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에서 파랑으로
나주 가는 길, 한창 물오른 봄이 연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차로 서울에서 네댓 시간을 가면 아늑한 골목에 ‘쪽빛 장인’ 국가무형문화재 정관채 염색장이 있다.

쪽은 몇 번을 짜고 얼마나 헹구느냐에 따라 색 농도가 달라진다.
“운명이란 걸 느꼈지.” 쪽물 큰 항아리 앞에서 들은 수줍은 혼잣말. 정관채는 미대 1학년 시절 쪽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염색을 가르치러 온 스승 박복규는 그가 나주 무명천을 일컫는 ‘샛골나이’로 유명한 샛골(청림마을) 출신인 것을 알고, 네가 한번 해보라며 그의 스승에게 받아둔 쪽씨 한 줌을 쥐여주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쉽고 싼 화학 염색제의 등장으로 사라지다시피 했던 쪽빛이 제대로 꽃피우기를 기다린 걸까. 그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는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았다. “솔직히 쪽물은 누구도 하지 않을 ‘블루오션’ 분야라고 느꼈어요. 지금 염색장 자리가 제가 나고 자란 곳인데, 이 일대가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어요. 영산강 물이 불어 쓸고 가면 남아나는 작물이 없는데, 쪽은 괜찮았거든.” 농사꾼 아들이라 쪽을 심고 키울 줄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쪽물 들이는 법도, 무명천 짓는 법도 알았다. 스승은 그런 그가 적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 물들인 천을 보고 감탄하던 옛 얘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나리처럼 물을 좋아하고 가지가 따로 자라는 쪽은 발효될 때는 간장처럼 짭짤한 냄새를 풍기는 초록색이다가 물들인 뒤 공기를 만나면 파랗다 못해 검붉은 빛이 오른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색을 띠지만 벌레를 쫓아내고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옛 부자들은 혼수 이불에도 쪽물을 썼다고 한다. 열이 많은 갓난아이 배냇저고리도, 베갯잇도 쪽물을 들이면 고급스러워졌다. 그 과정을 찾아내고 재현하다 보니 정관채는 2001년 마흔 두 살에 최연소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가 됐다. 일찍 시작했다고 당연한 일은 아니기에 뿌듯하지만, 한창 시절을 내내 시퍼런 손으로 보내 힘들기도 했다.
“후회가 왜 없겠어요. 전통 방식으로 만든다는 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에요. 쪽은 7월에 거둬 초복, 중복, 말복에 맞춰 만들어야 제일 좋게 나와요. 폭염 속에서 큰 항아리에 넣고 30분 이상 젓다 보면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들거든. 그때는 이걸 내가 왜 하나 싶지.(웃음)” 1만 평의 쪽밭을 새벽 4시 30분에 매일 찾아 가꾸고 거두기를 반복해야 한다. 마음을 잘 쓰지 않으면 색도 그만큼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나, 40여 년간 하루도 어김없이 해오는 것은 자기가 선택해야만 할 수 있는 일. 대학 시절부터 염색을 배우러 서울을 오가며 밭에 씨를 뿌리고 키우고, 고려 시대 자료를 뒤지고, 옛 문갑 안쪽에 남은 쪽물 종이를 찾아 수집하면서 홀로 준비해왔다. 모은 공예품은 자신이 만든 생활 소품과 같이 염색장 한쪽 전시관에 두었다. 그런데 정관채의 작품은 우리나라 문화재청이 전통 공예 홍보차 참여한 두어 곳 외에는 판매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은 겸업 금지여. 사업자를 못 내요.(웃음)”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서 장인의 거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물들인 실크 스카프는 값 이상의 힘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나는 장인으로서 ‘생각’을 높이 사지 않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뭔가 거창하게 일부러 드러낼 필요없다는 거지. 인터넷 시대에 뭘 새로 만들어도 전국에서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니까. 안 그래?” 살 수 없는 대신 그는 와서 배우고 가져가라고 한다. 지금 출근 중인 나주 영산고교 아이들은 미술 선생님이 문화재라고 조금은 달리 봐주는 것 같아 종종 염색 체험을 하게 한다. 어른도 그의 수업은 무료다. 매년 여름 정관채 염색장에서 1박 2일 동안 공개 캠프를 하는데, 전국에서 신청자가 몰려 경쟁이 치열하다.
“나는 이 일을 하기로 했잖아.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려면 다른 것이 핑계가 되지 않아야 해요.” 사람들은 지금도 종종 물어본다. 문화재가 됐는데, 계속 출근할 필요 있느냐고. 20대엔 미술 선생이 되었고, 일하는 아내를 만나 염색 장인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문화재가 되었다고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가정이 있는 예술가를 현실적 이유로 흔들 일은 수없이 많다. 현실에 두 발을 둔 채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관조적 성격은 살수록 깊은 쪽빛이 드러나도록 가만히 두었다. “나 혼자 대한민국을 이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간혹 예술의 순수성을 쉽게 생각하거나 사업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분위기가 경제 논리로만 돌아가는 경우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다 내 마음 같겠어요?”

1 쪽물에 천을 담갔다 빼는 모습. 2 쪽물을 들인 베개들.
환경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쪽물 염색은 전통 공예에 갇히지 않고 생활 취미로 알려졌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천연 염색은 친근해졌다. 그는 이 사실이 반갑지만, 자신이 심은 쪽씨는 스승의 스승을 거쳐 넘어온 유산이라 여긴다. 씨알 하나 주기도 어렵고 조심스러워 허락을 얻어야 마음 놓이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그가 일부러 쪽씨를 주지 않더라, 오해를 산 적도 있다. 사실은 갓 뽑아놓은 무명천처럼 부드러운 사람이건만, 그만큼 해온 일이 독보적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가끔 여행을 하거나 제자들 일로 채운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날도 그와 제자들이 참여한 ‘청출어람2019, 나주 천연 염색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5월 말까지 하는 <천연 염색 100인전> 작가 중 37명이 제자다.
“예술 활동의 생명은 창작이에요. 어제 만들었다고 해서 오늘도 같은 것이 나오지 않죠. 재료나 방법에 따라 늘 달라져요. 뭐라 설명하기 전에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쉬기보다는 각 나라의 집성촌이나 새로운 것을 찾아요. 절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올해 가르친 것을 내년에 또 가르칠 순 없지요. 제자들에게 뭘 다르게 가르쳐야 좋을지 찾고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을 거친 이들로부터 좋은 소문이 들릴 때다. “기술이든 사회생활이든 여러 면에서 나보다 더 잘하고 있으면 좋아요. 공방을 차려 활동하던 제자에 대한 칭찬이 다른 학생을 통해 들릴 때가 있거든요. 기능문화재 59개 분야에서 염색장이들이 유독 잘 어울리고 나무랄 데 없어요. 그 기쁨이 가장 크죠.” 그는 여전히 쪽이 재미있다. 오는 8월이면 쪽의 형제쯤 되는 인디고를 보러 인도에 간다.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 포럼에도 종종 참석한다. 해외의 많은 염색 장인도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함께 고민한다. 이야기 끝에 그가 불쑥 물었다. “정년 은퇴가 1년 반쯤 남았는데, 나 뭐 할 것 같아요?” 계속 교육업을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청바지 말고 쪽바지 만들려고 그래요. 사람한테 쪽만큼 좋은게 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지금 좋은 직물과 패턴을 찾고 있다. 크리스티 경매 중계에 나온 리바이스가 부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잘 담근 쪽물의 초록이 신선한 공기를 만나야 파랑이 되듯, 정관채도 그렇게 다시 파란 젊음을 입어간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