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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 문화를 입다

LIFESTYLE

대구 북성로와 경상감영길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많은 적산가옥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이한 점은 건물을 방치하거나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문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성로 재생 사업 1호로 꼽히는 삼덕상회

‘예술의 도시’, ‘미식의 도시’ 등 대구를 설명하는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이 도시는 최근 또 하나의 별명을 얻었다. 바로 ‘근대화 도시’다. 그 중심에는 도시 재생 사업에 관심을 가진 지역 문화인들에 의해 새생명을 얻은 적산가옥이 있다. 2011년, 북성로 한가운데에 문을 연 카페 삼덕상회가 일찍이 그 변화를 예고했다. 1930년대에 지은 일본식 2층 건물을 레노베이션해 북성로 재생 사업의 첫 사례로 꼽히는 카페 삼덕상회는 서양화가 천광호를 비롯한 대구의 문화 예술인이 소속된 사단법인 ‘시간과공간연구소’에서 만든 복합 문화 공간이다. 카페 전체가 화이트 큐브라는 점이 이곳의 특징. 뒤뜰로 향하는 복도에 그림을 전시하는 한편, 2층 계단 난간에서는 박은희 작가의 설치 작품 ‘빨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대표인 천광호 작가에 따르면 삼덕상회는 지난 4년간 신진 작가를 꾸준히 소개해왔으나 작품 설치로 인한 건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미술 전시 외에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 중이라고. 9월 중 열릴 음악회 겸 시화전 〈시와 음악 북성로에 내리다〉를 시작으로 액자를 배제한 소품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건축가, 화가, 디자인 관련 학과 교수 등으로 구성된 믹스카페협동조합의 김헌동 대표가 운영하는 믹스카페는 3개의 필지가 한 공간을 이뤄 역사와 문화가 혼재한 매력이 돋보인다. 안뜰 왼편에 위치한 2층 다다미방은 반드시 가보길 권한다. 손때 묻은 목재 테이블과 빈티지한 찻잔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100년 전 과거를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믹스카페에서 도보로 3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소금창고 역시 믹스카페 김헌동 대표가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소금 창고와 사무실로 쓰인 건물 두 채를 각각 다른 목적으로 분리했다. 김헌동 대표는 사무실 겸 인부들의 휴식처로 사용하던 건물 1층을 북성로 명물인 석쇠 불고기를 즐길 수 있는 식당으로 탈바꿈시켰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소금 창고에는 공연과 더불어 맥주, 보드카를 즐길 수 있는 펍이 들어설 예정. 이곳은 9월 중 아코디어니스트 홍기쁨과 피아니스트 김태헌 등이 참가하는 공연을 앞두고 있다.

레노베이션의 묘미를 보여주는 믹스카페의 다다미방

9월 중순 오픈 예정인 소금창고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적산가옥을 논할 때 근대사를 알고 나면 더욱 뜻깊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1920년대에 지은 경일은행 산하 2층 목조 건물을 레노베이션해 작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자료 외에도 1층에 마련한 지하 벙커 전시관에서 미디어 아트 작가 리우와 한국화 작가 황성원이 협업한 설치 작품을 볼 수 있다.

264작은문학관

재즈바를 갖춘 한옥 게스트하우스 판

264작은문학관은 1930년대에 지은 적산가옥을 뼈대만 남기고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 5월에 개관했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이육사 시인의 생애를 오롯이 담아냈다. 20년간 자료를 수집해온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박현수 교수가 설립을 주도한 문학관은 홍차와 간단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카페와 특별 전시관이 자리한 1층, 포토 존과 기획 전시관이 있는 2층으로 나뉜다. 입구 바로 왼쪽에 위치한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20m² 남짓한 기획 전시관은 신발을 벗어야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관람객이 좀 더 오랫동안 머무르며 이육사 시인을 살펴보길 바라는 박현수 교수가 생각해낸 일종의 전략. 기획 전시관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과 맞은편에 있는 책이 전부다. 특이하게 문학관이나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명문이 없다. 대신 입구에서 주는 손바닥만 한 책이 도슨트 역할을 하는데, 전시물 하단에 적힌 페이지를 책에서 찾으면 된다. 1층에서 주문한 음료수를 마시며 푹신한 카펫 위에 앉아 시를 읽기도 하고 이육사 시인에 얽힌 역사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스트하우스 판은 음악과 만났다. 1958년에 지은 근대 한옥과 1905년에 지은 도기점 창고 건물이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다. 이 중 도기점 창고는 층고가 높은 특징을 살려 재즈 바 겸 펍으로 다시 태어났다. 매일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재즈 공연에서는 와인, 맥주와 더불어 손미숙 대표가 직접 장을 본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를 만날 수 있다. 2층의 다다미방에 앉아 와인과 함께 가을밤의 재즈를 만끽해보는 것도 좋겠다.

100년 된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 겸 갤러리, 카페 골목

카페 골목에서 볼 수 있는 이태호 작가의 선인장 작품

북성로 근처의 향촌동은 1960년대에 번화가이자 수제화 거리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치솟는 임대료를 이기지 못한 상인들이 떠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목공예 작가이자 문화재 복원가로 활동 중인 차정보 작가는 쇠퇴한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카페 골목을 열었다. 인근의 적산가옥에서 가져온 낡은 목재를 덧댄 서까래부터 직접 심은 강아지풀까지 차정보 작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1층 카페에서는 경북 청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도예가 아키야마 준의 작품과 선인장 모티브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 이태호 작가의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가을이 오면 억새 핀 마당에서 작은 클래식 공연도 열 예정이다. 차정보 작가는 적산가옥의 변신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적산가옥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대구처럼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드물어요. 적산가옥을 그저 과거의 상처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키고 가꿔야 할 문화재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개성을 살린 멋진 공간이 더욱 많이 등장하지 않을까요?”

에디터 | 박현정(프리랜서)
사진제공 |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