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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남쪽 호주에서는 지금 막 2015년 신상 와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해의 땀방울을 보상받는 바쁜 수확기를 지나 1년 중 가장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인 농부를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만났다.
야라밸리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 우리와는 정반대로 초겨울 날씨인 호주 빅토리아 주로 향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레이트 오션로드, 필립 아일랜드, 깁슬랜드 등 광활한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관광 명소나 멜버른의 그라피티 골목, 캥거루와 코알라 같은 야생동물을 이야기했지만, 내가 빅토리아 주로 향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호주에서 맛 좋기로 소문난 빅토리아 주 와인을 만나는 것.
사실 호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믿을 만한 와인 생산국이다. 1700년대부터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해 현재 세계 최대 와인 생산국 순위에서 꾸준히 6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뒤를 이어 세계 와인 수출국 4위에 랭크되어 있기도 하다. 다채롭고 이국적인 풍경에 온화한 기후가 어우러져 재배하는 포도 품종이 100가지가 넘는 와인의 나라다.
호주의 6개 주 중에서도 빅토리아 주는 호주에서 생산하는 프리미엄 와인의 70%를 전담하는 고급 와인 산지로 꼽힌다. 농부의 땀방울도 한몫하겠지만,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포도 재배에 최적화된 땅 때문이다. 호주 남동쪽 해안에 위치해 호주에서도 가장 서늘한 기후를 자랑한다. 또 여름에는 일조량이 풍부하고, 겨울에는 온난하면서 비가 내리는 날씨가 지중해와 꼭 닮았다. 호주의 다른 와인 산지에 비해 크기도 작고, 포도 생산량도 적지만 21개 와인 특구 안 85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와이너리에서 양보다 질을 우선시하며 우아한 와인을 만든다. 여행자가 고루 도전해보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와이너리 수. 그래서 추리고 추려 일주일 동안 와인 잘 만들기로 소문난 대표 지역을 돌아보고 왔다.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와인이 대부분이지만, 여기 소개하는 6개 와인 산지를 기억해두자. 지난해 한국과 호주의 FTA 체결로 향후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호주 와인이 늘어날 전망이니 말이다.
Around Melbourne
멜버른에서 와이너리를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
이노센트 바이스탠더 와이너리의 와인
야라밸리 | Yarra Valley
멜버른에서 동쪽으로 1시간 남짓 달리면 호주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와인 산지로 꼽히는 야라밸리를 만날 수 있다. 한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한겨울에는 다른 지역보다 따뜻해 호주에서 가장 품질이 우수한 샤르도네, 피노 누아, 스파클링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와인뿐 아니라 민물 연어, 송어, 캐비아, 유기농으로 재배한 과일과 채소, 수제 치즈 등도 유명해 와인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 와이너리는 1850년대부터 형성됐다. 예링 스테이션(Yering Station), 예링버그(Yeringberg), 세인트 휴버트 빈야드(St. Hubert Vinyard) 등 큰 포도원이 초기에 자리 잡았고, 주로 영국으로 수출했다. 그중 예링버그는 호주의 와인 평론가 제임스 홀리데이에게 최고점인 별 5개를 받은 곳이다. 와이너리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드넓은 땅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3000마리의 양 떼. 그리고 호주에서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벽돌로 지은 마구간과 와인셀러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서면 1860년대부터 쓴 와인메이킹 도구와 기계, 1세대가 멜버른에 갈 때 타던 마차 등 와인 박물관이 따로 없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즈, 샤르도네, 비오니에 등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생산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르산과 루산 2가지 화이트 품종을 블렌딩한 마르산 루산(Marsanne Roussanne)이다. 1975년 2세대 와인메이커가 만든 마르산 루산은 예링버그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정도로 풍부한 맛이 일품이라고. 복합적이고 섬세한 맛은 8년 정도 숙성했을 때 최상의 맛을 선사하지만 2010년 빈티지의 맛도 훌륭했다.
예링버그가 전통적 양조 방식을 고수하는 클래식한 와이너리라면, 이노센트 바이스탠더(Innocent Bystander)는 2006년에 설립한 최신 와이너리다. 역사가 길지 않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예링버그와 마찬가지로 제임스 홀리데이에게 최고점을 받은 곳이니까. 1960년대에 인기를 끈 매거진에 항상 호주의 정세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순진한 캐릭터가 등장했는데 그를 일컫는 말이 이노센트 바이스탠더였다. 호기심 가득한 순수함으로 원하는 와인을 마셔보라는 의미에서 이름 지었다. 맥주 양조업자 오너와 셰프 출신 와인메이커, 그 외에 다수가 합심해 만든 와이너리로, 정직하게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자이언트 스텝(Giant Step), 이노센트 바이스탠더 2종의 와인을 만든다. 지속 가능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현재 직영 포도밭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바이오다이내믹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자이언트 스텝은 와인에 대해 신중하게 따져보는 사람을 위해 전통 방식의 피노 누아·샤르도네·피노 그리·시라 와인을 선보이고, 이노센트 바이스탠더의 모스카토는 일명 ‘스마일 와인’으로 불리며 와인 초보자들의 와인 입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예링버그 와이너리
모닝턴 페닌슐라 | Mornington Peninsula
멜버른의 남동쪽에 위치한 모닝턴 페닌슐라는 빅토리아 주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다. 영국의 와인 저널리스트 앤드루 캐치폴(Andrew Catchpole)은 호주 와이너리 중 모닝턴 페닌슐라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했다. 포트필립(Port Philip), 웨스턴포트(Westernport)의 아름다운 해변과 인접해 남극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땅이 얼지 않는 기분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와인의 맛과 함께 모닝턴 페닌슐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와이너리는 포트 필립 에스테이트 앤 쿠용 와인(Port Philip Estate and Kooyong Wines)이다. 포트필립 에스테이트 앤 쿠용 와인에서는 모닝턴 페닌슐라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피노 누아, 샤르도네, 피노 그리 등을 이용해 포트필립과 그 상위 레이블인 쿠용 와인을 선보이며, 와이너리에는 부티크 호텔과 레스토랑이 함께 있어 이곳 와인과 요리의 페어링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레스토랑은 호주의 미슐랭 가이드 격인 ‘디에이지 굿 푸드 가이드’에서 모자 1개를 획득한 곳.
모닝턴 페닌슐라
포트필립 에스테이트 앤 쿠용 와인 레스토랑의 고트 치즈와 무화과
North-East Victoria
화려한 골드러시를 지나 지금은 와인 러시
캠밸스 와인
캠밸스 와인
주정 강화 와인을 보관하는 오크통
1880년대 바스켓 압축기
루더글렌 | Rutherglen
루더글렌은 골드러시 시대인 1850년대부터 와인을 생산한 산지로, 당시 영국인이 맥주·진·주정 강화 와인을 즐겨 마셔 대부분의 와이너리에서 수출용으로 주정 강화 와인을 생산한 역사가 있다. 빅토리아 주 북동쪽에 위치한 이곳은 머리 강(Murray River)과 인접해 있어 비옥한 토질을 갖추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재배한 포도는 알이 크고 맛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한난 차가 매우 크고, 주로 겨울에 비가 오고 가을에는 건조한 날씨라 오랫동안 포도를 나무에서 따지 않고 건포도 수준으로 당도를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대표적 와이너리는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주정 강화 와인으로 높은 점수를 획득한 캠벨스 와인(Campbells Wines). 145년 된 와이너리로, 현재 5세대 와인메이커가 대를 잇고 있다. 머스캣과 토파크(뮈스카델)가 주요 품종으로, 이외에도 시라즈, 뒤리프(프티 시라즈), 루산을 재배한다. 루더글렌 전역에서는 머스캣과 토파크의 숙성 기간에 따라 동일하게 루더글렌(4~5년), 클래식(8~9년), 그랜드(16~17년), 레어(25년)로 와인 등급이 나뉜다. 가장 어린 와인인 루더글렌의 경우 과일향이 풍부한 금빛 와인이고, 레어로 갈수록 색이 점점 검붉은색으로 변하며 짙은 모카 향을 느낄 수 있다. 레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적 투자가 필요해 만드는 사람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몇 세대를 내다보고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또 다른 오래된 와이너리는 마르산으로 알려진 올세인츠 이스테이트(All Saints Estate). 빅토리아 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거대한 느릅나무 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곳으로, 스코틀랜드의 성을 연상시키는 와이너리인데 150년 전 처음 와이너리를 설립할 때 스코틀랜드 오너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여왕의 집과 똑같이 지은 것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1880년대에 가져온 바스켓 압축기를 지금도 사용할 만큼 옛 방식 그대로 와인을 만든다. 처음 포도 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다양한 품종과 강화 와인에 쓸 수 있는 품종을 주로 심었는데, 필록세라가 유행한 뒤 다시 나무를 심을 때에는 이곳 토양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택했다. 그중 하나가 마르산이다. 이곳의 마르산은 아주 라이트하게 숙성시켜 입안에서 느껴지는 텍스처가 샤르도네와 비슷하다. ‘디 에이지 굿 푸드 가이드’에서 모자 1개를 획득한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니 체크해둘 것.
브라운 브러더스 퍼트리샤 와인
피지니 와인의 쿠킹 클래스
킹밸리 | King Valley
루더글렌 지역을 벗어나 호주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그레이트 알파인 로드를 달려 3시간가량 이동하면, 빅토리아 주의 와인 지붕 킹밸리가 나온다. 킹밸리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일군 와이너리를 만날 수 있다. 피지니 와인(Pizzini Wines)은 195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 가족이 담배 농사를 짓다 포도 농사로 전향한 곳. 초기에는 인근의 브라운 브러더스, 드보르톨리에 수확한 포도를 판매하다 1995년부터 직접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와인 산업뿐 아니라 쿠킹스쿨, 레스토랑 등 이탈리아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처음 포도를 심을 때만 해도 리슬링, 샤르도네, 시라즈, 메를로, 소비뇽 블랑 등을 재배하다 점차 호주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이탈리아 전통 포도 품종인 베르두초, 베르디키오 등을 선보이는 중이다. 15년에 걸쳐 이탈리아 품종의 맛을 그대로 재현해 와인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 다른 와이너리는 호주에서 손꼽히는 메이저 와이너리로, 국내에도 수입되는 브라운 브러더스(Brown Brothers)다. 가장 유명한 와인은 단연 퍼트리샤(Patricia). 가문을 이끈 할머니의 이름을 딴 와인으로, 그해 빈티지 상태에 따라 출시 여부를 결정한다. 퍼트리샤 레인지는 샤르도네, 시라즈,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생산하는데, 모든 와인이 다수의 와인상을 수상한 만큼 어떤 것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모스카토 & 소비뇽 블랑도 독특하다. 2013년 런칭한 후 베스트 이노베이션상을 수상하고, 호주 내수시장에서 144% 성장세를 기록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달콤한 모스카토 85%에 태즈메이니아의 소비뇽 블랑(다른 소비뇽 블랑과 비교할 때 샤프한 산도와 신선함이 특징이다) 15%를 블렌딩한 것으로 알코올 함량이 7%밖에 되지 않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이다.
Central Victoria
빅토리아 주 중심에서 와인을 만나다
조지아, 에밀리 와인
히스코트 | Heathc ote
호주 최고의 시라즈 와인 생산지 히스코트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서늘한 여름 기후 덕분에 진하고 풍부한 맛의 레드 와인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고대 캄브리아기 지층의 토양과 적토, 서늘한 남풍 덕에 히스코트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힘과 무게감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구조감이 탄탄한 것이 특징. 대부분의 포도밭이 카멀 산맥의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히스코트 지역에서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와 영국, 일본, 홍콩 등에서 사랑받는 재스퍼 힐(Jasper Hill) 와이너리로 향했다. 수확철이 막 지난 이 시점에 이미 모든 와인이 품절되었다는 표지판이 보일 정도로 인기 있는 프리미엄 와이너리다. 와인메이커 론 러프턴은 본인이 마시려고 남겨둔, 이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와인 몇 가지를 꺼내 기꺼이 테이스팅 와인으로 내주었다. 그는 2개의 포도밭에 두 딸의 이름을 붙여 각각 조지아, 에밀리 2가지 라벨을 보유하고 있다. 화학을 전공하고, 치즈 제조 경험도 있는 그는 와인메이킹 역시 과학이라고 생각해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을 고수하고 있다. 포도나무는 인위적으로 접붙이지 않고, 관개시설 역시 따로 두지 않았다. 그저 포도를 잘 키우는 것은 테루아라 믿고, 이를 행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굳이 과학적으로 복잡하게 파고들지 않더라도 조지아와 에밀리 와인을 마셔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토양에 멀지 않은 거리의 2개 포도밭에서 같은 기후, 동일한 품종의 포도를 한 사람이 똑같이 키우고 와인으로 만드는데 조지아 시라즈와 에밀리 시라즈 와인의 맛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조지아 시라즈는 어두운 보랏빛에 스파이스 향, 베리의 풍미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밸런스 좋은 와인인데, 에밀리 시라즈는 더 풍부한 퍼퓸 향으로 마시고 난 뒤 입안의 여운이 훨씬 오래간다. 최근에는 프랑스 최대 유기농 와인업자인 론 지역의 미셸 샤푸티에와 함께 히스코트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는 중이다. 포도밭을 각각 반씩 나눠 프랑스식 시라즈, 호주식 시라즈를 선보이려 한다니 기대가 된다.
조지아 포도밭의 토양
재스퍼 힐 와인셀러
에디터 홍유리 (yurih@noblesse.com)
취재 협조 호주 빅토리아 주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