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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點)과 나

LIFESTYLE

점을 그리면 그릴수록 점점 형태는 또렷해지지만, 점을 그리면 그릴수록 점점 ‘나’는 사라진다. 권순익의 점은 무아(無我)다.

검은 기왓장에 흑연을 칠한 작품 ‘무아-심경’ 앞에 선 권순익 작가

권순익 작가를 두고 “구도(構圖)로 구도(求道)하는 화가”라는 말을 한다. 스스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조형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그의 손끝을 통하면 세상의 어떤 복잡한 것도 다 점 하나로 귀결된다. 단순한 점의 반복과 나열이라고 쉽게 볼 건 아니다. 도예가인 동시에 회화 작가이기도 한 권순익의 이력이 말해주듯, 평평한 캔버스에 찍은 점의 향연은 부조에 가까울 만큼 ‘조각된’ 것이다. 한마디로 허튼 점이 하나도 없다. 장인이 도자기를 빚듯 섬세한 손끝에서 나왔다. 인고의 시간 끝에 나온 점이다. 캔버스에 무수한 점을 찍고, 그 위에 고운 모래를 물감에 이긴 재료로 점을 얹고, 또 그 위에 연필심 소재인 흑연으로 점을 칠하고 문지르기를 무한 반복한다. 평평한 대지 위에 오롯한 ‘점(點) 산’ 하나를 쌓기까지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도 걸린다. 시간을 이겨낸 점, 점, 점들. 일종의 묵언수행과 같다. 작업을 통해 작가는 점점 자신을 잊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한다. “점을 찍는 행위는 제게 일종의 수행과도 같습니다. 토속적으로 접근하면, 다복을 기원하는 의식 같은 것이기도 하죠.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머릿속의 온갖 생각이 사라지고 심연에 빠져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 작업은 되레 구상 단계가 더 복잡하고 치열합니다. 구상을 끝내고 그것을 캔버스로 옮길 때는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지고 내면의 복잡한 소음이 일제히 침잠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아를 통해 비로소 자아를 깨달았고, 그 근본적 자아를 점으로 형상화한 것. 나를 둘러싼 온갖 겉치레를 다 걷어내고 무아에 가까워지면 비로소 진정한 내가 보인다는 의미이리라.
그렇게 심연에 빠져든 무아지경의 점을 표현하는 소재로 그가 선택한 것은 흑연이다. 흑연은 점과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두껍게 덧칠한 흑연은 짙은 검은색을 띠지만, 작품을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을 뿜어낸다. 한없이 깊은 검은색은 대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검은 기왓장에 반복적으로 흑연을 덧칠한 그의 설치미술 작품 ‘무아-심경(心鏡, Mind Mirror)’ 앞에 서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꾸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찾고 싶은 마음이 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권순익 작가가 작품에 흑연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스페인 알리칸테 지방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다. “당시 ‘지금’,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놓고 작품 활동을 해나가고 싶었습니다. 그 화두를 잡고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까? 오늘의 나는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인가?’라고 했을 때, 문득 ‘끊임없이 무언가를 비벼나가는 사람이다. 그것이 나의 지금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무언가를 비벼나가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다 떠오른 소재가 흑연이에요. 회화의 기본 단계가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작품 구상 단계에서도 연필로 메모를 하잖아요. 끊임없이 나아가는 ‘지금’의 구체적인 행위로 흑연을 계속 덧칠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 거죠.” 그의 작품에 동양적 숨결을 불어넣는 흑연, 그것을 최초로 시도한 것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라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먼저 ‘동양적 요소가 짙게 밴 서양 화가’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아프리카와 우루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의 남미 지역에서 전시회를 열며 한국 고유의 색채를 담아내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지금도 전시 기획자로 활동 중인 아내와 함께 국내외를 여행하며 다양한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영감을 얻고 그것을 구체적인 창작물로 풀어낸 작품을 내놓기까지, 당연히 작가로서 고충도 존재할 법하다. 그런데 굵고 묵직한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 안팎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말하는 권순익 작가는 그 또한 달관한 듯하다. 작가로서 받는 스트레스에 대해 묻자 내놓은 그의 대답이 기막히다. “세상에서 제일 스트레스 안 받는 직업이 아마 미술가라죠? 대개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타의든 자의든 못할 때가 많은데, 작가들은 그런 게 없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작품을 통해 다 해버리거든요. 설령 그 메시지가 좀 황당하고 이상하다 해도 그것이 또 작품을 통해 이해되기도 하니까요. 하하.”
30여 년 동안 자아를 찾다 찾다 무아의 경지를 캔버스에 옮긴 작가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오롯이 작품에 담고 있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내 안의 것을 표출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내 작업의 독창성을 만들어낸다.” 그의 전시 도록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갤러리 아트소향에 전시한 권순익 작가의 작품

권순익 개인전
흑연의 독특한 질감으로 무수히 반복해 찍은 점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 우리 마음도 이렇게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그 본질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원형의 점으로 표현, 캔버스에 무아의 경지를 담아내는 작가 권순익. 그의 대규모 개인전이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적 색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그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부산 센텀에 자리한 갤러리 아트소향에서 만날 수 있다.

기간 4월 21일~6월 4일 장소 갤러리 아트소향(부산시 해운대구 센텀중앙로 55 동서대학교 센텀산학 캠퍼스 지하 1층, 051-747-0715)

에디터 | 손지혜(프리랜서)
사진 | 옥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