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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화가를 만나다

ARTNOW

베니스 비엔날레는 내년에 열린다. 그런데 올해도 여전히 베니스를 찾는 사람이 많다. 팔라초 그라시에서 열리고 있는 시그마르 폴케(Sigmar Polke)의 개인전(11월 6일까지) 때문이다. 아라리오뮤지엄 류정화 부디렉터도 이 행렬에 동참했다.

팔라초 그라시에 들어서자마자 아트리움에서 만날 수 있는 시그마르 폴케의 대형 회화 작품들

베니스는 나에게 늘 떠들썩한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2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비엔날레의 긴 관람 행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홀로 찾은 베니스는 영 어색했지만 조용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상쾌했다. 난 지금 베니스에 온 유일한 목적인 시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년, 폴란드 출생, 독일 사망)의 개인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올해는 시그마르 폴케가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래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적 현대미술 컬렉터 프랑수아 피노가 운영하는 미술관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는 이탈리아 최초로 폴케의 첫 회고전을 준비했다. 팔라초 그라시는 이탈리아 건축가 조르조 마사리(Giorgio Massari)가 설계한 우아한 베네치아 양식 건축물로 1748년부터 1772년까지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그라시(Grassi) 가문을 포함해 여러 소유주의 손을 거친 이 저택을 2005년 프랑수아 피노가 매입한 후 미술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개축을 맡겼고, 2006년 오픈한 이래 피노 컬렉션을 비롯해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베니스의 주요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입장권을 끊고 아트리움에 들어서자마자 2005년부터 2007년에 걸쳐 제작한 대형 회화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폴케는 1987년부터 얇은 면사에 노란색 래커를 뿌려 앞뒤에서 모두 반대편이 보이는 반투명 캔버스를 이용해 작업해왔다. 얇은 천에 래커가 모두 스며들면 천 같기도, 또는 플라스틱 같기도 한 반투명 캔버스로 변하는데, 천 너머로 천을 지지하는 격자 나무틀과 앞쪽에 천을 이어 붙인 이음매가 고스란히 보일 정도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의 높은 천장 아래에는 가로 5m, 세로 3m에 달하는 거대한 회화 작품들이 전시장을 둘러쌌다. 미술관의 벽을 이용하지 않고 둥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철골 구조를 만들어 작품을 설치한 덕분에 관람객은 작품의 앞과 뒤를 산책하듯 거닐며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 폴케 특유의 보라색 화면과 노란색의 거친 붓질은 마치 ‘우리는 이제 이러한 부정확하고 비실제적이며 모든 것이 응축된 세계로 진입한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경찰 돼지(Polizeischwein), Acrylic on Canvas, 302×225cm, 1986, Private Collection
Photo by Matteo De Fina ⓒThe Estate of Sigmar Polke by SIAE 2016

팜나무 그림(Das Palmen-Bild), Dispersion on Patterned Fabric, 91.5 ×75.4cm, 1964, Private Collection
Photo by Matteo De Fina ⓒThe Estate of Sigmar Polke by SIAE 2016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두 축은 ‘역사성과 시대성에 대한 인식의 세계’와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진한 다양한 실험의 세계’다. 1층에서 2층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가장 먼저 1986년에 제작한 ‘경찰 돼지(Polizeischwein)’가 관람객을 반긴다. 풀밭에 다리를 굽히고 앉은 경찰관 옆으로 ‘킁킁’거리는 돼지가 독일 경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장면을 작가는 흑백의 망점으로 처리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듯 폴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억압적 장치, 독일 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와 사회 현안을 소재로 한 작업을 많이 선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손(얼굴을 감싼)(Hande(vorm Gesicht))’(1986년)과 ‘미국-멕시코 접경선(Amerikanisch-Mexikanische Grenze’(1984년), ‘난민들(Fluchtende)’(1992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 역시 폴케의 시그너처 양식이라 할 수 있는 망점으로 처리한 것이 공통점이다.
폴케의 망점 회화는 로이 릭턴스타인과 앤디 워홀의 벤데이 도트(Benday-dot)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팝아트 작가들의 망점이 실크스크린의 기계적 그래픽 양식을 따랐다면 폴케의 망점은 실제로 점을 하나하나 찍거나 덧칠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 이 차이를 잘 모르겠다면 그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멀리에서 보기를 반복해보자. 우선 작품에 가까이 가면, 폴케가 재현한 현실의 이미지가 정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계속 보다 보면 이미지를 구성하는 점은 하나 둘 부유하다 희미하게 사라지지만, 또다시 어느새 또렷하게 집합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서서히 뒷걸음을 치자 망점 뒤에 그린 정치·사회 현안의 이미지가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낸다.
전시는 회화와 드로잉, 필름, 설치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울러 폴케의 작품을 구석구석 소개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시작한 초기 작품을 다수 소개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폴케가 당대의 흐름을 연구하고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뒤셀도르프에서 수학할 당시 스승이던 요제프 보이스와 다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대나무 소생술(Wiederbelebungsversuch an Bambusstangen)’ (1967년), ‘텔레파시 회의 I(윌리엄 블레이크-시그마르 폴케) (Telepathische Sitzung II(William Blake-Sigmar Polke)’(1968년), 팝아트의 영향으로 천 같은 일상용품을 이용한 실험인 ‘팜나무 그림(Das Palmen-Bild)’(1964년), ‘에인절(Engel)’(1962년) 등도 전시되어 있다.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 I-IV(Hermes Trismegistus I-IV), Artificial Resin and Lacquer on Polyester Fabric, 202×192cm(I), 302.3×402.6cm(II-IV), 1995, De Pont Museum
ⓒ The Estate of Sigmar Polke by SIAE 2016

소극적 가치 II(Negative Value II), Dispersion Paint, Red Lead Underpainting, Resin, Pigment and Enamel Paint on Canvas, 260×200cm, 1982, Private Collection
Photo by Matteo De Fina ⓒThe Estate of Sigmar Polke by SIAE 2016

폴케는 평생에 걸쳐 재료를 실험한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심지어 독성이 있는 재료조차 마다하지 않았는데, 비소와 납, 망간, 철, 칼륨, 은, 질산은, 레진, 아연 등의 금속과 래커, 안료, 수지 등의 재료를 함께 사용한 회화 작품은 각 재료가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다양한 흔적으로 가득하다.* 1982년 제작한 보라색 작품들을 보자. ‘소극적 가치 II(Negative Value II)’(1982년)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세 작품은 각각 알코르(Alcor), 미자르(Mizar, 모두 북두칠성을 이루는 별), 알데바란(Aldebaran, 황소자리 별)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모두 산화납으로 바탕을 칠한 후 보라색 안료를 전면에 사용했다. 공간 전체를 휩쓴 보라색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성운의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실험 덕분에 폴케는 ‘연금술사’, ‘마법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나 연금술을 소재로 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 I-IV(Hermes Trismegistus I-IV)’(1995년)라는 네 작품의 제목은 후기 이집트에서 모든 지식의 아버지이자 수호자인 ‘토트(Thoth)’를 지칭하는 가장 위대한 헤르메스를 뜻한다. 폴케는 독일 물리학자 미카엘 마이어(Michael Maier)가 제작한 연금술 판화에 등장한 이미지를 그림에 투사했고, 안료와 래커가 흐른 흔적은 아름다운 겹을 이루었다.
시그마르 폴케와 베니스의 인연은 각별했다. 그는 이곳에서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황금사자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개인적 여행을 위해 베니스를 자주 찾았다. 필름메이커로도 활동한 폴케는 16mm 흑백필름을 사용해 자신의 사생활과 여행지, 정치적 견해, 혹은 창조적 영감을 영상에 담았고 현재 100시간가량의 영상 자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라초 그라시는 이번 전시에서 폴케가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9점의 필름을 특별 상영 중인데, 오는 9월 한 차례 더 상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마법의 등: 개의 이야기(Laterna Magica: De Geschichte vom Hund), Artificial Resin on Polyester Fabric, Painted Recto and Verso, 6 Elements, 130×150cm Each, 1988~1992, Private Collection

폴케의 필름은 그의 회화 작업과 상당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러 겹을 레이어한 장면, 흐릿한 이미지, 롱 컷, 넓게 움직이는 카메라, 갑작스러운 요소의 삽입 등은 많은 부분 회화 작업에도 활용되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8년여에 걸쳐 제작한 ‘마법의 등: 개의 이야기(Laterna Magica: De Geschichte vom Hund)’(1988~1992년) 시리즈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총 6개의 작품으로 구성한 이 시리즈는 전시장에 마련한 별도의 육각형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짙은 자주색 공간의 벽에 작품이 마치 유리창처럼 삽입되었는데, 관람객은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옮겨 다니면서 구경하게 된다. 폴리에스테르 천 앞뒤에 래커로 그린 이미지들은 독립적으로, 때론 서로 간섭하는 듯 표현되었다. 여러 겹의 화면은 평평하고 고정된 회화 화면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으로 변화시킨다.
전시를 둘러보다 보니 2014년 시그마르 폴케의 개인전이 테이트 모던에서 열릴 당시, 화가 피터 도이그가 이 미술관의 시니어 큐레이터 마크 고프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처음 만났을 때 폴케는 저를 이렇게 놀렸어요. “피터 도이그, 피터 도이그, 당신은 정말 화가네요, 정말 화가예요(Peter Doig, Peter Doig, You are a REAL painter, you are a REAL painter)”라고.” 폴케는 도이그가 유화를 사용하는 화가(oil painter)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좁은 의미에서 ‘진짜 화가(real painter)’라는 점을 은근히 꼬집은 반면, 본인은 화가로서 그만의 차별화된 위치를 선점한 것이다. 폴케에게 ‘화가’란 단순히 한 매체에 집중하는 ‘진짜 화가’, ‘유화 화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폴케가 생각하는 회화는 실로 다양한 재료와 매체를 사용해 회화의 언어를 재편성하는 것이며, 새로운 회화의 언어를 갖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모두 둘러본 후 전시장을 빠져나가기 전 다시 한 번 1층에 설치한 대형 회화 앞에 섰다. 이 작품들 중 ‘축의 시대(Axial Age)’(2005~2007년)는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탈리아관에 전시된 작품이다. ‘축의 시대’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주장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지성의 기축이 되는 시기인 기원전 800년부터 200년 사이의 시기를 이른다. 폴케는 자신의 도전과 실험이 회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요소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물질적 구조와 축을 바꾼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축을 움직인 시그마르 폴케의 회화는 그렇기 때문에 회화의 확장이 아니라 전환과 응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11월 초까지 이어진다.

서커스 인물(Zirkusfiguren), 2005, Pinault Collection
Photo by Matteo De Fina ⓒThe Estate of Sigmar Polke by SIAE 2016

*각주 김향숙, <회화의 연금술: 시그마르 폴케의 변종 회화, 현대미술사 연구 23>, 2008년 6월, 51쪽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류정화(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 사진 제공 팔라초 그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