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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웃고 싶은 그런 오후

LIFESTYLE

긍정의 에너지란 나이와 상관이 없음을 다시금 일깨운 마쓰야마 발레단 단장이자 프리마 발레리나 모리시타 요코. 여전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무대에 오르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주 앉은 상대도 ‘내 눈빛도 어느새 그녀처럼 따스해지고 있구나’ 느끼게 된다. 입술을 포갠 채 입꼬리를 올려 가만히 미소 짓는 그녀를 8월의 오후, 햇볕이 나지막이 드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지난 8월 6일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시민 6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의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였다. 버섯구름은 상공 18km까지 치솟았고, 건물의 90%가 파괴되었으며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자와 거의 맞먹는 수의 사람이 연이어 사망했다.
폭탄이 터진 그날 모리시타 요코의 할아버지도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 즐비한 시체 옆에는 한 여인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누워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피폭으로 전신에 화상을 입은 모리시타 요코의 할머니였다.
‘일본이 낳은 불세출의 발레리나’, ‘동양의 진주’, ‘발레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모리시타 요코(Yoko Morishita)를 말하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발레를 통해 꿈꾸는 세계 평화도 모두 할머니에게 배워 쌓은 가치고 목표다.
“벌써 71년이 된 일이네요.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인류에게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죠. 할머니는 그 일로 얼굴과 팔다리에 화상을 입고 평생 큰 흉터를 안고 사셨지만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계셨어요.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절 키워주시면서 언제나 환하게 웃고 삶에 감사하셨죠. 전쟁을 통해, 아니 할머니를 통해 전 살아 있는 것 자체의 가치와 기쁨, 감사함을 배웠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해요.”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불평 한번 하지 않은 할머니는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해선 안 된다는 것 또한 가르쳤다. 모리시타 요코가 발레단을 이끌며 각 나라의 무대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공연을 펼치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다. “이 나이가 되도록 현역 발레리나로 무대에 오른다는 건 저 혼자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올해 예순여덟 살이 되었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제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발레를 통해 나누는 삶, 세계 평화를 위한 공연을 하고 싶어요.”

초등학교 시절 히로시마 강변에서 포즈를 취한 모리시타 요코

1978년 스타 오브 월드 발레에서 테츠타로 시미즈, 모리시타 요코, 마고트 폰테인

모리시타 요코는 세 살 때인 1951년 처음 발레를 시작한 이후 1974년 불가리아에서 열린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일본인 최초로 금상을 수상하며 당시 발레계에 이변을 일으켰다. 한국의 한 무용 평론가는 당시 그 일을 두고 ‘기적과 같다’고 평가했을 정도. “사실 상을 탄 것 자체가 저에게 엄청난 일은 아니었어요. 수상했다는 기쁨보다는 일본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유럽인의 의식을 변하게 한 것이 기뻤죠.” 콩쿠르에 나가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넌 금메달”이라는 말에 심적 압박감을 느꼈지만, 정작 해외 콩쿠르 경험이 별로 없던 그녀는 ‘외국의 발레리나들은 어떻게 춤추는지 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콩쿠르였다. 그런데 금메달까지 수상했으니 오매불망 금메달만 바라던 다른 학생들보다 메달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된다. 그 후 그녀는 1년간 문부청 재외 연수생으로 모나코로 유학을 떠났고, 1976년 러시아 발레를 서유럽에 전한 무용가이자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와의 첫 공연을 계기로 1977년에는 런던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 25주년 기념 공연 무대에 함께 오르며 일본 발레의 파워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어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 공연에 출연했고, 1984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100주년 기념 퍼포먼스에 출연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2001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마쓰야마 발레단 단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여전히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지난 2011년 데뷔 60주년을 맞은 그녀는 발레를 시작했을 당시 몸이 허약했다.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부모는 영양실조와 결핵 등 병마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녀도 소아 결핵 등의 질병을 가진 채 태어났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발레를 시작했지만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그녀는 배우는 속도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뎠다. 그래도 한 번도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다고. 처음 발레를 만났을 때부터 발레가 운명처럼 다가왔고, 당연히 발레리나가 될 거라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 “같은 발레 클래스에는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넌 왜 남들에 비해 못하니’라고 하지 않고 늘 칭찬만 해주셨죠. 재능이 부족해도 열심히 하다 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요.”
발레를 시작한 후 그녀가 거친 수와 미치코, 다치바나 아키코 그리고 마쓰아먀 발레단 창립자 마쓰야마 미키코 선생님은 모두 굉장히 엄한 스타일이었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발레를 배울 땐 선생님이 봉을 들고 때릴 정도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죠. 멍 때문에 약을 발라야 했으니까요. 아마 지금 같으면 일본 교육청에 신고가 들어갈 거예요.(웃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방학 때마다 도쿄에 있는 다치바나 발레단 부설 발레교실에 다녔다. 그곳의 선생님도 엄하긴 매한가지. “제가 배운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발레의 기술적 부분보다는 사람 사이에 관계 맺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 같아요. 미키코 마쓰야마(지금 그녀의 시어머니) 선생님도 제가 스무살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발레 스킬을 가르쳐주셨죠.”
콩쿠르 수상 이후 영국 로열 발레단,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 등에 게스트로 초청되어 200회 가까이 함께 호흡을 맞춘 파트너 루돌프 누레예프도 스승만큼 많은 것을 그녀에게 남겼다. “그분만큼 발레를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마음이 크고 따뜻한 분이셨죠. 무용수로서도, 인간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분이에요. 특히 저에게 어떤 조언을 할 때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하고 늘 먼저 물으셨어요. 그분의 그런 습관은 정말 존경스러운 면이죠.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1978년 스타 오브 월드 발레에서 테츠타로 시미즈, 모리시타 요코, 마고트 폰테인

열두 살의 나이로 데뷔하던 당시 모습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25주년 기념 특별 공연이 끝난 후 여왕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파리 오페라 발레단,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등 전 세계 발레단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활약을 펼치는 그녀를 위해 1981년에는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가 작품 <빛>을 안무하기도 했다. 모리스 베자르는 무용가로는 이례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작품에 담아 20세기 발레의 혁명가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세계 무용계의 스타 안무가. “멕시코의 갈라 페스티벌에서 모리스 베자르를 만났어요. 무용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고, 제 남편 시미즈 테츠타로(마쓰야마 발레단 감독)도 그 자리에 있었죠. 그때 누군가 모리스에게 “요코를 위해 꼭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권했어요. 모리스의 작품은 늘 남자가 주역이었지만, 그때 저를 위해 여자의 굴곡진 인생을 그린 작품을 만들었죠. 무대에 서는 내내 제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아마 모리스도 모를 거예요.” 이쯤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국제 콩쿠르 입상으로 유럽 발레계에서 인정받았는데, 왜 해외의 유명 발레단에 입단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왔을까? “당시에 그런 권유를 많이 받긴 했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며 가끔 일본에 가서 공연하면 어떻겠느냐고요. 그런데 저는 일본인이에요. 국산품이잖아요.(웃음) 그래서 이곳에서 활동하며 일본인에게 발레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발레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1971년부터 지금까지 마쓰야마 발레단에서 활동하며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지젤>, <코펠리아>, <신데렐라>, <돈키호테>,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주요 레퍼토리의 주역을 맡았지만 마쓰야마 발레단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건 중국의 유명한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흰머리 여인>을 통해서다. 마쓰야마 발레단 창립자이자 모리시타 요코의 시어머니인 미키코 마쓰야마가 안무한 작품으로 1955년 도쿄에서 초연했다. 내용은 빈농의 딸이 아버지의 빚 때문에 기생으로 팔려가지만, 탈출한 뒤 마을 사람들이 악덕 지주로부터 해방되도록 돕는다는 이야기. 혁명적인 스토리의 <흰머리 여인>은 1958년 중국에 초청돼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공연 이후 일본을 방문한 중국 고위 관리들이 마쓰야마 발레단에 들르는 게 관례가 됐을 정도로 이 공연은 국교 개선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술가는 정치인이 아니지만 국가 간 친선 도모를 위해 이렇듯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2011년, 모리시타 요코는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남편 시미즈가 새롭게 안무한 <흰머리 여인>을 도쿄와 베이징, 상하이에서 다시 공연하며 또 한 번 중국 관객에게 감동을 안겼다.
모리시타 요코가 공연만큼 공을 들이는 것은 후학 양성이다. 마쓰야마 발레단에서 함께 운영하는 마쓰야마 발레학교에서는 차세대 무용수를 양성하기 위해 전문 무용수들이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제가 배운 스파르타식 교육은 통하지 않아요. 대신 선생님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에 항상 제가 먼저 노력하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발레 스킬만큼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사. “가장 기본적인 ‘안녕하세요’부터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 소리로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모습이 요즘 아이들에겐 부족해요. 저는 학생들에게 인사부터 철두철미하게 가르칩니다. 기본적 매너를 갖추지 않은 무용수는 무대 안팎에서 언제든 티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현역 발레리나로서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이 마흔을 넘고 예순이 지나면서 공연 횟수가 예전에 비해 조금씩 줄어든 것이 사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해외 공연일 뿐, 국내 공연은 여전히 빽빽하다. “체력이 떨어졌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오히려 반대예요. 특히 공연 스케줄이 잡혔을 땐 아플 수가 없어요. 제 몸 상태를 하나하나 계산하면서 컨디션을 스케줄에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침 7시에 일어나 워밍업을 한 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늘 연습에 몰두하는 그녀는 인터뷰 전에도 연습을 하고 왔다고 했다. “보통 하루에 5~6시간씩 연습합니다. 그 정도 연습하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거든요.”
그녀는 앞으로 정확히 언제까지 춤을 추겠다고 목표를 정하진 않았다. 오래도록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 그래서 그녀에겐 매일이 새로운 도전의 날이다. 그 도전을 끝내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오늘 저녁에도 그녀는 새내기 무용수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할 것이다. “아, 아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에디터 |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 김잔듸(인물) 장소협조 | 호시노야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