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 로버츠 CEO가 전한 비전
9월, 디자인 마이애미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전을 개최했다. 한국의 장인정신과 동시대 디자인의 진화를 조명한 이번 전시 배경에는 젠 로버츠 CEO의 비전이 있다.

디자인 마이애미 CEO 젠 로버츠. Photo by Ilda Kim, Courtesy of Design Miami
2005년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서 처음 시작된 ‘디자인 마이애미’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인 페어로 꼽힌다. 아트, 건축, 패션, 테크놀로지 등을 아우르며 시시각각 변하는 디자인의 시대정신을 소개해왔고, ‘컬렉터블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며 디자인을 수집과 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마이애미와 파리에서 열리는 메인 페어, 그리고 다양한 위성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곳곳의 도시와 호흡해온 디자인 마이애미가 이번에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무대로 서울을 택했다.
9월 1일부터 14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Illuminated: A Spotlight on Korean Design)〉는 디자인 마이애미가 올해 론칭한 ‘인 시추(In Situ)’의 아시아 첫 전시다. 인 시추는 지역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기념하고 현지 맥락을 반영해 글로벌 디자인 담론을 펼치는 취지의 프로그램으로, 한국 디자인의 국제적 위상과 성장 가능성을 인정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 ‘밝게 비추다’라는 의미의 한국어 ‘조명’을 모티브로 기획한 이번 전시에서는 로컬의 독창성과 컬렉터블 디자인 지형을 형성해온 디자이너 71명과 국내 갤러리 4곳, 해외 갤러리 12곳의 작품 170여 점을 선보였다. 한국적 미감을 발견하고 소개해온 큐레이터 조혜영이 한국 대표 작가들의 주요 작품 및 신작과 함께 카펜터스 워크숍, 프리드먼 벤다 같은 해외 유명 디자인 갤러리의 작품을 배치해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 감수성을 갖춘 한국 디자인의 매력을 소개했다.
이 모든 시도의 중심에는 2015년부터 지난 10여 년간 디자인 마이애미를 이끌어온 젠 로버츠(Jen Roberts) CEO가 있다. 그는 ‘디자인은 문화적 자본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시장을 키우고, 세대를 연결하며, 디자인의 외연을 꾸준히 넓혀왔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대규모 국제 페어 개최가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소규모지만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뮤지엄급 전시 〈포디엄(Podium)〉을 선보였고, 기업 및 부동산 개발사 등과 협업해 맞춤형 큐레이션을 제공하는 컨설팅·리서치 중심 프로그램 ‘큐레토리얼 랩(Curatorial Lab)’을 신설해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2023년에는 ‘디자인 마이애미 파리’를 성공적으로 론칭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페어에서 플랫폼으로, 그리고 글로벌 담론을 주도하는 문화적 네트워크로 진화한 디자인 마이애미의 오늘은 그의 비전이 만들어낸 결과다. DDP 전시장에서 만난 그에게 서울 전시의 의미와 디자인 마이애미의 철학에 대해 물었다.
이번 서울 전시는 굉장히 빠른 시간 내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지난 4월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처음 논의했다고 들었는데, 9월 1일 DDP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니까요.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의 아시아 첫 전시 장소로 서울을 선택한 이유와 의미가 궁금합니다.사실 한국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관심사였습니다. 10년 이상 꾸준히 주목해왔는데,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죠. 공예의 오랜 역사와 뛰어난 장인정신을 보유한 데다 한국 디자이너의 결과물 중 세계적으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사례가 많았거든요. 물론 아직 상대적으로 젊은 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감상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서울 전시는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죠. 한국은 패션과 미술 분야에서 이미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어요. 여러 문화적 요소가 교차하는 이 도시에서 디자인 마이애미가 제안하는 가치가 그 어느 곳보다 잘 이해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전략적으로도 서울은 글로벌 시장과 연결되기에 지리적·문화적으로 최적의 도시예요. 실제로 이번 전시를 위해 많은 분이 우리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는데, 하나같이 이 도시의 역사성과 활기를 직접 경험하며 극찬하더군요.

위쪽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 전시 전경. Photo by Ilda Kim, Courtesy of Design Miami
아래쪽 ‘2024 디자인 마이애미’의 프리드먼 벤다 갤러리 부스. Photo by Kris Tamburello, Courtesy of Design Miami
전시 타이틀이 ‘창작의 빛’인데, 어떤 메시지를 담은 건가요?말 그대로 한국의 역사적 장인정신과 현대 디자인의 진화를 조명한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이 지닌 문화적 깊이를 비추고, 그것을 글로벌 디자인 신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요.
서울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도시의 첫인상은 어땠나요?도착한 지 하루밖에 안 지난 데다 머무는 시간이 사흘 정도라 시간이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대가 매우 큽니다. 일단 도시에서 생기가 느껴져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야시장이죠. 원래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현지에서 직접 맛볼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러워요. 짧은 일정이지만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마이애미 비치와 파리에서 열리는 메인 페어 외에도 포디엄, 큐레토리얼 랩, 인 시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이처럼 형태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변치 않는 디자인 마이애미만의 정체성이 있다면? 중요한 점은 디자인 마이애미는 ‘디자인 문화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마이애미 비치와 파리에서 열리는 메인 페어가 있죠. 인 시추는 도시의 맥락과 장소성에 따라 유연하게 변주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기획되었지만, 이러한 중심 가치는 어디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체성이 확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메인 페어가 열리는 마이애미와 파리, 그리고 올해 인 시추를 진행한 아스펜과 서울까지 도시마다 행사 분위기가 전혀 다른 점도 디자인 마이애미의 특징으로 보이는데요. 각 도시별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맞아요. 도시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습니다. 마이애미는 현대적이면서 규모가 압도적이에요. 매년 3만 명 이상 방문하는데, 그 에너지는 정말 ‘크레이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 반면 파리는 좀 더 세련되고 오트 쿠튀르에 가까운 성격을 띱니다. 18세기 저택에서 열리는데, 공간 자체가 파리지앵의 안목과 미감을 반영하고 있어요.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같은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역시 그런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스펜에 이어 서울에서 선보이는 인 시추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요? 인 시추는 로컬 디자인을 유연한 형태로 조명하고 글로벌 디자인 신과 연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기존 목적은 다양한 도시에서 개최하는 것이지만, 올해 처음으로 이 형태를 소개한 아스펜과 서울에서는 매년 꾸준히 전시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이와 함께 디자인적 잠재력이 큰 새로운 도시를 계속 찾아보려고 합니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오랫동안 페어 캐릭터가 강했는데, 근래 들어 플랫폼 성격이 짙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는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나요? 돌이켜보면 약 5년 전부터입니다. 디자인 시장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더 키우고, 단순히 거래의 장을 넘어 교육적 역할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2020년 팬데믹 때는 페어가 취소되면서 뮤지엄급 전시를 열었는데, 백신 접종 전인데도 관람객이 4000명이나 방문했어요. 그때 큰 보람을 느꼈고, 이런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시작한 것이 포디엄이고, 이를 발전시킨 것이 인 시추입니다. 또 큐레토리얼 랩을 통해 부동산 개발사 등의 기업과 협업해 문화적 자본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진행 중입니다. 상설·비상설 설치를 기획하고,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커미션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기본적으로는 교육과 경험을 통해 전반적 디자인 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위쪽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 전시 전경. Photo by Ilda Kim, Courtesy of Design Miami
아래쪽 ‘2024 디자인 마이애미 파리’에 참가한 패트릭 세귄 갤러리의 전시 전경. Photo by Karl Hab, Courtesy of Design Miami
컬렉터블 디자인의 정의와 좋은 디자인의 기준을 묻고 싶습니다. 20세기로 돌아가보면, 당시 아방가르드 건축은 기존 가구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들이 직접 가구를 설계했고, 그 결과 희귀성과 역사성을 지닌 오브제가 등장했죠.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리아 가구가 대표적입니다. 그렇다고 ‘한정판’이 곧 좋은 디자인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대량생산된 북유럽 모더니즘 가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가 사라지고 희소성이 생겨 수집 가치가 커지니까요. 디자인이란 결국 기능을 갖춘 오브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굳이 컬렉터블 디자인이라고 명명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요. 중요한 것은 동시대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입니다. 좋은 디자인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충분할 수도 있고, 기존 틀을 깨거나 새로운 소재를 실험하는 시도 역시 의미 있죠.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질문이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구현될 때 특히 매력적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디자이너를 소개해줄 수 있나요? 무척 많은데요.(웃음) 먼저 주얼리 디자이너 잔 파올로 바르바토를 좋아합니다. 그의 작업은 ‘몸을 위한 건축’ 같아요. 가구는 장 프루베, 조 콜롬보, 가에타노 페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요. 동시대 디자이너 중에는 마크 뉴슨, 3D 디자인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요리스 라르만, 카펜터스 워크숍의 빈센초 데 코티스도 좋아합니다. 한국에서는 이헌정 작가의 세라믹 작업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살롱94 갤러리 소속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디자이너 제이 사에 정 오의 작업도 요즘 주목하고 있어요. 이번 서울 전시 포스터를 장식한 김준용 디자이너의 글라스 작업도 흥미롭습니다. 손으로 유리를 커팅하는 작업은 난도가 높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최근 글로벌 디자인 신에서 눈에 띄는 트렌드는 무엇인가요? 지난 몇 년 사이 세라믹과 글라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두 소재는 접근성이 좋은 데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매체라고 할 수 있죠. 지역적으로는 한국처럼 이미 디자인이 일상의 언어가 된 곳이 새로 부각되고 있어요. 이와 함께 젊은 디자이너들이 활발히 성장하고 있는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 같은 중동 지역도 눈에 띕니다.
앞으로 계획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젊은 세대가 디자인 신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흥미로워요.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곳을 여행하며 각국의 디자인 문화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는 11월에는 인도에서 열리는 샤크티 디자인 레지던시 심사에 참여할 예정인데,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와 인도 장인들이 만나 전통 기술과 현대 디자인을 접목하는 자리라 무척 기대돼요. 브랜드 차원에서는 디자인 하면 ‘디자인 마이애미’를 떠올릴 수 있도록 도약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한국과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시장이 마이애미 비치나 파리의 페어에 모여 서로 만나고, 공통 관심사를 통해 디자인과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