. <명성황후>는 특히 그랬어요. 그 때문에 엔딩에서 설명은 최대한 짧게, 곡도 최대한 깔끔하고 단순하게 가는 것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감동을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올 시즌에도 객석에서 공연을 봤는데, 언제 들어도 마지막 부분은 참 괜찮은 것 같아요. 내가 봐도 말이죠.(웃음)”
‘한국 창작 뮤지컬 넘버 중 가장 유명한 선율’로 남은 이 엔딩곡을 비롯해 우리 역사와 뿌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명성황후>(7월 28일~9월 10일, 예술의전당)는 국내 창작 뮤지컬 중 처음으로 올해 개막 20주년을 맞았다. 20년 동안 유료 관객 162만3000명, 총 공연 횟수만 1100회에 달한다. 연출가 윤호진도 “<명성황후>는 제게 효녀 같은 작품입니다. 힘들 때마다 절 일으켜 세워주었거든요”라며 크나큰 애정을 보인 <명성황후>는 1997년 아시아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장까지 접수했다. 그 배경에는 뮤지컬의 숙명인 ‘음악의 힘’이 컸다. 새로운 시즌마다 시대의 흐름과 주연배우 등에 따라 곡을 보완하고 때로는 새로운 아리아를 추가하며 20여 년 동안 <명성황후>의 성공을 이끌어온 김희갑 선생은 올해 아내이자 <명성황후> 작사가인 양인자 선생과 함께 공로패를 받았다. “아무리 유명한 해외 뮤지컬도 다 같아요. 공연을 올리고 보면 부족한 점,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띄기 마련이죠. 그래서 매년 음악과 무대, 의상을 수정하고 그다음 해에 또다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합니다. 그러다 보니 20년 전 첫 공연과는 음악도 많이 달라졌어요. 우선 템포가 빨라졌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20년 전의 <명성황후>를 보여주면 아마 “너무 처져서 못 듣겠다”고 할 거예요. 템포를 끌어올리니 극 전체가 젊어졌고 힘도 생긴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실력이 많이 좋아졌어요. 스스로 공부도 많이 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게 느껴집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명성황후>가 더욱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통에 그의 이름 석 자도 더불어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55년 전인 1960년부터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193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대구에서 성장, 대구 대성고등학교 브라스밴드 악장으로 활동하다 고등학교 졸업 즈음 미8군 무대에서 신들린 듯한 기타 연주로 주변을 술렁이게 했으니. “아버지가 의사였는데 환자는 잘 안 보고 매일 친구들과 연주하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클라리넷이며 아코디언 같은 악기가 늘 집에 있었고, 그 소리에 파묻혀 지냈기 때문에 저도 일찍 기타를 시작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 이미 기타로 명성이 자자했죠. 아버지께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는 기타리스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미8군에서 팝송을 주로 연주하던 그는 1977년 5인조 김희갑악단을 새롭게 조직하면서 본인의 악단을 꾸렸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대중가요를 멀리하고 팝과 재즈에 심취해 있던 그가 대중음악 작곡에 발을 들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1963년에 ‘비 내리는 호남선’, ‘마포 종점’, ‘섬마을 선생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박춘석 작곡가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는데, “앨범을 하나 준비 중인데 녹음할 때 와서 기타 연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난생처음 녹음실이란 곳에 가봤어요. 가서 연주를 하는데 주변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때껏 사람들이 듣던 연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거든요. 그 후로 엄청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이 작곡을 한번 해보라고 꼬시더라고요. 그래서 1965년에 태원, 남진 등과 함께 첫 옴니버스 앨범을 냈습니다.”
신보가 나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방송에선 계속 그의 음악을 틀었다. 주변 선후배들에게 하나 둘 작곡 부탁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그는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밴드를 이끌면서 편곡을 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려면 음악 이론을 제대로 배워야 했던 것. 그는 워싱턴 USN 음악학교에서 재즈와 화성악을 공부하고 1962년에 해군 군악대를 창설한 이교숙 선생을 찾아갔다.
“레코드판 하나 사려면 의정부나 동두천에 가서 해적판을 구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실용음악을 배울 수 있는 학교도 없었죠. 이교숙 선생님을 통해 화성악 같은 이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우리 또래 중 음악 좀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선생님 제자예요.” 그는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숙제의 양도 어마어마해 그 흔한 영화 한 편 볼 시간도 없었다. 난이도도 꽤 높았다. 작곡한 것을 몇 인조 악단으로 다시 편곡해보라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산 공부를 시킨 셈. 그 덕분에 1년 6개월 만에 그는 ‘하고 싶은 음악을 다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됐다.
그는 이후 ‘가거라 38선’, ‘꿈에 본 내 고향’, ‘눈물 젖은 두만강’, ‘대지의 항구’, ‘황성 옛터’, ‘돌아와요 부산항에’, ‘목포의 눈물’, ‘꽃순이를 아시나요’, ‘번지 없는 주막’, ‘불효자는 웁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 ‘애수의 소야곡’, ‘진정 난 몰랐네’, ‘타타타’, ‘그대는 나의 인생’, ‘사랑의 미로’,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킬리만자로의 표범’, ‘큐’, ‘향수’ 등 시대를 불문하고 지금껏 사랑받는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만들며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쯤 되면 그동안 작곡해 번 수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한 곡당 얼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1960~1970년대엔 다들 ‘형, 나도 곡 하나 줘’ 그러면 곡 써주고, 그 곡이 히트치면 다른 후배가 와서 ‘형, 나는 곡 안 줘?’ 그러면 또 하나 주고 그랬지. 내가 만든 곡이 방송이나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게 그저 신기하던 시절이니까.” 물론 1980년대에 들어 다행히 저작권법이 생겼고, 그 옛날에 만든 곡들이 흐뭇하게도 지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 7월 양평군민회관에서 가진 기타 공연

김희갑 작곡가가 여전히 작곡도 하고 기타 연습도 하는 그의 작업실
현인, 윤항기, 임희숙, 이동원, 임주리, 김상희, 주현미, 인순이, 문희옥, 장사익, 이선희, 조관우, 조용필 같은 한국 대표 가수뿐 아니라 가수로 데뷔한 인드라 스님, 마야 등 가수의 나이도 다양하고 장르도 다양한 곡을 작곡해왔지만 작곡가에게 최고의 순간은 늘 같다.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는 느낌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가수를 만났을 때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곡은 이동원과 박인수가 부른 ‘향수’다.
그가 1989년에 작곡한 ‘향수’는 다들 알고 있듯이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정지용은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작품 판매가 금지되었다 1988년 해금된 시인. 가수 이동원이 그해 우연히 서점에서 정지용의 시 ‘향수’를 읽게 됐고, 서울대학교 박인수 교수를 찾아가 같이 노래할 것을 권유한 후 김희갑 선생에게 작곡을 의뢰하면서 ‘향수’가 탄생했다.
“작곡가가 기대한 이상으로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가 있어요. 그게 이동원과 박인수예요. 당시 주변에서는 ‘네가 무슨 재주로 그 곡을 만드느냐’ 그랬어요. 시 자체가 워낙 좋았고, 시어가 리듬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무척 어려웠거든요. 제가 쓴 곡 중에는 거짓말 안 하고 10분 만에 쓴 것도 꽤 되는데, ‘향수’는 무려 10개월이 걸렸어요. 글자 수가 모자라는 부분에는 콧노래로 ‘우우우~’ 한다든가 ‘음음~’ 하면서 자수를 맞춰 나갔죠.”
녹음하는 날까지도 미완성이라고 생각한 이 곡은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반주가 들어가고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를 시작하는데, 천상의 화음이 따로 없었던 것. 1989년 10월 3일, 정지용 흉상 제막식 기념 공연에서 처음 공개한 이 곡은 이후 놀라운 히트를 치며 전 국민의 애창 가요가 됐다.
그는 가수의 가창력과 음색, 음역을 모두 까다롭게 따져서 곡을 주기로 유명하다. 그럼 그가 꼽는 노래 잘하는 가수는 누굴까? 바로 조용필이다. 1990년대에 한 가수와 세 번 이상 같이 일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조용필과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큐’, ‘바람이 전하는 말’, ‘그 겨울의 찻집’, ‘잊혀진 사람’, ‘세월’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조용필 앨범 8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김희갑 선생의 아내 양인자 선생이 작사가로 함께해 더욱 의미가 깊다. “8집 작업을 앞두고 조용필이 찾아와 곡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기존과 달리 짧은 노랫말이 아니라 긴 노랫말을 곡에 녹여보면 어떠냐” 했고, 저는 어떤 곡이든 다 만들어줄 테니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담아보라 했죠. 그랬더니 보통 곡의 2배에 달하는 가사를 적어왔더라고요.” 가사를 다 넣으려면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한 독백 형식의 랩(!)밖에 없었다. 노래 시간도 6분에 달해 당시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 곡은 8집의 타이틀곡으로 선정,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조용필을 국민 가수로 우뚝 서게 했다.
같은 가수와 세 번 이상 작업하길 꺼리는 그가 3000여 곡을 작곡했을 정도면 국내에서 활동한 유명 중견 가수에게 적어도 한 곡 이상 만들어줬다는 계산이 나온다. 형, 동생, 때로는 선생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가수가 많은 건 당연지사. 2006년에는 고희를 맞은 김희갑 선생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가수들이 모여 ‘그대-커다란 나무’라는 이름의 헌정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그냥 지나가도 되는 일인데 후배들이 그런 자리를 만들어주니 고마울 따름이죠. 공연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또 따로 인사받고. 공연 전에도 몇 번이나 자리를 마련해 축하를 받았는지 몰라요. 올해 제가 여든 살이 됐는데, 이제는 요란하게 안 하려고요.” 이러한 사정을 알았는지 KBS <콘서트 7080>에서 그에게 ‘김희갑 작곡 인생 55주년’이라는 컨셉으로 특집 제의가 들어왔고, 조만간 1시간 30분 정도의 녹화를 할 예정이다. 그에게 곡을 받은 가수들이 모여 노래도 하고 당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이 프로그램에 그는 아내와 함께 출연할 계획. 앞서 언급했지만 그의 아내 양인자 선생은 1974년 단편소설 <외항선>으로 데뷔한 뒤 ‘킬리만자로의 표범’, ‘타타타’, ‘립스틱 짙게 바르고’, ‘서울서울서울’, ‘작은 연인들’ 등을 작사하고 MBC <부부만세> 등의 극본과 <울타리 밖의 아이들> 등의 소설로 이름을 알린 작사가 겸 소설가다. 2011년 <불후의 명곡 2>에 부부가 함께 출연해 시청자와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 홍경민과 알리, 강민경 등 새 라인업을 구축한 가수들이 김희갑·양인자 부부의 노래 ‘작은 연인들’, ‘바람이 전하는 말’,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알고 싶어요’ 등을 새롭게 편곡해서 무대에 올려 시청자에게 즐거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양인자 선생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도 작사를 맡아 남편과 함께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며 작품에 더욱 힘을 실었다.
대중가요 작곡가에서 영화와 뮤지컬 음악 작곡가로도 인정받은 김희갑 선생이지만 기타리스트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기에 지금도 기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지난 7월 10일 양평군민회관에서 기타리스트 김홍탁, 김광석, 김종진과 함께 ‘g4 퀄텟 드림 콘서트’를 펼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4대의 기타가 모인 무대였어요. 1970년대에 히식스의 리더로 활동한 김홍탁 씨와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씨, 그리고 우리나라 기타리스트 중 제일 실력이 뛰어난 김광석이 함께 모여 50~60대가 즐기던 올드 팝과 펑키 음악을 연주했죠. 호응하는 관객들을 보니 음악이 아니라 추억을 연주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이 공연을 위해 양평에서 며칠씩 머무르며 합숙 훈련도 했다.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아 오는 10월에 다시 양평에서 기타 공연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라고.
요즘은 연예인만큼 10대에게 인기 있는 직업이 작곡가, 작사가라고 한다. 각 방송사에서 너도나도 만들어내는 비슷한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이 등장해 좋은 점수를 받고 가수가 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것도 한몫한다. 작곡가라는 직업이 예전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워너비 직업으로 등극했다는 말에 김희갑 선생은 조심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TV의 음악이나 쇼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스타 작곡가의 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 최근 작곡, 작사, 보컬, 거기에 연주까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뮤지션이 많아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회의적이다. “글은 글 전문가가 쓰는 게 좋고, 곡은 음악 전문가가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요즘 싱어송라이터라 불리는 몇몇 젊은 가수의 곡을 들어보면 ‘무책임하게 만든 곡이 더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율도 없고 멜로디도 들쭉날쭉하죠. 체계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혼자서 다 하려 하면 분명 한계가 있거든요. 그 한계가 음악에 나타나는 거죠.”
여든이 넘었지만 불교에 관한 유익한 영화나 뮤지컬을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꿈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사는 그의 머릿속엔 이미 스님들이 생활하는 사찰은 어떤 무대로 만들지, 스님들의 검소한 의상은 어떻게 디자인할지, 그 배경에 삽입할 음악은 어떤 멜로디로 써나갈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명성황후>의 파워풀한 엔딩곡이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창조되었듯 김희갑 선생의 음악은, 그리고 그의 내일은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듯 오랜 준비를 바탕으로 한 내공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알 필요가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