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프로들
특정 분야의 최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분야의 손꼽히는 신인을 주목하는 것. 발레와 댄스 뮤직 그리고 문학, 현재 각 장르에서 가장 반짝이는 얼굴들을 만나보자.
날개를 편 소녀 백조, 발레리나 이은서
지난 1월, 발레리나 이은서는 만 18세의 나이로 국립발레단 54년 역사상 최연소 단원이 됐다. 이전 기록인 현 수석 무용수 김리회의 18세 4개월을 약 10년 만에 넘어섰다. 그런데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더욱 빛내는 이슈가 있다. 무용 정규교육 없이 실력만으로 단번에 국립발레단 정단원이 됐다는 것이다. 학벌과 나이를 뛰어넘은 그녀는 요즘 발레계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예로 통한다.
이은서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부산의 발레학원에서 발레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열망이라는 것을 느껴 본격적으로 발레에 몰입한 것은 중학교 2학년. 처음엔 단순히 발레리나가 예뻐 보여서 발레가 좋았지만 일상에선 할 수 없는 동작을 무대에서 표현하고, 연습을 통해 점점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큰 재미를 느꼈다. 보통은 예중, 예고를 졸업하고 국내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순서지만 공부와 발레를 병행하던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학교를 그만두고 오롯이 무용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학교 수업을 병행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검정고시 준비와 발레 연습을 함께 소화하며 밤낮없이 연습한 결과 지난해에 베를린 국제 콩쿠르와 코리아국제발레콩쿠르에서 은상을 차지했다. 곧이어 국립발레단 단원 선발 오디션에서도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올해 국립발레단 정단원으로 입성한 10명 중 중단원을 거치지 않은 여자 발레리나는 그녀가 유일하다.
이렇게 이력을 살피고 나니 그녀만의 특별한 재능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국립발레단 강수진 예술감독이 꼽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작고 개성 있는 얼굴과 긴 팔다리, 가는 목선이 균형을 이룬 체격 조건이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열정.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뛰어넘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테크닉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저로서는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고 동작을 아름답게 연결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침 11시에 발레단에 출근해 오후 6시에 공식 스케줄을 마무리하고 밤 10시가 넘도록 연습과 복습을 이어가는 일상이 그녀의 근성을 말해준다. 그녀는 지난 4월 초 <라 바야데르>에서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로 데뷔 무대를 치렀다. 수십 명의 출연진과 함께 완성한 군무는 새내기 단원인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다.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이자 신입 단원이 된 그녀는 발레단의 일정을 따르는 것만으로 신이 난다고 한다. 5월 중순 라오스에서 열린 국제 발레 교류 프로그램 ‘코리안 내셔널 발레 갈라(Korean National Ballet Gala)’에 참여했고, 이어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펼칠 <말괄량이 길들이기> 무대에도 오를 예정이다. 추후엔 대학 진학이나 해외 활동도 생각하겠지만 당분간은 발레단 생활에 집중할 계획이다.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 단기적 목표다. 발레계에서 새로운 스토리를 써 내려가는 그녀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대중음악계 뉴 크리에이터, 작곡가 맥시마이트
<프로듀스 101>은 못 봤어도 ‘픽 미(Pick Me)’를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거다. 맥시마이트(Maximite), 최대를 뜻하는 ‘맥스(max)’와 다이너마이트를 합성한 이름처럼 그는 ‘픽 미’ 하나로 단숨에 신예 작곡가로 주목받으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케이블TV 오디션 프로그램의 미션곡으로 출발해 전국의 무대를 접수한 이 히트곡 메이커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
사실 그는 클러버의 사이에서 요즘 핫하기로 유명한 DJ다. 스무 살에 활동을 시작해 벌써 8년째, 강남의 손꼽히는 클럽에서 활약하며 그날의 분위기를 진두지휘해왔다. 그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디제잉 실력 덕분이다. 주 종목은 매시업(mash-up). 서로 다른 2곡을 믹스해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시키는 테크닉이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땐 일렉트로니카에서 EDM(Electronic Dance Music)으로 트렌드가 넘어오는 시기였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대부분이 하우스나 테크 하우스처럼 특정 취향에 집중한 곡이더라고요. 보다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좋은 음악’에 대한 확신은 어린 시절 화려한 이력에서 비롯한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네 살 때부터 프로 비보이(B-boy) 생활을 시작한 그는 무언극 뮤지컬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의 초연 무대, 가수 비의 ‘I Do’ 뮤직비디오 등 각종 매체에서 춤과 연기를 선보여왔다. 어려서부터 늘 음악과 춤을 가까이하다 보니 좋은 사운드를 캐치하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그 결과 2014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트렌디한 DJ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올봄과 여름엔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 코리아(UMF) 등의 대규모 페스티벌부터 전국의 대학 축제까지 많은 자리에 초대받았다.
재주꾼 맥시마이트가 DJ에서 작곡가로 활동 영역을 넓힌 건 현재 소속사인 마이다스이엔티 김창환 대표의 영향이 크다. EDM과 댄스 뮤직 분야에서 일찌감치 가능성을 본 김 대표가 그를 영입하며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후 김창환을 비롯해 맥시마이트, DJ Koo(구준엽) 등 5명의 프로듀서와 EDM DJ가 ‘마이다스티(Midas-T)’라는 팀으로 활동하며 댄스 뮤직 장르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 화려한 포문을 연 것이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연습생의 미션곡 ‘픽 미’와 ‘24시간’. 기존 걸 그룹이 주력하던 장르에서 벗어나 EDM 반주에 단조로우면서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올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곡이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디스(dis)’ 문화가 힙합 정신의 중심에 있다면 EDM은 밝은 분위기에서 다 같이 즐기자는 게 핵심이에요. 대중성과 음악성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 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은 것 같아요.”
그가 작업한 곡들이 대중적 인기를 모으면서 EDM과 댄스 뮤직을 비롯한 클럽 음악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의 바람 역시 음악에 대한 대중의 시각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것. 음악과 춤의 다양성 그리고 한국 댄스 뮤직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열정을 응원한다.
미래를 도모하는 젊은 작가, 소설가 김엄지
소설가 김엄지는 지난해 11월 첫 단편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와 첫 장편소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를 잇따라 출간했다. 젊은 작가답게 개성 넘치는 제목과 디자인이 눈에 띄는 그녀의 소설은 알고 보면 특별한 인물과 사건이 없어서 더 특별하다. 거친 표현과 짧고 날렵한 문장, 읽고 나면 묘하게 계속 생각나는 이야기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특정 사건 없이 평범한 인물의 일상을 담은 내용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고, 습작을 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이후 그녀가 스물세 살이 되던 2010년,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과 동시에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등단작은 출간한 단편집에 실린 첫 번째 작품 ‘돼지우리’.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거부하고 유일한 낙인 먹는 행위를 좇아 고깃집에 취직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내용의 ‘돼지우리’에 이어 ‘삼뻑의 즐거움’, ‘기도와 식도’, ‘영철이’ 등 총 9편의 소설을 수록한 단편집은 등단 이후 지금까지 작품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 책으로 5월 말 계간 <21세기문학>이 주관하는, 그해 가장 뛰어난 첫 창작집을 시상하는 제23회 김준성문학상을 받는다. 등단 이후 꾸준히 활동한 결과 벌써 세상에 나온 소설만 17편. 그중 가장 최근작이자 첫 장편인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는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여덟 번째 시리즈로 2015년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게재된 글이다. 이번엔 아예 주인공의 이름도 없애고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반복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의 건조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등장인물이 너무 튀면 인물만 각인될 것 같아서 이니셜로 처리했어요. 식욕, 수면욕, 성욕 등 기본적 욕구만 추구하며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동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드러냈죠. ‘반복’이라는 사실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 그것을 지옥으로 그릴 생각은 없었어요. 그 자체로는 비관할 것도 없고 그저 현실을 버티면서 살아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젊은 작가의 시각이 묻어나는 지극히 사실적인 스토리와 곳곳에 등장하는 엉뚱한 문장이 어우러져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는 내내 흥미를 유발한다.
현재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왕십리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중이다. 문학동네 레이블 중 하나인 난다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로 올가을쯤 왕십리에 대한 그녀의 단상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불과 1년 사이 출간과 문학상 수상, 그리고 다음 작품과 관련한 구체적 행보까지 마련해둔 차세대 프로 작가. 그렇다면 소설집 제목처럼, 그녀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은 뭘까? “단순해요.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기분 관리에 힘쓰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씻은 뒤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품고 한숨 자는 거죠.” 이런 평범한 삶에서 탄생한 기발한 작품의 퍼레이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에디터 | 임해경 (hklim@noblesse.com)
사진 | 김제원 헤어 | 최현정, 건희(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청담 EAST) 메이크업 | 가희(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청담 EAST) 의상 협찬 | 렉토, 레페토 어시스턴트 | 정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