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무상함의 공장이 되다
남경민은 캔버스 화면을 창으로 삼아 대가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창작의 고통이 지나간 그곳에서 춤추는 나비는 삶과 예술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남경민은 2005년부터 대가로 인정받은 작가의 작업실에 관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페르메이르, 렘브란트, 고흐, 마티스, 프리다 칼로, 모네,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세잔, 데이비드 호크니, 게르하르트 리히터 같은 작가의 작업실과 방, 식탁, 침실 등을 사실적 세부 묘사와 밝은 색채로 캔버스에 담았다. 화가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듯한 앵글, 현실과 상상이 혼재하는 화면 구성 때문에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가득하다. 최근에는 신윤복, 김홍도, 신사임당 등 한국 고전 화가의 작업실을 주제로 삼아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몬드리안의 작업실 2, 리넨에 유채, 150×227cm, 2008

고흐의 방, 리넨에 유채, 117×81cm, 2003
화가의 작업실은 어떤 공간인가?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은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불렀다. 작업실을 예술가의 혼이 깃든 창작의 산실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림을 생산하는 현장을 떠올리면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다. 그는 작업실을 공장이라 부름으로써 그림을 제품이나 상품처럼 취급하는 자본주의사회를 풍자했다. 개념미술이 등장한 이후에는 작업실을 ‘거점’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브리핑실이나 작전상황실처럼 어딘가 삭막한 느낌을 준다.
최초의 작업실은 원래 조합이었다. 화가의 조합이 있었고, 그들은 조합에 소속된 조합원이었다. 이후 집단 창작하는 벽화에서 개별 작업이 가능한 이젤 페인팅으로 그림의 매체가 바뀌면서 화가도 덩달아 조합에서 점차 독립했고, 아틀리에와 스튜디오의 개념은 그 독립 공간을 지칭하게 됐다. 아틀리에와 스튜디오는 기능적 차이가 없지만, 화실과 작업실이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정도로 둘을 구별하면 되겠다. 이를테면 정물대와 석고상, 난로와 야전침대 그리고 턴테이블이 화실이라는 공간의 향수를 구성하는 필수 품목이라면, 작업실은 상대적으로 그 향수가 덜한 편이다. 현대미술이 다변화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다.
화가라면 다른 화가의 작업실이 궁금하기 마련이다. 문학 숭배자가 문학관을 순례하듯이 화가는 지금은 기념관이나 개인 미술관으로 변한 대가의 작업실을 순례한다. 이 여정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으로 위대한 작가의 예술혼을 그리워하고 경외하는 애틋한 감정이 묻어 있다. 대가를 향한 오마주라고 할까. 남경민의 그림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현지를 돌아보는 대신, 자신의 작업실에서 대가를 만난다. 미술사를 통해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이 그녀의 길잡이가 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면서 대가의 작업실은 캔버스에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술사에서 불러낸 대가들의 공간과 작가가 속한 작업실 공간을 한 화면 속에 편집하면서 미술사적 사실과 작가의 현실 인식이 뒤엉키는 것이다.
프리다의 작업실, 캔버스에 유채, 97×145cm, 2004

렘브란트 침실, 리넨에 유채, 150×227cm, 2009
그렇다고 작가가 그림에 직접 등장하진 않는다. 다만 그녀는 캔버스에 대가의 작업실을 엿보는 앵글과 상황을 연출하거나, 자신의 분신인 나비를 대가의 작업실로 보낸다. 그림에 등장하는 나비에는 대가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그들과 대화하고 싶은 작가의 염원이 반영돼 있다. 나비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작가의 바람을 실현한다. 대가들 역시 빈 의자에 환영처럼 나풀거리는 나비로 대체된다. 말하자면 나비는 작가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대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나비는 시공간을, 현실과 비현실을, 실재와 상상력을 넘나들면서 작가와 대가를 만나게 하는 뮤즈의 전령과 같다.
그래서 남경민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친근한 것은 누구나 알 만한 대가들의 사물이 등장해서고, 낯선 이유는 그렇게 알 만한 사물을 배치하고 배열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아서다. 작가는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물과 작품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지만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낯설다. 시공간이, 현실과 비현실이, 실재와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에 편집되고 재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을 재확인시키는 대신, 그림 속 현실이 어긋나도록 한다.
작가의 그림에는 각종 상징적 오브제가 등장한다. 대개 대가들의 그림에 실제로 등장한 오브제로, 빈 의자에 비현실적으로 나풀거리는 나비와 함께 대가의 또 다른 영혼이자 인격이며 분신이다. 예를 들면 프리다 칼로의 작업실에 등장하는 새장에 갇힌 새와 휠체어 그리고 화살에 찔려 피를 흘리는 사슴은 칼로의 신체적 장애가 만든 트라우마와 자의식이 키운 예술을 상징한다. 그리고 반 고흐의 방 한쪽에 놓인 빈 병 속의 날개는 살아생전 결코 빛을 보지 못하고 요절한 천재의 욕망과 좌절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해골은 삶의 무상함을, 시든 백합은 순결의 무상함을, 꺼진 촛불은 진리의 무상함을, 그리고 모래시계는 무상한 삶의 시간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무상함은 바로크 미술에서 유행한 감정이지만, 당시 그림을 그린 대가나 현재 시점에서 그림을 재해석해 그린 남경민 작가의 감정일 수도 있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했음에도 정작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그림 속 의미처럼 남경민이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 연작은 무상함 그 자체가 주제다. 어쩌면 삶도, 예술도 무상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가의 작업실은 무상함을 생산하는 ‘공장’이 된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글 고충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