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불어오는 미술의 바람
런던에 교통 혁명을 가져올 크로스레일, 여기에 미술을 더하면?

< Art Capital: Art for the Elizabeth Line >전에서 선보인 스펜서 핀치의 작품 컨셉.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 지하철은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낡은 시설과 잦은 고장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열차가 예고 없이 운행을 멈추고, 1년 내내 하는 보수공사로 주말엔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또 버커루, 피커딜리, 센트럴 같은 오래된 노선에선 휴대폰 통화도 되지 않는다. 에어컨도 없어 여름철엔 반드시 시원한 물을 챙겨야 한다. 이런 총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2005년 크로스레일(Crossrail)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이는 런던과 수도권 철도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프로젝트. 런던의 동서를 잇는 ‘크로스레일1’을 시작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크로스레일2’, 순환 선로인 ‘크로스레일3’를 설치할 예정이다. 그중 엘리자베스 라인(Elizabeth Line)으로 명명한 크로스레일1은 2019년 개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1 미국 출신 작가 스펜서 핀치. 2 이스라엘 출신 작가 미칼 로브너.
변화에 신중한 런던에서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만큼 크로스레일은 벌써 런던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 로이드 뱅크의 조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라인이 설치되는 곳 주변의 주택 평균 매매 가격은 2014년 34.4만 파운드(약 5억1000만 원)에서 2016년 12월 42.1만 파운드(약 6억3000만 원)로 22% 상승했다. 이는 같은 시기 런던 주택 평균 매매 가격 상승률인 14%보다 8%나 높은 수치. 주택뿐 아니라 런던 도심 오피스 임대료의 상승세도 뚜렷하다. 부동산 중개업체 JLL에 따르면 2015년 이후 1년간 엘리자베스 라인 인근 오피스의 임대료는 최저 5%에서 최대 28%까지 치솟았다. 그야말로 런던의 주거 지형도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엘리자베스 라인 개통은 런던의 미술 지형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리버풀 스트리트, 본드 스트리트를 비롯한 주요 역 곳곳에 대형 공공 미술 작품이 들어서기 때문. 엘리자베스 라인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 기획은 세계적 도시 문화 기획 단체 퓨처시티(Futurecity)가 맡았다. 이들은 이미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인 올드 스피털필즈 마켓,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의 예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퓨처시티는 이번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위해 런던의 주요 갤러리 일곱 곳과 협업, 프로젝트 참여 작가를 선정했다.
엘리자베스 라인의 완공까지 시간이 꽤 남은 만큼,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작품이 선정될지는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지난 3월 13일부터 5월 6일까지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 Art Capital: Art for the Elizabeth Line >전을 통해서다. 이 전시에선 공공 미술 프로젝트 참여 작가 9인의 스케치와 축소 모형, 프로토타입 작품을 공개했다. 전시에 따르면 총 7개 역에 공공 미술 작품을 설치할 예정이다.

리버풀 스트리트역에 설치할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렌더링 이미지.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리버풀 스트리트 역이다.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와 콘래드 쇼크로스(Conrad Shawcross)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어서다. 특히 런던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인기는 세계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사실 2012년은 런던이 쿠사마 야요이의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테이트 모던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런던 최고 백화점으로 꼽히는 셀프리지스의 윈도를 물방울무늬로 뒤덮은 것으로 모자라 입구에 그녀를 본뜬 거대 조각상까지 세웠으니 말이다. 2016년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역시 긴 줄을 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이번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스테인리스 스틸 풍선이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몽환적인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영국의 촉망받는 신예 작가 콘래드 쇼크로스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삼각형을 모티브로 한 기하학적 조형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 2015년 로열 아카데미의 마당에서 선보인 ‘The Dappled Light of the Sun’, 2017년 세인트 판크라스 역 테라스에 매단 ‘The Interpretation of Movement’ 등의 설치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는 3차원 공간에 자유롭게 선을 그려 조각한 듯한, 그간의 작업과는 조금 다른 매력의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카나리 워프 역에 설치할 미칼 로브너의 작품 예상도.
한편 런던 내륙으로 연결되는 기차역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패딩턴 역엔 리슨 갤러리 소속 미국 작가 스펜서 핀치(Spencer Finch)의 작품을 설치한다. 스테인드글라스, 녹아내린 양초, 전망경 등 다채로운 재료로 인간의 경험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그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 직접 그린 구름 풍경을 120m 높이의 캐노피 유리 표면 위에 전시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또 런던의 쇼핑 중심가 본드 스트리트 역에는 영국 작가 대런 아몬드(Darren Almond)의 작품을 전시한다. 2005년 터너상 최종 후보에 오른 그는 시간과 장소, 기억을 주제로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든다. 한국에선 시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사진 작품 ‘Full Moon’ 시리즈로 알려졌는데, 이번 프로젝트에선 동판 패널에 텍스트를 새긴 다소 개념적인 작품을 발표한다. 토트넘 코트 로드 역에는 이미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줄무늬 작품과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의 타일 작품이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와 더글러스 고든(Douglas Gordon)의 작품이 추가된다. 가고시안 갤러리의 추천으로 선정된 이들은 각자의 시그너처 작업인 벽면을 채우는 황금빛 프레스코화와 네온사인 작품을 공개한다. 그야말로 역 전체가 미술관처럼 변모할 예정.
이외에도 화이트채플 갤러리 소속의 샹탈 조페(Chantal Joffe)는 화이트채플 역에 이스트 런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권 사람을 묘사한 콜라주 작품을 선보인다. 금융회사가 몰려 있는 카나리 워프 역에는 페이스 갤러리의 미칼 로브너(Michal Rovner)의 디지털 작품이, 패링던 역에는 사디 콜스 HQ 갤러리의 사이먼 페로틴(Simon Perotin)의 종이 작품이 전시된다.
크로스레일의 의장 테리 모건(Terry Morgan)은 “엘리자베스 라인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수도권에서 가장 중요한 아트 신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서 한발 더 나아가, 크로스레일이 런던의 미술 지도를 새롭게 그려낼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크로스레일이 가져올 런던 아트 신의 변화를 기대해보자.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글 양혜숙(기호 리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