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재즈 보컬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은 당신의 기분 좋은 흥얼거림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정직하게 부른다.

“I am a fool to want you.” 대학 시절 록 밴드 리드 보컬로 활동하던 웅산은 어느 날 친구가 준 녹음테이프에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목소리를 들었다. “듣는 순간 저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인생의 전부 같던 록 대신 재즈를 택한 뒤 웅산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 나섰다. 스스로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10대 때처럼, 만만치 않은 시행착오와 우연, 오디션을 거쳐 1996년 1월 홍대 써티(Thirty) 클럽에 재즈 보컬리스트로 처음 발을 들였고, 25년이 흐른 지금 웅산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구사하는 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가요와 발라드, 블루스, 록, 솔, 라틴, 팝이 그녀를 만나면 재즈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노래가 말해준다.

웅산의 새 앨범 <사랑 그 그리움>. 이목을 작가가 그린 재킷 그림을 보고 제목을 정했다.
재즈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그녀의 앨범은 오디오 마니아도 즐겨 찾는다. 2003년 첫 앨범도 세계적 피아니스트 베니 그린(Benny Green)이 연주했을 만큼, 작은 싱글 앨범이라도 국내외 재즈 신의 실력 있는 스태프와 유명 스튜디오를 찾아 완성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올여름 <사랑 그 그리움>이라는 14번째 앨범을 냈다. 유명 아이돌조차 불확실한 음악 시장을 걱정해 한 곡씩 짧은 온라인 음원 출시를 선호하는 요즘, 웅산은 정규 앨범이 아닌데도 자작곡과 리메이크곡을 합쳐 열두 곡의 플레이 리스트를 꽉 채웠다.
첫 곡은 래퍼 MC 스나이퍼가 피처링한 ‘헤어진 다음 날’. 웅산이 가수 이현우의 원곡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웬만한 남성보다 낮고 파워풀한 보컬 테크닉을 구사하던 재즈 디바의 목소리가 아니다. “전, 음반으로 전하고 싶은 온기와 라이브 무대에서 전하고 싶은 온기가 따로 있어요. 이번 앨범은 처음 들으면 조금은 심심하다 여길 수도 있을 거예요. 일부러 편하게 들리는 곡을 모았거든요. 받을 때 기분 좋은 선물처럼 느꼈으면 해서 스페셜 기프트 앨범이라는 이름도 따로 붙였죠.”

201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룹 ‘포플레이’ 출신의 리 릿나워와 협연했다.
웅산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통해 위안받길 원한다. 목소리에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쁘다. “활동 초기에는 지르고 싶은 대로 감정을 마구 표현했는데, 3집 <예스터데이>(2008) 이후로는 다 토해내고 울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창법이 편해졌어요. 오래하기로 마음먹은 뒤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서른 살부터 술을 끊었는데, 덕분에 음역대도 훨씬 넓어지고 라이브 무대에도 편하게 설 만큼 체력이 좋아졌답니다.”
어떤 장르든 힘을 빼는 것이 더 힘든 법. 특히 이번 앨범은 어쩌면 그녀에게는 부르기 쉬울 법한 영어 가사가 들리지 않는다. 모두 한국어로만 부른다. 자작곡 ‘예스터데이(Yesterday)’도 ‘파란 새벽’이란 새 제목을 입혔고, 가사도 영어에서 한국어로 다시 썼다. 밤새 일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저나 재즈에 대해 잘 모르던 분들도 대중가요를 재즈로, 또 웅산답게 표현할 때 관심을 갖고 더 좋아해주셨어요. 한편으로는 주로 외국 곡을 접해온 재즈 마니아에게 한국어로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걸 들려주고 싶었어요.”

2017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록우드 뮤직홀 스테이지2에서 펼친 콘서트.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연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도 음악적 정체성에 대해 2%쯤 부족함을 느끼곤 했다. 다른 나라 관객들이 그저 동양인이 재즈를 잘한다는 정도로 반응하는 것보다는 ‘한국 재즈’라고 직관적으로 느끼길 바란다. “현재 인도 음악이 각국의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미치듯, 국악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판소리에 시나위는 100% 즉흥연주예요. 그게 재즈거든요. 창의 애드리브를 재즈에 구현해도 좋겠죠.” ‘K-재즈’를 고민하며 얼마 전 박사과정에 등록했고, 정식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밤, 탄천을 따라 10km씩 걸으며 훈련하는 다른 음색은 내년 이맘때 새 앨범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전에 없던 국악과 재즈의 접목, 앨범 전곡 작사·작곡이라는 큰 산을 오르며 마음이 설렌다.
“재즈는 자기만족이 강한 음악이에요. 매번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즉흥연주의 긴장감으로 실력을 키우면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까요. 클래식 피아니스트도 쇼팽을 연주하면서 남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재즈는 완벽하게 한 차원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음악적으로 자신이 더 행복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재즈 뮤지션이겠죠.” 재즈는 웅산의 인생에 선물처럼 다가왔다. 대중에게 이 멋진 음악을 더 알리고 싶어 주변의 우려 속에도 MBC <복면가왕>과 KBS <불후의 명곡> 같은 예능 방송 경연에 응했던 사람. 웅산은 스스로 한국 재즈 신의 수혜자라고 생각하기에 평소엔 작은 클럽을 암행하며 실력 있는 후배를 찾아 배우고 더 큰 무대에 오르도록 돕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매년 4월 30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재즈의 날’이에요. 이날 세계 곳곳에서 축제를 여는데, 한국은 아직 별다른 기념 무대가 없었어요. 그래서 올해 많은 아티스트와 ‘재즈 데이’를 준비했는데, 팬데믹으로 실현하지 못했어요. 어서 많은 분을 초대해 한국에 이런 멋진 재즈 뮤지션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