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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시간

FASHION

세계 유수의 브랜드가 성공의 요인으로 제시하는 명제가 있다. ‘전통과 혁신의 조화.’ 이 간단하고도 복잡한 진리는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워치메이커 제니스가 기계식 시계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에 머물게 한 요인이다. <노블레스>는 그 자세한 면면을 확인하고자 스위스 르로클에 위치한 제니스 매뉴팩처로 향했다.

스위스 르로클에 자리한 제니스 매뉴팩처

쾌적한 환경의 매뉴팩처 내부

무브먼트에 들어가는 부품. 핀셋으로 집어야 할 정도로 작다.

정교한 케이스 조립 과정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나의 시계가 탄생한다.

바젤월드 취재를 앞두고 제니스의 매뉴팩처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것의 정점에 있다’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계를 생산하는 이들의 심장부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니! 이른 아침 숙소가 위치한 뇌샤텔을 떠나 르로클(Le Locle)로 향하는 길에 내내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르로클은 스위스 뇌샤텔 주에 위치한 평화롭고 작은 도시로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 시계 산업의 요람이다. 드넓은 평야를 차로 달리길 30여분. 이윽고 몇몇 워치메이커의 매뉴팩처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드디어 깊숙한 자락에 위치한 제니스의 매뉴팩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1865년부터 지금껏 같은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건물 앞에 당도하니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이 지켜온 가치와 시간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부 투어에 앞서 프레스의 가이드를 담당한 본사 매니저 폴 워스(Paul Wirth)가 브랜드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했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고 싶은 열정이 충만했던 창립자 조르주 파브르 자코(Georges Favre-Jacot)는 1800년대 후반 당시 워치메이킹 체계가 전무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부품이 모여 하나의 메커니즘을 완성하는 원리임에도 시계 장인은 각자 고립된 작업실에서 홀로 연구에 몰두했고, 이는 무브먼트의 생산 및 발전 속도를 늦추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시계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인력 역시 전문 지식이 없는 농부가 대부분으로 정확성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르주 파브르 자코는 매뉴팩처 단지를 조성하고 한 지붕 아래 다채로운 워치메이킹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불러모았다. 시계 제작의 전문화와 산업화! 선견지명을 지닌 한 개척자에 의해 시계 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제니스를 대표하는 엘 프리메로 무브먼트

무브먼트의 디자인 과정

제니스 매뉴팩처 단지

전설적 워치메이커 샤를 베르모

제니스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또 한 명 있다. 바로 전설적 워치메이커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 1969년 탄생해 브랜드의 근간을 이룬 오토매틱 무브먼트 엘 프리메로의 개발에 앞장선 그는 1970년대 쿼츠 파동 당시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제니스를 구한 영웅이다. 기계식 시계의 몰락으로 폐기 처분 예정이던 제작 기구를 매뉴팩처의 후미진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다락방으로 옮겨 9년간 비밀리에 보관했다. 세월이 흘러 기계식 시계 산업의 부활과 동시에 그 기구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 전통을 이어가는 근간이 됐다. 그 덕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기술은 지금까지 제니스의 혁신성을 상징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투어 중간 에디터는 그 모든 일이 이뤄진 유서 깊은 다락방을 볼 수 있었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소박한 공간 안에 과거에 사용하던 기구를 비롯해 오래된 문서와 가구가 켜켜이 쌓인 먼지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치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한 한 인물의 노력 덕분에 지금껏 이 훌륭한 시계를 경험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다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늘날에도 제니스의 매뉴팩처에선 샤를 베르모와 같이 뜨거운 열정을 지닌 수많은 워치메이커가 시계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총 19개의 건물, 동선이 3.4km에 이르는 단지 내에서 시계에 들어가는 부품은 물론 이를 만드는 도구와 기계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제작한다. 일례로 중력을 컨트롤하는 모듈 하나를 개발하는 데 무려 60개의 새로운 툴을 고안했다고 하니 엄격한 품질관리를 위해 이들이 들이는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있다. 80명이 넘는 워치메이커가 철저한 분업과 협업을 통해 하나의 시계를 완성한다. 5명의 테크니컬 디자이너가 주도하는 R&D 부서, 도합 90년 경력의 장인 4명이 이끄는 툴메이킹 부서, 그 밖에 부품을 생산하고 이를 사용해 프로토타입을 만들며,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코트 드 제네브 패턴 같은 데커레이션을 담당하는 부서 등 시계 제작 과정에 따라 이에 해당하는 일을 분담하는 공간을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특히 3D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가상으로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문제점을 예상하는 일련의 작업을 보며 오랜 전통을 지닌 워치메이커임에도 더욱 뛰어난 시계 개발을 위해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매뉴팩처에서 가장 중요한 철칙이 부서 간 활발한 상호작용인 만큼, 기술과 디자인의 조화를 꾀해야 하는 무브먼트 조립 부서는 공장 단지 중앙에 위치해 특정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해결과 보완이 가능하도록 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에 판매한 제품의 수리를 담당하는 서비스센터, 그리고 각국에서 모인 워치메이커를 훈련하는 트레이닝센터를 찾았다. 이제껏 생산한 무브먼트와 시계를 아우르는 대규모 아카이브가 있기에 ‘제니스’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간 시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밖에 숙련된 기술과 노하우를 지닌 장인은 워치메이킹의 방향 설정에 지속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그 업적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는 후대를 양성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엘 프리메로, 엘리트 같은 세계적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제니스의 저력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정확하고 견고한 시계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집념. 150여 년 전 시작된 설립자의 숭고한 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에디터 이혜미 (hmlee@noblesse.com)
사진 제공 제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