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계속된다
6월 국내 런칭을 앞둔 프랑스 슈즈 브랜드 로저 비비에. 파리 포부르생토노레 29번지에 자리한 로저 비비에의 플래그십 스토어 2층, ‘로저’라는 이름의 거대한 코끼리 인형이 놓인 로저 비비에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이너 브루노 프리소니를 만났다.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완성해주는 스틸레토 힐을 창조한 주인공이자 독특한 라인을 넣은 뒷굽이 인상적인 콤마 힐과 네모난 실버 버클을 장식한 필그림 등의 아이코닉 슈즈를 탄생시킨 슈즈 디자이너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구두를 ‘조각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가 만든 슈즈는 대관식 당일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해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카트린 드뇌브를 포함한 수많은 셀레브러티의 발걸음과 함께해왔다. 그만큼 패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거장의 뒤를 이어 로저 비비에의 명성을 이어갈 새로운 디자이너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높았을 터. 로저 비비에의 빈자리를 채울 인물로서 영광스러움과 함께 부담감을 느꼈을 법도 한데, 브루노 프리소니(Bruno Frisoni)는 2003년 로저 비비에의 역사를 이어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조인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로저 비비에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제게 끝없이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는 화수분과 같아요.” 마주 앉은 사람까지 유쾌하게 해주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브루노 프리소니. 쿠튀르 슈즈의 대명사 르네 만치니(Rene´ Mancini)를 비롯해 랑방, 크리스찬 라크르와 오트 쿠튀르 등을 거치며 최고의 슈즈와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인정받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런칭한 것은 1999년. 그가 만든 슈즈는 여성스러우면서 모던하고 위트 있는 디자인에 특유의 우아함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로저 비비에는 물론 본인의 시그너처 브랜드 브루노 프리소니를 이끌고 있는 그의 창의력이 녹아든 슈즈가 패셔니스타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이탈리아의 재단사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패션에 대한 열정을 슈즈와 액세서리에 투영해내며, 생 로랑의 시그너처 룩인 ‘뉴룩’을 위한 슈즈를 제작한 로저 비비에가 보여준 패션에 대한 남다른 열정에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공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이너니까.
1 파리 스튜디오 내에 걸린 2014년 F/W 컬렉션 디자인 작업을 위한 일러스트 보드 2 2014년 버전 필그림 스틸레토 힐 스케치 3 로저 비비에 2014년 F/W 컬렉션의 콤마 힐 슈즈와 핸드백
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기 전 이미 수많은 디자이너와 함께 화려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11년째 이어지고 있는 로저 비비에와 당신의 동행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로저 비비에는 훌륭한 품성과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풍부한 헤리티지를 보유한 유서 깊은 브랜드 로저 비비에의 아트 디렉팅을 책임진다는 건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죠. 로저 비비에가 남긴 위대한 유산 속에 담긴 그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것을 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도전입니다. ‘오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저와 로저 비비에가 이어온 관계 속에 켜켜이 쌓인 힘을 믿습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함께 꿈꿀 수 있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이니까요.
로저 비비에가 살아 있던 시절과 당신이 이끄는 지금 로저 비비에는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나요?
로저 비비에의 방대한 유산을 앞에 두고 기존의 특정 모델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 적은 없습니다. 로저 비비에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콤마 힐도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후 몇 해를 보내고 나서야 새롭게 런칭했으니까요. 브랜드 고유의 DNA와 만난 제 디자인 철학은 변화가 아닌 일종의 진화를 가져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설명일 것 같습니다. 로저 비비에 생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액세서리 컬렉션을 런칭해 슈즈가 아닌 오브제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진화가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이죠.
지난 파리 패션 위크 기간에 소개한, 독특한 컬러와 다양한 소재가 인상적인 컬렉션은 중앙아시아를 테마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딱 하나를 꼬집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영감은 이성보다 감성에 직결된 문제니까요. 제가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은 매우 즉흥적입니다. 기억 속에 남은 이미지, 박물관, 여행 중 마주한 풍경이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가끔은 우연히 손에 쥔 책 한 권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중앙아시아가 바로 그런 경우죠.
“남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여성에게는 2가지 선택권이 주어진다. 하이힐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라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의 매력’이 궁금합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나요?(웃음) 여자에게 국한된 얘기는 아니고, 한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옷차림이 아니라 애티튜드입니다. 하지만 특정 스타일이 그 애티튜드에 일종의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투영해낼 수 있는 스타일에 대한 이해도와 고유의 매력을 발산할 확률은 정비례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고유의 매력을 발산할 확률’과 슈즈의 관계는 어떨까요?
설마 지금 신고 있는 슈즈가 본인의 매력과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웃음) 관능적인 스틸레토 슈즈는 가벼운 손길 혹은 의미심장한 눈빛만큼이나 매혹적인 오브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매력적인 슈즈를 묘사해주실 수 있나요?
단 하나의 매력적인 슈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 참석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슈즈는 날씨에도 영향을 받으니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장화를 가장 이상적인 슈즈로 꼽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로저 비비에 장화는 아직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웃음) 예를 들어 칵테일파티에 초대받았다면 다리 라인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줄 섹시한 힐, 로저 비비에 컬렉션 중에서는 콤마 힐이 최고의 선택이 되겠죠. 하지만 슈즈나 액세서리 하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아름다운 슈즈가 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해줄 순 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옷과 슈즈 그리고 백을 포함한 다양한 패션 아이템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에디터 유은정 (ejyoo@noblesse.com)
현지 취재 배우리(파리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