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영웅이 되는 방법
슈퍼히어로 영화가 할리우드의 주류가 되며 영웅신화가 현실로 침투한 지금,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본다.

왜 사람들은 슈퍼히어로에 열광할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에 열 광하는 키덜트의 유아적 취미일까? 아니면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스며들어 있는 영웅신화의 현대적 재현일까? 사실 이상한 옷차림만 빼고 보면 현실의 영웅과 영화 속 슈퍼히어로의 차이는 없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일상의 스포츠스타나 난세를 구원할 지도자에게도 열광한다. 평범한 우리 사이에서도 비범한 영웅이 탄생하길 간절히 바라는 거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히어로즈>는 마침 이런 문구로 시작했다. “비범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가 출현하고 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이들은 세계를 구할 뿐 아니라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의 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엔 시작이 있다.” 영웅은 남자들이 찾는 이상적 남성상이다. 영웅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의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거나 그 가치를 대표할 만한 사람’ 이다. ‘새로운 질서나 사상을 위해 싸우는 통찰력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석한 사전도 있다. 어찌 됐든 ‘대중의 사상과 가치 를 대표하는 이’를 우린 영웅이라 부른다. 그래서인지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영웅이 되길 꿈꾼다. 조금 유치하긴 해도 드라마에서 자주 써먹는 클리셰를 이용해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혹시 나도무술을 익혀 거리에 나가면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영화 <킥애스>가 괜히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게 아니다. 몇 달 전 극장가를 떠들썩하게 한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도 마찬가지다. 찌질한 거리의 소년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귀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조직 킹스맨에서 평민인 주 인공이 킹스맨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에서 킹스맨은 코스튬 슈트 대신 정장 슈트를 입고, 우산을 첨단 무기로 쓰는 21 세기의 제임스 본드다.

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가 어른의 동화와 판타지로 부상한 건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워치맨>은 일면적이던 영웅의 캐릭터에 과격한 폭력 묘사와 정치 그리고 철학을 더해 히어로의 유년기를 마감하고, 만화를 ‘성인의 문학’인 그래픽 노블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한편 프랭크 밀러와 앨런 무어 이후 등장한 슈퍼히어로는 단순한 정의의 사도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정의를 위해 맹목적으로 싸우던 슈퍼히어로의 내면에선 복잡함을 넘어 균열이 일어나고, 선악의 구별이 모호한 슈퍼히어로도 등장한다. 이를테 면 <데어데블>은 맞서 싸우는 악당보다 야비하고 폭력적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슈퍼히어로다. 악과 결탁해 청부업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영웅 놀이에 뛰어들기도 한다. 히어로물의 정서는 사실 이렇게 유치하고 미성숙하다. 복잡한 세상과 그만큼 복잡한 사람의 심리와 동기를 회뜨듯 가볍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슈퍼히어로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 이 시대의 영웅은 갈수록 복잡해질 것이다. 사실 영웅이 된다는 건 어른이 되는 거다.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저자 크리스 토퍼 보글러는 “나는 영웅의 여정이 인생의 지침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삶의 기술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는 완벽한 매뉴얼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려 신화 속 영웅을 한번 살펴보자.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 퇴치, 크레타의 황소 잡기,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 가져오기 등 12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수련과 모험을 거쳐야 완전한 영웅이 될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가 하면 성인식은 원시 부족에게도 수련과 모험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혼자 들판에 나가 버펄로를 잡아오거나, 얼굴에 문신을 새기면서 고통을 참아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걸 이겨내면 공동체는 비로소 그를 한 명의 어른으로 대접했다.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의 출발에도 자신의 욕망이 아닌, 고통을 통해 얻어낸 신념이 필요했다. 스파이더맨은 거미에게 물려 능력을 얻지만, 그가 비로소 영웅이 되는 건 삼촌의 죽음 때문이었다. 자신이 외면한 악인이 삼촌을 죽인 걸 보고 깨달은 것이다. 배트맨의 성인식은 더 가혹하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은 자신을 단련시킨다. 고대 무술과 첨단 무기로 무 장한 그는 복수심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잃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절대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 자신 또한 부모를 죽인 악당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신이 강해졌다는 걸 깨닫고 거리에 나가 악을 물리치는 건 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행동이다. 사실 무술을 배울 때 제일 위험한 것도 ‘1단’이다. 어느 정도 강해진 걸 느끼고 힘을 마구 발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정말로 강해지면, 자신의 강함을 인지하고 자제하게 된다. 그 단계까지 가야 진정한 무도인이라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이고, 영웅이다. 영웅은 시대의 산물이고, 시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21세기의 슈퍼히어로는 우리와 동떨어진 저 먼 세계의 공상에 머물지 않는다. 슈퍼히어로의 고뇌도 보통 사람들이 갈등하는 정체성의 고민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슈퍼히어로는 더는 아이들이나 보는 공상 속 영웅이 아니다. 그들도 결국 인간이고, 보통 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도 아니다. 21세기 벽두에 나온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에서 평범한 해커가 구세주 네오가 된 것처럼 신과 구세주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가상현실은 곧 현실과 다르지 않은 세상이 됐다. 이미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 게임에서 슈퍼히어로나 무림의 절대 고수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가상현실의 의미를 깨달은 세대에게 슈퍼히어로의 존재는 공상이 아닌 현실이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 하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는 존재. 그걸 알기에 우린 스크린 속 슈퍼히어로에게 열광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힘들고 고통스러운 성인식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글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일러스트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