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추상은 없었다
지난봄 홍콩은 ‘아트 바젤 홍콩’을 비롯한 다양한 페어, 세계 주요 갤러리가 밀집한 H 퀸스의 오픈 등 유독 아트 이슈가 들끓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트 피플은 하나같이 말했다. 하우저 앤 워스 홍콩에서 열리는 마크 브래드퍼드의 개인전을 놓치지 말라고.

깊이감 있는 추상 작업을 선보이는 마크 브래드퍼드.
마크 브래드퍼드
196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마크 브래드퍼드는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츠(캘아츠)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땄다. 2009년엔 ‘천재에게 주는 상’이라고도 불리는 맥아더상을 수상, 2017년엔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로스앤젤레스 해머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 보스턴 ICA,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 등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휘트니 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마크 브래드퍼드는 종이에 다시 종이를 쌓아 붙이는 ‘콜라주’와 반대로 종이를 찢고 태우고 떼어내는 ‘데콜라주’ 기법을 동시에 활용한 추상 작품으로 알려졌다. 눈을 사로잡는 비주얼과 작품에 담긴 의미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그는 미국과 유럽의 내로라하는 기관에 대부분 이름을 올렸고, 옥션에서도 컬렉터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마크 브래드퍼드가 서구권에서 쌓은 명성에 비해 아시아에선 그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뜸했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하며 한국 관람객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아시아 개인전은 3년 전에 열린 상하이 록번드 미술관이 유일했다.

Installation View of < Mark Bradford: Tomorrow is Another Day >, La Biennale di Venezia, US Pavilion, Venice, Italy, 2017
최근 아트 바젤과 UBS가 발행한 리포트 < The Art Market >(2018년)에 따르면 중국의 아트 마켓은 영국을 앞질렀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트 마켓으로 부상한 중국 시장에 세계의 주요 갤러리가 너도나도 손을 뻗쳤고, 이런 흐름의 중심에 마크 브래드퍼드가 있었다. “마크 브래드퍼드의 신작을 선보일 수 있어 기쁩니다. 마크 브래드퍼드는 지난 한 해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허시혼 뮤지엄의 대규모 커미션 워크, 보스턴 미술관 개인전 등 작가로서 존재감을 인정받았고 현재 커리어의 정점에 서 있어요. 지금이 아시아에 다시 한번 그를 소개할 적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오프닝 이브에 마크 브래드퍼드에게 개인전을 제안했는데, 그의 반응도 아주 열정적이었죠”라는 하우저 앤 워스 홍콩의 시니어 디렉터 바네사 궈의 말처럼, 이번 개인전은 중국 시장에서 갤러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마크 브래드퍼드의 이름을 아시아에 완전히 각인시키는 기회였다.
하우저 앤 워스 홍콩은 전 세계 지점 중에서 규모는 가장 작지만 빌딩의 15층과 16층,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평소 “저는 공간을 위해 저를 바꾸지 않습니다. 공간이 제게 적응하도록 만들지요”라고 말한 마크 브래드퍼드가 이 공간을 어떻게 탈바꿈시킬지 궁금했다. 특히 그가 고향인 로스앤젤레스 지점에서 한 달 정도 앞서 공개한 전시에서 최신작을 다수 선보인 터라 더욱 기대가 컸다. 하우저 앤 워스 홍콩의 시니어 디렉터 리신 차이는 “홍콩은 작지만 다양한 꿈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촘촘히 모인 곳이잖아요. 마크 브래드퍼드는 홍콩을 ‘공기 위에 있는 도시’라고 표현하더군요. 특히 갤러리는 홍콩 중심가의 가장 바쁘고 생기 넘치는 현장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있고, 마크 브래드퍼드도 그 점을 적극 활용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을 지지했다. 마크 브래드퍼드도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작업이었어요. 이곳엔 독특하고 정교한 디자인의 빌딩이 정말 많아요. 홍콩이라는 도시도 건물처럼 수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덧붙였다.

1Let Go of Me!! Let Me…., Mixed Media on Canvas, 209.6×265.4cm, 2018
2Next, Storm the Castle, Mixed Media on Canvas, 213.4×274.3cm, 2018
마크 브래드퍼드는 특정 그룹을 다른 그룹과 구분 짓는 커뮤니티 개념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오랫동안 인구, 특히 소외된 공동체를 그룹화하고 수량화한 그는 이번 전시에서 ‘지도’를 모티브로 이 주제를 드러냈다. 광고에 쓰인 오래된 지도 이미지를 활용해 도시의 대중교통망, 큰길, 수도 시스템을 조사하면서 이런 도시계획 시스템이 어떻게 지역 커뮤니티를 나누고 빈부 격차를 극대화하는지 파고들었다. “전통적으로 지도는 정보를 제공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인쇄된 선이 실제로 어떤 정보를 드러내는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는 도시 공간이 결국 권력에 기반한 시설에 따라 분배된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이렇게 도시 속 이질적인 커뮤니티와 숨어 있는 사회적 불의를 강조하며, 나아가 도시 속 인간 존재를 추적했다.

I Finally Touched the Sky, Mixed Media on Canvas, 76.2×61cm, 2018
그동안 그는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과 권력 분배,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에이즈 같은 사회적 이슈를 작품에 담아냈다.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자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57년간 흑인이자 게이로 살면서 미국 사회에 만연한 편견을 몸소 체감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홀어머니와 함께 편부모 가정이 모여 사는 공동 숙소에서 생활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의 살롱에서 보냈어요. 책을 좋아했고, 그 동네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어요. 다른 소년들보다 섬세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저는 방이나 거실로 항상 무언가를 가져와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었어요. 되돌아보면 그 행위가 곧 예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항상 예술가였어요.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노동자계급은 예술가라는 말을 쓰지 않죠. 누구도 제가 아티스트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당시엔 그런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어요.” 이런 배경은 그가 작품에 담는 서사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은 그런 그를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미국관을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남부에 있는 창고에 돔 천장의 미국관과 똑같은 크기의 모형 공간을 만들고, 꼬박 한 해에 걸쳐 그 안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했다. 작품 제목 ‘Tomorrow is Another Day’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를 뜻한다. 영화에도 흑인에 관한 이슈가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도 당시 영화에 출연한 배우 해티 맥대니얼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등 부당한 처사가 이어졌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오바마 정권 때 제의를 받았어요. 매우 긴 과정이었죠. ‘블랙 라이브즈 매터(2012년 플로리다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자율방범대원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발발한 흑인 인권 운동)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저는 나라의 인종 이슈가 위험한 길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할리우드가 어떻게 인종을 바라보는지, 오늘날 우리가 영화에서 비유한 일을 여전히 겪고 있는지 등을 생각했죠.”

Installation View of < Mark Bradford: Pickett’s Charge >,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Washington DC., 2017
마크 브래드퍼드는 미국관 도입부에 천장에서 쏟아지는 듯한 압도적인 작품을 설치했다. 회화와 조각, 영상을 전시하고 대규모 종이 추상 설치로 미국관의 상징이기도 한 원형 홀의 벽과 천장을 어지럽게 채웠다. 원형 홀은 마치 석고가 떨어지는 파멸의 현장처럼 느껴졌다. 벽은 부식된 것처럼 보이고, 위에선 인간의 분노로 천장에서 석고가 쏟아지는 듯 압도적 현장감을 연출했다. 그가 수없이 겹친 종이의 레이어는 추상화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동안 선보인 대표작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작품에 전반적으로 종이를 활용해왔다. 처음엔 미용실에서 찾을 수 있는 종이를 썼다. 그가 자라며 가장 가까이에서 접한 면지는 머리를 파마할 때 쓰는 종이다. 면지 더미를 캔버스에 얹은 다음 가장자리에 불을 붙여 패턴을 만들고, 염색약과 페인트 등이 캔버스에 각기 자리 잡으며 만든 격자무늬는 현재까지도 그의 작업을 상징한다. 점차 길거리에서 발견한 간판, 상업 포스터, 신문지, 만화, 잡지 등을 쓰기 시작했고, 최근엔 형형색색의 컬러로 가득한 그래픽 노블도 훌륭한 재료다. 종이를 쌓고 붙이고 더하는 행위와 찢고 지우고 불태우는 파괴 행위의 환상적 결합으로 생생한 질감을 완성하는 것이다. ‘프레임이 없는 입체 그림’이라는 그의 표현처럼 이렇게 탄생한 캔버스의 단면은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Installation View of < Mark Bradford: Tomorrow is Another Day >, La Biennale di Venezia, US Pavilion, Venice, Italy, 2017
이런 매체를 쓰는 예술가는 많지만, 마크 브래드퍼드만큼 종이의 물질성과 질감을 섬세하게 살리는 작가는 없다. 리신 차이도 이 지점을 주목했다. “마크 브래드퍼드의 정교한 테크닉은 어디서든 인정받아요. 종이만으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내려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죠. 그동안 많은 아시아의 예술 애호가가 그의 작품에 흥미를 보였고, 테크닉이나 재료를 궁금해하더군요. 중국 유물에 식견이 높은 미술가 위훙(Yu Hong)도 마크 브래드퍼드의 예술 실험이 고대 중국 칠기를 만드는 작업과 유사하다고 언급했어요. 몇천 년에 걸쳐 완성한 아시아의 정교한 예술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죠. 마크 브래드퍼드의 작품도 그만큼 공과 시간을 들여 완성한 거예요.”
마크 브래드퍼드는 5월 6일 매사추세츠의 피보디 에섹스 뮤지엄에서 열린 그룹전 < Playtime >을 막 마쳤고, 8월 27일까지는 파리 루이 비통 현대미술재단의 새 소장품을 소개하는 그룹전 < In Tune with the World >에 참여한다. 또 9월 23일부터 다음 해 3월 3일까지 볼티모어 아트 뮤지엄에서 개최하는 개인전 < Tomorrow is Another Day > 준비가 한창이니 앞으로 그의 행보는 쉴 틈 없이 이어질 듯하다.
“마크 브래드퍼드의 추상은 다양한 반응을 낳습니다. 지도 작업을 풍경화로 보는 사람도 있어요. 해석의 여지는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열려 있죠”라는 리신 차이의 말처럼, 작품 너머 레퍼런스를 모르더라도 테크닉과 비주얼만으로 관람자에게 큰 울림을 주는 그의 작품을 아시아에서도 직접 마주할 기회가 늘어나길 고대한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