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봐도 멋진 한국 고전 액세서리
규범 속 피어난 우리네 여인들의 아름다운 멋내기 문화.

빗과 함께 비녀, 뒤꽂이 등을 넣어두는 빗접과 다양한 종류의 향합 및 분통. 향을 담는 갑과 작은 상자 혹은 향주머니를 포함한 ‘향집’은 여인이 지니고 다니던 소지품이다. 향갑과 향합의 형태는 대체적으로 네모반듯한 각형과 원형, 나비·박쥐·매미 등 동물형, 석류·복숭아 등 과일형이 있다. 구급약을 넣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면을 고려했고, 이후 따로 몸에 차고 다니며 노리개로 발전했다.
다채로운 머리 장식
만약 현대사회에서 “당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빨간색·금색 등 특정 색상의 옷은 입을 수 없고, 결혼식 외에는 어떤 특정한 형상의 디자인을 쓸 수 없으며, 기혼인지 미혼인지 표시하고, 남편을 잃은 기혼녀는 특정 헤어핀으로 표시하고 다니시오”라고 한다면 온 나라가 들썩일 일이다. 색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디자인을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는 자유,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을 지킬 수 있는 그 소소한 자유가 우리 옛 전통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요즘은 이러한 선택 권리에 대해 자유라는 이름의 거창한 단어로 치장할 일도 없다.
그런 많은 제약 속에서 규범을 지키며 살던 여인네의 멋 내기는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전통 사회에서 혼인한 여인은 치렁치렁한 머리를 곱게 빗어 동글게 쪽을 졌다. 비녀를 꽂을 수 있는 쪽머리는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도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기혼녀의 머리 모양으로 사용된 후, 형태의 변화는 있어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곱게 다듬어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장신구 역할까지 한 비녀는 주인의 넋이 깃든 힘이 있으며, 내면 세계까지 가늠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겼다. 그래서 여성이 비녀를 잃어버리거나 빼면 정절이나 긍지를 잃음을 상징했다. 외형상 남근을 상징하는 비녀는 남자를 경험한 여자, 즉 기혼녀만 꽂을 자격이 있었다. 다만 단옷날에 한해 처녀도 창포 뿌리를 깎아 비녀를 꽂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비녀를 꽂는 데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금·은·옥으로 된 비녀는 상류층 여인을 상징했고, 남편을 잃은 여인은 나무를 깎은 비녀를 제사 때까지 쓰게 했다. 멋 내기도 세력가나 왕실 소속이어야 가능했다. 조선시대에는 봉황잠은 왕세자비, 용잠은 왕비만 꽂았다. 사대부 세력가들은 그나마 혼례나 각종 의식에, 서민에게는 혼례 때에만 용잠이 허락되었다. 헌종 후궁 김씨의 기록에 따르면 2월엔 모란 무늬, 4·8·9월엔 매화와 대나무 무늬 등 다양한 비녀를 꽂았다. 칠보도 젊을 땐 옥칠보로 세련되게, 나이 들어선 금칠보로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한다. 20세기 초 영친왕비의 용잠을 보면 새, 나비, 박쥐 등의 문양에 진주 등 흔들거리는 ‘떨 장식’ 12개가 있었다. 떨 장식은 보통 떨잠이라고 하는데, 움직일 때마다 옥판 위 장식이 떨리듯 흔들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왼쪽 헤어스타일에 제약이 많아서인지 빗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온, ‘대모’라 불리던 거북이 등껍데기로 만든 빗을 하나쯤 소장하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작고 둥근 물건은 청동거울, 네모난 형태의 얇은 물건은 거북이 껍데기로 만든 대모 거울이다.
오른쪽 각양각색의 비녀와 뒤꽂이.
아름다운 여인을 위한 도구
화장은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행위로, 몸을 청결히 하는 것부터 색조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오래전에도 시대마다 유행하는 화장법이 있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연지로 볼을 빨갛게 물들인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신라시대 때는 백분, 눈썹먹, 연지, 향수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의 파우더, 아이브로, 블러셔 등에 해당하는 도구가 당시에도 있었으니, 어떤 부분을 치장해야 예뻐 보인다는 것을 옛날 여인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조선시대의 화장은 단정한 몸, 게으르지 않게 가꾼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화려한 꾸밈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교의 영향 탓인지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기생이나 연회에 동원되는 의녀와 궁녀에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여인들이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백분을 바르고 미묵으로 눈썹을 그린 뒤 입술과 볼에 연지를 조금씩 바르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니, 지금의 풀 메이크업과 비슷하지 않을까. 먼저 세안으로 피부를 청결히 한 뒤 로션 같은 미안수, 크림에 해당하는 면약, 화장유 등을 발라 촉촉하게 정리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희고 옥 같은 피부를 선호해 꿀 찌꺼기인 밀랍을 지금의 팩처럼 펴 바르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떼어내는 방법으로 피붓결을 정돈했다. 특히 화장하기 전에는 낯빛을 정돈하기 위해 박과 식물을 긁어 추출한 진액이나 수세미 같은 것을 끓인 후 식혀서 쓰고, 수분이 많은 오이·참외·수박 등도 미안수 재료로 쓰였다니 지금의 스킨·로션과 다를 바 없다. 낯빛을 하얗게 만들기 위한 여러 재료 중 특히 분꽃 씨앗은 꽃이 진 뒤 씨앗을 말려 깨뜨리면 흰 가루가 나오는데, 여기에 돌가루·쌀가루 등을 일정 비율로 혼합해 백분을 만들어 사용했다. 흔히 “분통 터진다”고 표현하는데, 혹시 확 터지는 분꽃의 씨앗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분을 넣는 분통이 터질 때 그 가루와 혼란스러움을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명성황후가 백분의 고급 재료인 진주분을 쓰기 때문인지 창백해 보였다는 기록과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요즘 유행인 ‘한 듯 안 한 듯 분만 살짝 바르는’ 자연스러운 화장을 선호했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말 황실과 사대부가의 화장법을 짐작할 수 있다.
2015년에 발견된 조선시대 화협옹주(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 묘 출토품 목록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빗, 먹, 청동거울을 포함한 화장 용기, 청화백자 향합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백자 화장 용기 12건 중 중국산 7건, 일본산 4건으로 수입산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얼굴을 곱게 꾸미는 ‘단장’이라는 행위의 성격상 화려하고 정교하기로 이름 높던 수입 자기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서운해할 일도 아니다. 반대로 다른 나라는 단아한 선의 우리 도자기를 열망했으니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제약이 많던 시대에도 우리네 여인은 꾸미고 가꾸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세력가나 왕실 소속이어야 멋 내기가 가능했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요즘 멋쟁이는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듯싶다.

왼쪽 작은 경대는 빗접과 함께 규수의 필수품이었다. 앞에 놓인 것은 소지하기 좋은 거울.
오른쪽 다양한 종류의 장도는 여인이 지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소지품이었다. 특히 은장도는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거나 노리개에 달아 장식하곤 했다. 노리개용 장도에 부착한 액세서리는 귀이개부터 방울, 작은 젓가락까지 다양했다.
에디터 이정주(jjlee@noblesse.com)
사진 박우진
글 손란(손스마켓메이커스·무명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