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위한 예술가
자신의 장서를 특별하게 대하는 장서가는 오래된 책을 들고 예술 제본 공방을 찾고, 책의 어귀에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표식을 남긴다. 이들을 위해 예술 제본가와 장서인 제작자가 존재한다.
‘예술 제본 공방’의 손성우 대표는 영남 지역에서 유일한 예술 제본가다. 책의 단면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3일간 압축기로 종이를 누르고 톱으로 표면을 정리한다.
책, 예술이 되다
예술 제본가 손성우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하기 전, 일반 서민은 거의 문맹이던 시대에 왕족이나 궁정의 귀족은 자신의 성서와 기도서를 상아와 금으로 장식하고, 수도원의 사자생이 손으로 일일이 써서 만드는 ‘사본’을 읽었다. 그렇게 만든 책은 결국 소유주의 권력과 명예를 상징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특별히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는 가장자리를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삽화를 넣는 ‘채식 사본’을 특별히 주문해 책 문화를 발전시켰다.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그 옛날 사자생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이제 예술 제본가다. 손으로 직접 쓰진 않지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일일이 손으로 책장을 분리해 풀을 뜯어내고, 가죽을 무두질하고, 손바느질로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예술 제본 공방’의 손성우 대표는 영남 지역에서 유일한 예술 제본가다. 2000년대 초반 프랑스의 예술 제본을 소개한 故 백순덕 선생 이후 그녀의 제자인 렉또베르소 조효은 대표가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예술 제본’이라는 단어는 생소하다. 손성우 대표는 조효은 대표에게 제본을 배웠고, 18세기 유럽의 제본법을 따르고 있다. “예술 제본이 가장 꽃핀 곳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문화가 발전한 나라입니다. 나라마다 책을 엮는 방법이나 소재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죠.” 가령 프랑스는 책의 내지와 표지를 연결하기 위해 노끈을 사용하지만, 북미 지역에서는 천이나 가죽으로 내지를 덮은 뒤 표지를 붙여 연결한다.
예술 제본은 책을 필사하는 것만큼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다. 특히 상업 제본한 책을 다시 장정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일일이 낱장을 뜯고 핀셋으로 풀의 찌꺼기를 제거한 후, 보존을 위해 약품을 도포한다. 그러고는 낱장이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압축기에 넣고 일주일을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천연 염색과 자연 건조를 거쳐 제본용으로만 사용하는 가죽을 일일이 손으로 펴고, 눌린 책을 굵은 실로 바느질하듯 묶는다. 표지 장식은 그다음 일. 얇은 금박으로 아르데코 스타일 문양을 만들거나, 헤드밴드(책이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책등의 아래위에 수놓는 것)를 장식하는 것은 모두 의뢰인의 취향에 따른다. “대체로 제가 표지를 장식하는 가죽은 프랑스에서 제본용으로 생산하는 ‘샤그랭’이라는 염소 가죽입니다. 샤그랭은 표면이 단단해 외부자극에 강하고 책 내지를 효과적으로 보호해 주는 역활을 합니다.” 이렇게 오래돼 누렇게 변한 장서 역시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 보존 처리가 완벽하고, 제본이 잘된 책은 500년 이상 유지할 수도 있을 만큼 견고하다.
우리는 새 옷을 입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책을 만나지만, 예술 제본은 생각보다 고단한 과정을 따른다. 책의 거친 면을 정리하는 톱, 정확한 비율을 재는 다양한 철제 자, 압축기까지 도구 역시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굳은살이 곳곳에 박인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화려한 장식이 책 고유의 물성을 가려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책이 따라올 수 없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종이의 촉감과 같이 종이책의 고유한 구성을 유지하는 것이 예술 제본가의 첫 번째 영역이지요. 인쇄물의 가치를 극도로 높이고 기록을 보존하는 데 자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술 제본가입니다.” ? ? ?
우리나라에 예술 제본을 소개한 故 백순덕 선생의 작품

연한 염소 가죽 ‘샤그랭’과 동유럽에서 가져온 마블 페이퍼로 장정한 책

꼬박 일주일이 걸리기도 하는 가죽 다듬기 과정

손수 바느질하듯 꿰매 더욱 정교한 책, 헤드밴드용 실
경남 하동의 ‘연각재’에서 활동하는 전각가 김진성 대표
책, 나의 특별한 호사
전각가 김진성
장서인(藏書印), 책의 소유자가 자신의 책이라는 표시로 찍는 인장이다. 유럽에서는 판화로 만든 장서표가 발달한 반면,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는 장서인 문화가 꽃을 피웠다. “서양으로 치면 서명의 개념이 바로 인장입니다. 그것을 책에 찍는 것이 바로 장서인이고요.” 경남 하동 연각재의 김진성 대표는 전각가로 인장과 장서인을 만든다.
장서인은 자신의 소유임을 밝히기 위해서도 사용하지만, 때로는 소장한 장서를 과시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금과옥조로 삼는 고사성어를 새겨 교훈적 목적으로 찍기도 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부터 학자에 이르기까지 장서인을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질에 경도되지 않고 청빈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은 양반이 유일하게 욕심을 부린 대상이 바로 책이다. 유명한 문인들은 자신이 직접 장서인을 제작하는 취미를 즐기기도 했는데, 현대에는 어떤 이의 장서인이 찍혀 있느냐에 따라 책의 유통 경로와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하던 장서인은 점차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성을 띠게 됐다. 돌과 금속, 나무와 흙을 이용해 각 재질의 색채와 조형적 장점을 살리면서 글귀를 균형 있게 배치하는 것은 장서인이 지닌 독특한 아름다움이다. 김진성 대표의 장서인은 하나의 조각 작품 같은 멋이 있다. 하동으로 오기 전 서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의 이력이 독특한 장서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옛날의 장서인은 몸체는 거의 장식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인(印)’ 자를 넣는 것에 그쳤죠. 저는 현대적 방법으로 장서인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문자보다 그림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생각했고, 장서인의 몸체를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죠.” 그는 생동감 넘치게 채색한 새와 나무 그리고 산과 꽃을 몸체에 새기고, 그 밑에 소유주의 이름을 적어 꾸민다. 장서인 자체가 하나의 수묵화인 셈이다. “사물을 그림 그리듯 표현한 상형문자인 한자의 성질을 이용합니다. 가령 의뢰인의 이름에 ‘서로 상(相)’ 자가 들어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 나무(木)와 눈(目)을 그려 넣는 식이죠.” 그리고 이름이나 고사성어 등을 전서체로 새긴다. “의뢰인 중에 한국 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한글을 매우 사랑해서 꼭 장서인을 한글로 만들어달라고 하셨죠. 특히 외국인이 장서인 문화를 매우 신비하게 여겨요. 이름을 쓰는 게 아니라 찍는다는 개념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가져온 진귀한 돌, 그리고 청정한 하동의 자연에서 얻은 대추나무와 화양목, 단풍나무는 그에게 가장 좋은 소재다. 나무는 최소 2년을 말려 단단하게 한 뒤, 도안대로 판다. 그렇게 형태를 잡은 후에는 먹을 한 번 입히고 아크릴로 마감한다. 김진성 대표는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하루에 한두 개 정도만 제작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제 장서인으로 인해 많은 애서가가 책장을 넘기면 나타나는 하얀 백지 위에 자신의 자취 하나 남기는 즐거움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돌에 새긴 장서인

부부가 주문한 인감 겸용 장서인

상형문자인 한자의 멋을 살린 장서인

불가리아의 소피아 대학 교수는 자신의 종교인 그리스정교회에 따라 장서인에는 새를 새기고 그 날개에 십자가 형상을 추가했다.
에디터 | 신숙미(프리랜서)
사진 |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