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제품 사이
작가가 상업 디자인에 참여하는 건 어떤 경험일까? 아티스트와 브랜드의 제품 컬래버레이션이 활발한 요즘, 아티스트들이 커머셜 디자인에 참여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15년 작품 ‘Big Dipper’를 활용해 디자인한 티셔츠
니 요위
지난해에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당시 우주와 관련된 작품이 많았다. ‘Blackbridge’ 역시 바로크와 펑크록이 만난 독특한 이미지의 브랜드라 내 작업 스타일과 잘 맞을 것 같아서 티셔츠 디자인을 협업했다. 사실 내 작업을 상업적으로 연계한다는 점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이 내가 디자인한 티셔츠를 개성 있게 입은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멘디니가 디자인한 삼성전자 기어 S2
알레산드로 멘디니
일룸, SPC그룹, 삼성전자, 포스코, 롯데백화점 등 여러 유명한 한국 기업과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했다. 각 프로젝트는 브랜드에 맞게 개별적 분석과 접근이 필요한데, 기능이 훌륭하고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멘디니 스타일’이 분명하게 눈에 띄도록 디자인하는 데 중점을 뒀다. 한국 브랜드와 함께하는 작업은 전문적이면서도 유대감이 형성되고 서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어 항상 만족감을 느낀다.
포드 전시장의 외관을 둘러싼 패브릭 작품
한성필
오존층 보호의 날을 맞아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로고 디자인 작업을 했다. 네이버의 후원으로 남극에서 사진과 비디오 작업을 하고, 그것을 로고와 함께 선보이는 환경 캠페인이었다. 또 포드 코리아와 협업해 링컨(Lincoln) 전시장 건물 전체를 거대한 가림막 작품으로 덮은 경험도 있다. 도산대로에 자리한 건물을 유럽 소도시의 시골 장터 같은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네이버와 포드 코리아 모두 내 작업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기업 CI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향을 제시했다. 적잖은 자본과 행정적 업무가 수반되는 일이었지만 작업에 몰두해 프로젝트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작가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작업이었다.
공시네 작가의 작품을 담은 신세계백화점의 소이 캔들
공시네
작가와 브랜드가 만나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컬래버레이션 작업이다. 이때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면서 상품화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면, 그것을 수평적 구도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브랜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디자인 제품을 통해 순수 미술 관람객과는 또 다른 소비층이 형성될 수 있다. 나는 기존 작품의 이미지를 이용해 새롭게 디자인한 제품이 탄생한다는 점이 흥미로워 신세계백화점의 소이 캔들 제작, GS건설의 2016년 달력 제작에 함께했다. ‘대상-화음-흐름’이 어떻게 건강하게 순환되는지 공부하는 계기가 됐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미술을 통해 느끼는 ‘행복’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숙제를 떠안은 것 같기도 하다.
자수 디자인이 돋보이는 ‘CAVE Basement’의 모자
노상호
평소 모자를 즐겨 쓰는데 기회가 닿아 ‘CAVE Basement’의 모자를 디자인했다. 모자에 자수를 놓는 작업이었다. 모자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보이길 원했다. 모자 뒤쪽에는 내가 주로 사용하는 색으로 브랜드 로고를 작업해 브랜드와 내 정체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보통 협업은 작가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함께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아 마치 ‘갑을 관계’처럼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이번 작업은 브랜드에서 내 작업을 깊이 이해해줬다. 한편으로는 작품이 상품으로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유통 과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2015년 겨울,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의 에르메스 쇼윈도 디스플레이
잭슨 홍
에르메스의 제안으로 쇼윈도 디스플레이 작업을 해왔다. 잘 모르는 분야지만 흥미를 느껴 시작했다.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늘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편이라, 내 작업과 큰 관련은 없는 편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일정한 정보량을 전달하는 작업이므로 공간과 소재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얻는 것이 많다. 덤으로 불면증과 두통도 얻었다.
구글 홈페이지 배경 화면으로 사용한 권기수 작가의 작품
권기수
미술계는 여전히 대중과의 거리를 많이 좁히지 못하고 있다. 기업과 협업하는 것이 그 거리를 좁히며 미술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상업 디자인에 종종 참여하고 있다. 구글, 다음,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와 여러 번 협업했고 현대백화점, 하나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대만 현대미술관 등 다양한 기업은 물론 미술관과도 함께 작업했다. 내가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제공하면 기업에서 디자인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 과정에서 작품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활용하는 작품 이미지가 브랜드에 종속된 디자인으로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이 부분에 대해 기업과 깊이 있게 논의한다. 작품의 가치를 명확히 드러내야 브랜드의 가치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코오롱스포츠 강남 플래그십 스토어의 실내 디자인에 사용한 작품
에디 강(강석현)
코오롱스포츠와 진행한 협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강남 플래그십 스토어에 작품을 설치했다. 기존 작업의 특징인 캐릭터 형태를 배제하고, 매장에 전시한 여러 아이템을 이용해 시각 디자인에 가까운 패턴화한 작품을 만들었다. 밝고 진취적인 에너지를 추구하는 기업 철학을 최대한 반영한 것. 상업적 디자인을 할 때는 아티스트의 색을 조금 감추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좀 더 고려하면 보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우환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으로 디자인한 샤토 무통 로트칠드 2013년 빈티지 라벨
이우환
그동안 몇몇 와이너리의 라벨을 그릴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위대한 화가들의 오리지널 작품으로 아트 라벨을 만드는 샤토 무통 로트칠드와 작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드디어 기회가 와서 기쁘게 2013년 빈티지의 라벨을 그렸다. 최근엔 주로 회색을 사용해 작업했지만 와인과 가까운 색을 표현하기 위해 고귀한 자줏빛을 선택했다. 완성하고 나니 점차 깊이 있게 변화하는 톤이 와인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샤토 무통 로트칠드 2013년 빈티지가 다양한 풍미와 뛰어난 보디를 지닌 맛있는 와인이라 특히 마음에 든다. 재료에 인간의 지혜를 더해 혼을 울리는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예술이나 와인이나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모두 위대한 작품이다.
팝아티스트 마리 킴이 캐릭터를 디자인한 페리스 틴트
마리 킴
페리페라 색조 화장품과 5년째 컬래버레이션을 해왔다. 시작부터 궁합이 좋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는 점은 없고, 대중적 취향에 맞추려는 타협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소비자가 단순한 화장품 패키지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브랜드의 밝고 화사한 이미지와 내 작품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일반적 미술 관람객보다 상대적으로 어린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상업 디자인과 대중적 인지도를 통한 성공 가능성을 알게 됐다.
이승환 10집 앨범 < Dreamizer > 커버로 사용한 만화 같은 느낌의 부조 작품
김민경
‘이승환’이라는 이름만으로 기쁘게 수락한 작업이다. 10집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고, 토끼 가면을 쓴 캐릭터가 그의 퍼포먼스와 잘 어울렸다. 이승환 씨도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예술 작업에 대한 이해가 깊어 내가 소신껏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작가로서 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