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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르네상스를 향하여

ARTNOW

브랜드에서는 더 이상 예술을 덧대지 않고는 제품의 매력을 어필할 수 없고, 기업에서는 너도나도 예술 재단을 만들어 직간접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는 데 앞장선다. 상업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 예술 작품의 장르별 융합, 거기에 더해 국내 작가들의 세계적 약진이 눈에 띄는 요즘, 가히 국내 미술 시장은 제2의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돔 페리뇽이 아이리스 반 헤르펜, 최정화와 함께한 협업

앱솔루트가 진행해온 수천 가지의 아티스트 협업 중 최초의 작품인 ‘Absolut Warhol’을 바틀로 탄생시킨 ‘앤디 워홀’ 에디션

정상화, 무제 73-11 Acrylic on canvas, 145×111cm, 1973
ⓒ Kukje Gallery, Photo by Kim Sang Tae

르네상스를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면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혹은 부활이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운동으로 ‘재탄생’이라는 뜻을 내재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절정기’, ‘융성기’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최근 몇 년간 주춤하던 현대미술 시장이 다시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움직임은 비단 아트 페어에 참여한 갤러리의 실적으로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중이 쉽게 접근 가능한 다양한 분야와 장소에서, 무엇보다 미술 콘텐츠의 활용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11월 초 롯데 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는 롯데백화점 창립 35주년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여느 기념식처럼 요란한 이벤트나 축하 공연은 없었다. 대신 500여 명의 고객과 관계자가 모인 자리에서 국내 대표 옥션 회사 K옥션의 특별 경매를 진행했다. 미술품을 비롯해 유명 와인 등 시가 1000억 원에 달하는 물품이 경매에 나왔고, 각 아이템마다 편차는 있었으나 대부분 열띤 경쟁을 통해 최종 낙찰자가 결정됐다. 무엇보다 최근 상한가를 치고 있는 단색화 작가 정상화, 하종현의 작품 등 유명 작가의 대표작은 현장의 응찰 고객과 서면이나 전화로 높은 가격을 제시한 컬렉터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이날 특별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된 작품은 피카소의 ‘미술가와 모델’. 9억5000만 원에 이 작품을 손에 넣은 주인공은 한 전화 응찰자였다. 창립 기념행사에서 소규모 자선 경매가 아니라 국내 굴지의 옥션 회사 주최로 수백 점의 예술품이 경매를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일은 그간 흔치 않았다. 공개적으로 고가의 미술품이 거래되는 것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따가울 뿐 아니라 예술 작품과 대중 사이의 거리감이 상당했기 때문.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둘 사이의 거리감이 좁아졌고, 그로 인한 괴리감도 상당히 옅어졌다. 무엇보다 예술의 대중화를 이끈 기업과 브랜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는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앤디 워홀 등 세계적 아티스트와 협업하거나 그들의 작품에서 얻은 모티브를 옷과 신발, 가방과 액세서리에 덧입혔다. 화장품도 다를 바 없다.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유망한 작가를 섭외해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을 의뢰했고, 때로는 상업 광고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작가의 손을 거친 와인병과 라벨, 케이스 디자인에 이어 이런 추세는 지난 몇 년간 더욱 활발해져 최근에는 맥주병과 머그잔, 캐주얼 의류와 가방 등의 중저가 제품에까지 ‘아티스트의 향기’를 덧바르고 있다. 이는 이미지 제고를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려는 기업의 니즈와 미적 취향이 성숙해져 자신만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제품을 찾는 구매자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이유가 가장 크다. 또한 제품도 예술의 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소비자가 공감하고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예술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이해의 폭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제품이 인기를 끌 경우 함께한 작가의 위상도 높아지기 때문에 이런 협업은 작가를 육성하고 미술 시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발판이 된다. 이런 프로젝트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기업과 작가의 협업에 관해 컨설팅해주는 아트 컨설팅업체도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이제 시장의 규모가 점차 커질 일만 남은 상태다. 국내 미술 시장의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면서 국내 작가들의 약진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6월 갤러리현대에서는 정상화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요즘 ‘없어서 못 판다’는 단색화의 중심에 선 작가다. 국제갤러리도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작가의 초기작을 어렵사리 모아 지난 10월 19일까지 <단색화의 예술>전을 개최했다. 해외 컬렉터들이 단색화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탓이다. 사실 1970년대 단색화 열풍이 한창일 때 세계 미술 시장에서는 지금처럼 단색화 작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6월 열린 아트 바젤과 10월 막을 올린 프리즈, 피악에서 단색화 작품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실제로 프리즈 마스터스에 참여한 국제갤러리 부스를 둘러보던 중 한 외국인 컬렉터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됐는데 내용은 이랬다. “지금 아주 환상적인 작품을 하나 발견했어. 한국 작가인데 컬러와 제작 기법이 아주 독특해. 이 부스로 빨리 와봐.” 옆 사람에게 겨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통화하던 그녀의 앞에는 하종현 작가의 100호짜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정상화 작가는 단색화가 이렇듯 세계적으로 재조명되는 이유에 대해 “때를 맞은 것”이라며 “와야 할 것이 온 것뿐”이라고 답했다. 1970년대에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의 작가가 이끈 단색화 운동은 국전으로 대표되는 전통 회화,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르네상스와 많은 부분 닮았다. 서구 사회를 모델로 성장만을 강요하던 사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전위 의지로 충만한 작가들의 움직임을 이제 세계 미술 시장에서도 미술사의 한 흐름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문화적 융성을 만끽한 르네상스 시대는 특정 계층의 소수 작가에 대한 절대적 후원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서너 명의 천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 그렇다고 믿어온 것에 대한 의문 제기, 과학·음악·의학·미술 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한 그들의 도전정신,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 앞에서 웃고 울고 즐기는 현대미술 또한 그것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