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서 드러난 얼굴
얼굴을 두꺼운 물감으로 덮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회화 작가 조셉 리

조셉 리 작가. Photo by Phil Chester.
조셉 리
1987년 미국 인디애나 출생으로 배우이자 화가다.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을 통해 주목받으며 프라임타임 에미상(Primetime Emmy Awards)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미술 작품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느낀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발견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7년부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고 개인전을 열었으며 로스앤젤레스, 뉴욕, 도쿄에 이어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선보인다.

Self, Oil on Wood Panel, 101.6×76.2cm, 2022.
아티스트로서 연기와 회화 창작을 병행하는 조셉 리.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정체성의 혼란이 그를 배우와 작가의 삶으로 이끌었고, 작품에 두껍게 얹은 획으로 지워진 얼굴과 직관적 원색으로 표현한 풍경은 자신만의 색을 탐구한 흔적이다. 거침과 섬세함,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모호함과 명확함. 조셉 리의 모든 창작 활동에는 양극단의 요소를 한데 모아 균형과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Pathless No.1, Oil on Wood Panel, 25.4×20.32cm, 2023.
한국 독자들에게 작품을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작품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배우이자 순수 미술가 조셉 리입니다. 한국에서 전시를 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정말 설레고 기대돼요. 저에게 작업은 현재에 머무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사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그림에선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획을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의 획도 같지 않고, 복제할 수도 없죠. 이런 면에서 각각의 획은 고유성과 존재감을 지닌, 특별한 것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러 획이 쌓이는 순간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작품으로 완성될 때까지 인내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배울 부분인 거죠. 인생에선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공존을 통해 궁극적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작년에는 화제의 작품 〈성난 사람들(Beef)〉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배우로서 이름을 알렸어요. 배우와 회화 작가로 동시에 활동하다 보면 그에 따른 상호작용이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배우와 작가라는 직업은 일하는 방식도, 특징도 완전히 달라요. 일단 연기 활동은 공동 노력의 산물이에요. 무대에 있든, 촬영장에 있든 자신이 큰 퍼즐의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바로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 환경 속에 있다 보면 겸손한 마음이 깊이 자리 잡게 되죠. 반면 작가로 활동하는 건 정반대입니다. 저에게 미술 작업은 매우 나르시시즘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바탕이 돼요. 혼자만의 공간에서 다른 이의 간섭 없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죠. 제 안의 창의성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선 그 겸손한 마음과 자기애 사이의 균형이 필요해요.
서로 반대되는 특징이 있네요! 그렇다면 그림을 처음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배우가 되는 것이 주된 목표였지만 로스앤젤레스에 온 첫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적은 없고, 연기 연습을 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굴을 소재로 작업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인지할 수 없도록 지워진 얼굴이 인상적이에요. 이번 전시가 저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는 몇 년 전 배우로서 한국에서 일할 때 이런 방식으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당시에 서울 호텔에서 3개월 동안 생활했어요. 평생을 거의 모두가 외국인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와 외향적으로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낭만적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실제로는 눈동자 색보다 문화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더라고요. 스스로 회색 지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어느 문화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어요. 그렇게 순간적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밤에 생각을 멈추고 잠들기 위한 방편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호텔 방에는 큰 캔버스를 놓을 공간이 없어서 안국역 근처 서점에 가서 초상화 사진집을 샀습니다. 그 책장에 그림을 그리며 ‘완벽한’ 얼굴을 왜곡하는 방법을 찾았죠. 바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때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스물아홉 살 한국계 미국인 남성의 모든 디테일을 없앴어요. 이후 제 모든 초상화엔 얼굴이 지워진, 모호함이 존재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처음 그 방법을 떠올리셨다니 흥미로워요. 당시 자신의 얼굴에서 어떤 부분을 지워내려 했나요? 저는 주로 비아시아인이 많은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양한 정체성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를 둘러싼 작은 세상에서 제가 닮고 싶은 모습을 늘 찾으려 한 것 같아요. 29년 동안 한국인, 미국인, 더 나은 아들, 남성적인 남자, 성숙한 어른 등 다양한 모습을 계속해서 시도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저는 온전히 ‘타자’로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느꼈고, 다른 사람에게서 제 모습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삶을 경험한 사람은 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때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거죠. 오히려 제가 시도한 이전의 여러 모습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비주류 문화와 트라우마,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인류의 보편성과 공통점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의 고유성을 찾는 이중성을 작품에 담게 되었습니다.

Blocks, Oil on Wood Panel, 76.2×60.96cm, 2024.
그렇게 6년이 지난 지금, 작가님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아직 그 과정 속에 있어요. 작년에 서울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한국을 아세요?”라고 물었어요. “대한민국은 변화하는 나라예요. 우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정체되지 않고 항상 진화하는 정체성을 떠올렸어요. 물론 여기에 내재된 어려움이 있지만,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부심이 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제 정체성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항상 진화하고, 저에게 맞는 것을 찾을 때까지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보는 과정이 끝없이 계속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요즘은 내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작품에 작가님의 매 순간이 깃들어 있는 거네요. 얼굴과 더불어 풍경도 많이 작업하시는 것 같아요. 어릴 적 저는 큰 대학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어요. 그런 게 어떤 면에서는 공항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제가 일상을 보내는 장소에 전 세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니까요. 덕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나이가 들면서 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었어요. 그렇게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친구들을 통해 다양한 추억을 쌓았고, 또 자연에도 매료되었어요.
그랬군요. 최근에 주변 환경에서 영감을 받은 적도 있나요? 작년에는 일 때문에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밀라노와 나오시마 풍경을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이동하며 그림을 그리면 방해 요소가 적어서 좋아요. 간단한 작업 도구로 눈앞의 대상을 포착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낯선 환경에선 더 감각에 집중할 수 있어요.
작업 스타일도 작가님의 환경과 어우러지는군요. 작업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재료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그림을 그릴 때 프로세스를 정해놓고 시작하진 않아요. 제 자아는 항상 흐름을 통제하려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거든요. 제 무의식이 의식보다 뛰어난 예술가예요. 서둘러 그리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리는 그림도 있고, 가끔은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을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오기도 해요. 또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생산적이죠. 그런 흐름에 빠져 몇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다가 다음 날엔 붓을 들지 않고 그저 빈 캔버스만 바라보기도 해요.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구도와 색상 그리고 무게감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다양한 재료로 작업할 때도 균형을 추구해요. 디테일을 살리고 실을 꿰는 지루한 작업도 즐기지만 물감을 떠 얹는 거친 작업도 좋아합니다. 여기서는 억눌려 있다가 저기서 폭발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죠. 이런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번에 여러 그림을 작업하는 편이에요.
오는 9월 3일부터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리는 〈Unmasking the Self〉전에 참여하는 소감과 앞으로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노블레스 컬렉션과 몇 년 전부터 이야기를 나눴는데, 드디어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권오상 작가의 열렬한 팬이라 ‘Unmasking the Self’라는 하나의 주제로 함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어 영광입니다. 로스앤젤레스 현지에서도 전시를 한 지 몇 년이 지났어요. 다음 계획은 그곳에서 제 작품을 전시하는 겁니다. 그곳에서 배우로서 촬영도 하고, 새로운 작품 컬렉션을 만드는 데 시간을 할애할 계획입니다.

2023년 도쿄 디젤 아트 갤러리(Diesel Art Gallery)에서 열린 〈Pleasure in the Pathless Woods〉전 전경.
에디터 정희윤(heeyoon114@noblesse.com)
사진 필 체스터(인물), 조셉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