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사진을 찍고 보고 감상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일상에서 시작해 예술로, 다시 우리의 삶으로 그 저변을 넓혀가는 사진의 무게감과 중요성에 대해.
정희승, Unfinished Sentence 1 (A set of ten framed photographs), 나무 프레임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61×100cm, each-2, 2014
사진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독자에게 던지는 한 가지 질문. 오늘 아침 일어나서 지금 이 시간까지 당신이 본 사진은 몇 장이나 될까? 설마 한 장도 못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막상 무얼 보았느냐고 물으면 망설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신문 보기를 건너뛰었다고 해도 지나가는 버스나 길거리 광고판에 한순간쯤 시선을 주었을 것이고 손 안에서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스마트폰의 유혹을 온종일 뿌리칠 순 없었을 테니 우리가 하루 내내 한 장의 사진도 보지 않고 살아가기란 여간해선 불가능하다. 의식하지 못할 뿐 공기처럼 사진을 접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 문제는 이 사진이라는 걸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가장 넓은 범위에서 사진(photographic images)은 카메라로 찍은 모든 이미지를 말한다. 신문에 실린 뉴스 사진부터 광고에 쓰인 제품 사진, 잡지 화보 속 패션 사진이나 유명인 사진, 집 안을 장식한 가족사진, 화랑이나 미술관에 전시한 작품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영역은 실로 일상의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진의 영역에 대한 구분이 이제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기능을 앞세운 사진이 어떻게 예술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흔히 현실의 기록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기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사진이 사실을 전달하는 일에 몰두한 20세기 중반까지 객관적 기록에 대한 믿음은 유효했다. 낯선 오지를 찾아가거나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 자체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답지하고 온갖 신기하고 끔찍한 장면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생생함만으로는 새로울 것이 없어진 이후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해졌다. 이때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은 본격적으로 작가의 개인적 관점과 해석을 담기 시작했다. 사적(私的) 시각으로 바라보는, 장소와 사건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작가주의적 접근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로써 다큐멘터리 사진은 신문과 잡지에서 전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라이프(Life)>나 ‘매그넘(Magnum)’ 같은 미디어나 에이전시의 이름이 아닌 작가 한 명 한 명의 이름으로 찍힌 사진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있다. 지난해 뉴욕의 ICP와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시에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 브라질 출신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 1944년~)의 전시가 대표적 성공 사례다. 이처럼 사진은 기능 중심의 분화 단계를 거쳐 모든 분야에서 차별적 시각을 강조하는 영역으로 이전했다. 결과적으로 영역을 불문하고 완성도와 차별성을 인정받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화이트 큐브 안에 전시하고 에디션을 관리하며 판매하는 방식으로 예술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예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사진은 공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복제 가능성에 따른 우려를 불식하고 미술 시장의 총아로 부상하기까지 아트 마켓에서도 이미 한 세대 이상 검증의 역사를 거쳤다. 이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1990년대 독일 사진의 약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도 비싼 작품가로 널리 알려진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1955년~)와 토마스 슈트루트(Thomas Struth, 1954년~) 등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출신 스타 작가들은 예술가로서 기본기를 다지며 성장한 뒤셀도르프의 날씨처럼 차갑고 중립적인 사진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었다. 그들의 작품에는 끈끈한 감정이나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는 식의 가치 판단이 담겨 있지 않다. 다만 기계로 포착할 수 있는 극단의 디테일을 강조한 화면 구성에 투명도가 높고 매끈한 압축 아크릴로 마무리한 작품을 거대한 스케일로 제시할 뿐이다. 그들의 사진은 이전에 어떤 매체도 보여주지 못한 비현실적 현실에 주목한다. 사진 속 세계의 세밀함과 거대함은 인간의 눈이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오히려 낯설거나 매혹적이다.
황규태, 청춘양말1, 피그먼트 프린트, 100×50cm, 토탈 미술관에서는 6월 21일까지 사진의 거짓말에 대한 전시 <거짓말의 거짓말:사진에 관하여>가 열리고 있다. 국내 대표 사진가들의 작품이 대거 소개되어 있어 사진매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학적 측면 외에도, 사진은 예술 시장에서 사진의 가격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예측을 꾸준히 넘어서는 ‘기록 경신’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사진이 지닌 현대예술로서의 가치가 독일 사진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2009년 금융 위기 이후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예술 시장에서 사진의 비중은 꾸준히 성장해왔는데, 그 이면에는 전통적 아날로그 방식 사진(은염 인화 흑백사진)의 작지만 강한 저력이 숨어있다. 작년 프랑스에서 열린 경매에선 초현실주의자 맨 레이(Man Ray)가 1930년에 찍고 1970년에 프린트한 ‘기도하는 여인(La Priére)’이 추정가의 10배에 달하는 19만4000유로(약 2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예술 사진의 선구자 구스타브 르 그레(Gustave le Gray)가 1857년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26만9000달러(3억2000만 원)에 팔리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미술 시장 통계를 발표하는 아트택틱(ArtTactic)에 따르면 2013년 크리스티·소더비·필립스 경매의 사진 경매 판매액은 5억7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30%가량 증가했다. 전통적 미술품 시장에서 다른 매체에 비해 사진의 성장 여력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있다. 사진의 약점으로 꼽히던 복제성은 오히려 합리적 가격 경쟁력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철저한 에디션 관리가 자리 잡으면서 많아야 10장 안팎으로 제한된 에디션은 금세 동나 인기 작가의 작품은 놀랄 만큼 가격이 오르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 애호가들은 사진의 예술성이 전통적 회화에 비해 뒤진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제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사진에 대해 굳이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예술품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소수의 예술가에 의해 생산되고 높은 교육 수준과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향유한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시들해졌다. 19세기 이후 인쇄술과 대중매체의 발전은 예술 작품 생산에서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고, 예술품의 유통과 소비 경로를 다양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발명한 사진은 태생적으로 대중적 예술의 기반 위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의 디지털 환경은 사진술을 모든 사람의 기술로 만들었고, 급기야 예술 장르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이제 사진은 예술가와 애호가 양측을 모두 사로잡는 매체가 됐다.
사진을 활용하는 작가는 화가, 조각가, 설치미술가, 그래픽 디자이너, 미디어 아티스트 등 그 영역을 물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여기에 사진의 대중적 예술성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바로 스마트폰 사용자들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사용자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장이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한다.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사진을 잘 찍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고, 잘 찍은 사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전공을 불문하고 많은 젊은이가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어 국내 작가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일상적 관심이 예술적 성취로 이어지는 지점에 사진이 탄탄하게 터를 잡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신수진(사진심리학자, 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사진 제공 토탈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