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억하라, 해골이 나가신다
해골이 죽음의 상징이라는 것은 어린애도 안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은 작가가 해골과 사랑에 빠진 것일까?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 Sanctus, 16mm 필름, 19분, 1990 Photo by Alexander Koch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이른 아침부터 해골에 관한 기사를 쓰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이다, 엉뚱하게도 아주 오래전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적 엄마가 노래를 부르며 도화지에 연필로 그려준 귀여운 해골 형상. 나는 형과 머리를 맞대고 원과 네모와 꼬불꼬불한 선이 만나 해골로 변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보며 박수를 치곤 했다. 2013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애니미즘(Animism)>전에 출품된 ‘해골 춤(The Skelton Dance)’이라는 흑백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해골은 내 어린 시절의 해골과 무척 닮았다(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배경은 보름달이 뜬 자정의 무덤가. 번개가 치자 땅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4개의 해골이 해가 뜨기 전까지 흥겹게 춤을 춘다.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는 월트 디즈니가 1929년에 제작한 이 기괴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은 죽음(을 상징하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애니미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기서 해골은 1차적으로 죽음을 의미하지만,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은 불사조의 면모도 보인다. 와르르 부서졌다, 서로 합체해 머리 셋 달린 개 형상이 됐다가, 다시 또 춤추는 모습은 아무리 만화라고 해도 그로테스크하다. 한편 이형구 작가의 뼛조각은 애니메이션에서 친근감을 유발하기 위해 인간이 행하는 각종 동물의 의인화, 그 밑바탕에 깔린 신체 변형과 파괴의 욕망을 생물학자나 고고학자의 자세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그는 작년에 페리지갤러리에서 전시장을 가득 채운 거대한 뼈 형상을 발표했다. 흡사 자연사박물관의 공룡 뼈를 보는 듯했지만, 그건 닭의 뼈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한 자연사박물관의 전시실에서 실제 뼈를 처음 봤을 것이다. 벤 스틸러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박물관은 살아 있다>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룡 화석은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한 바로 그 장면 아닌가. 그러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안전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실제 해골을 볼 때가 있다. 거기엔 슬픔과 치유의 서사가 있고, 죽음의 냄새가 낮게 깔려 있다. 화장터에서 불에 타고 남은 뼛조각을 확인하는 행위는 그 사람이 한때 살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에 더는 인간의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명한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해골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문장은 아무런 힘도,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아트나우>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안규철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개인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생명이 있는 식물이나 금붕어를 가져와보니, 미술관이 애초에 죽은 것을 위한 공간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는, 미술관(museum)이라는 단어와 독일어 무덤(mausoleum)의 발음이 유사하다며 미술관을 “미술 작품의 무덤”이라고 정의한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존재가 느껴진다. 철학자의 그럴싸한 옛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술관은 죽음의 흔적을 그러모은 집합소로 탄생한 근대적 장소였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시초로 언급하는 16세기 독일의 ‘분더카머(Wunderkammer, 경이로운 방)’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진귀한 물건이나 권력과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아주 쓸모없는 것들의 진열장이었다. 결국 그것은 누군가의 착취와 패배, 그리고 죽음의 대리물이었던 셈이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칭송받으며 미술관에 안치된 수많은 작품에 삶의 덧없음과 죽음을 향한 충동과 두려움이 녹아 있다는 점은 아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런 작품에는 늘 해골이 등장한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서 해골은 죽음을 환기하는 소재였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흑사병과 종교 대분열의 공포에 휩싸인 시대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그림은 마음에 위안을 주는 역설적 주술 효과를 지녔을 것이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 회화’ 연작에서 서양 미술사의 가장 강력한 상징 언어로 자리 잡은 바니타스 도상을 무심한 자세로 재해석했다. 미니멀한 공간에 희미하게 보이는 두개골과 촛불은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기서 해골은 인간의 죽음은 물론 사진의 발명으로 일찍이 선포된 ‘회화의 죽음’에 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가 해골을 작품의 주제나 소재로 손쉽게 활용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의 아이콘이자 막강한 힘을 발휘한 작품으로 데이미언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를 꼽을 수 있다. 허스트는 늘 죽음의 비구름을 몰고 다닌다. 혹자는 상어, 소, 양, 돼지의 사체로 만든 그의 작품을 두고 ‘푸줏간 미술’이라 비하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해골은 요리하기 편하고 쓸모 많은 재료였다(그의 홈페이지에 ‘skull’을 입력하면 회화, 설치, 조각 등 총 26점의 작품이 검색된다). 모름지기 ‘논란만이 살길이다’라고 항변하듯, 그는 2007년에 떠들썩한 이벤트를 선보였다. 런던 이즐링턴의 한 상점에서 1720~1810년대에 유럽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35세 정도의 남자 해골을 구매해 백금으로 틀을 씌우고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뒤덮은 것이다. 치아는 원래 해골의 것을 남겨두었다. 정교하게 연출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해골의 이미지는 아름다웠지만, 누군가는 이 작품이 제프 쿤스의 반짝이는 보석 조각처럼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식’으로 전락한 동시대 미술의 종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혹평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반대편에서 ‘해골의 전도사’로 맹활약 중인 동양 작가는 무라카미 다카시다. 두 작가는 여러모로 비교 가능한 지점이 많다. 사업가처럼 공장제 스튜디오 시스템을 운영하며, 비즈니스 마케팅에 철두철미한 모습은 미술계 슈퍼스타의 전형 중 하나다. <프리즈>와 <슈퍼 플랫>전처럼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로서 일군의 젊은 작가를 모아 미술계에 새 흐름을 제시한 전력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자신의 글로벌 아트 신 경험담을 토대로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게 격려와 분발의 메시지를 던지는 저서 <예술 투쟁론>에서 서구 현대미술이 5가지 맥락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자화상, 에로스, 형식주의, 시사 그리고 죽음.
그렇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에서 해골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해골은 죽음 그 자체보다 서구 현대미술의 ‘맥락’을 파고드는 전략적 무기에 가깝다. 세계 미술계에 자신의 작품을 쉽게 각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뜻이 명확하고 알기 쉬운 상징 기호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해골은 하나의 캐릭터로서,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는 12개의 잎을 지닌 꽃과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한다. 마치 바니타스 정물화에 등장하는 꽃과 해골의 조화를 보는 것 같다. 땅에서 솟구치는 불꽃의 중앙에 해골 형상이 선명하게 자리 잡은 금박 조각 ‘욕망의 불꽃-금(Flame of Desire–Gold)’은 데이미언 허스트의 다이아몬드 해골과 한 쌍으로 놓고 봐도 그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해골이 이렇게 어떤 은유나 전략의 도구로 미술에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혹 물신 그 자체로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마치 화장터에서 마주한 지인의 뼛조각처럼. 그런 ‘해골-미술’을 본 것은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의 오프닝 행사로 임민욱 작가의 퍼포먼스 ‘내비게이션 아이디’가 펼쳐졌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으로 60여 년 전에 목숨을 잃은 민간인 희생자의 유골을 담은 컨테이너를 광주의 비엔날레 전시관 앞마당까지 호송하는 작업이었다.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부조리한 국가 권력에 희생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치유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작품의 의도를 설명했지만, 아무런 권리가 없는 작가가 희생자의 유골을 작품의 도구로 활용했다며 그 윤리적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저녁이 되자, 테크노 음악에 맞춰 컨테이너 위와 근처에서 격렬한 춤을 추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할 말을 잃은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죽음’이라는 불멸의 주제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해골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미술에 등장할 것이다(패션은 어떤가!). 문득 내가 죽어 해골이 된 이후에 나타날 또 다른 위대한 ‘해골-미술’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자, 이쯤에서 쓸데없는 상념은 잠시 뒤로하고, 노래나 흥얼거려보자.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