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진은 쉽게 오지 않았다
최여진의 얼굴을 떠올리면 기계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매일 도시의 밤을 향유하는 파티 퀸 같은 느낌이랄까. 한 번도 결핍을 느껴본 적 없을 것 같은 이 여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결코 쉽게 오지 않았다고, 아등바등하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이제 막 드라마(<라이더스: 내일을 잡아라>) 촬영이 끝났다. 이젠 좀 한가한가? 곧 하와이로 떠난다. 무려 3년 만에 처음 얻은 휴가다. 연기하랴, MC 하랴, 광고까지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너무 지친 상태다. 이 드라마도 하지않으려 했는데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요즘의 청춘을 다루는 이야기 전개가 꽤 현실감 있어서 꼭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의 비중이 큰 드라마는 아니었다. 비중이 작긴 했지만, 그래서 했다. 주연이었다면 안 했을 거다. 말했지만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온몸을 불사를 에너지가 없었다. 큰 역할도 아니고,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만족스러운 면이 있었다.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좀 놀랐다. 생각보다 출연작이 많아서. 다작을 한 편이다. 잘된 작품 반, 안 된 작품 반이다.
하지만 맡은 역할은 거의 비슷하다. ‘도시적이고 섹시한 여자’가 당신의 정형화된 캐릭터 같다. 나도 안다. 그런 역할이 잘 어울린다는 걸. 그러니 늘 그런 이미지의 역할만 들어오는 거겠지? 하지만 이제 그런 캐릭터를 맡으면 힘들다. 멋있는 척 폼 잡는 역할은 나 스스로도 지겨울 정도라. 하하.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에 개봉한 영화 <돼지 같은 여자>에서 당신의 모습이 좋았다. ‘촌년’ 이미지가 뜻밖에 어울리더라. 그 영화 봤나?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흥행에 실패해서 아쉬운 작품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동안엔 정말 즐거웠다. 안 꾸미고, 흙먼지 팍팍 묻히고, 도시적 이미지 따위다 버리고. 그런데 오히려 안 꾸며서 더 섹시하지 않던가?
맞다. 그래서 더 섹시했다. 고무줄 바지 입고 진흙탕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야해 보일 줄 몰랐다. 하하. 감독님도 내 연기를 많이 좋아했다. 그래서 연기에 좀 더 자신감도 생겼고.
사실 당신이 연기를 못하는 배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엄청나게 잘한다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하하.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를 거론할 때 날 떠올릴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배우가 연기력을 보여주려면 어느 정도 분량이 확보돼야 하는데, 이제까지 그만한 분량을 가진 역할이 없었다. 그래서 어필할 기회도 그만큼 적었던 것 같고. 연기에 대한 갈증은 늘 있다.
최여진을 생각하면 배우보다는 MC, ‘몸짱’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르긴 한다. 아무래도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몸이니까.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몸매로 먼저 주목을 받은 건 사실이다. MC 역할을 맡다 보니 당당한 이미지도 생겼고. 그런 것이 쌓여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불만은 없다.
스스로는 배우로 불리고 싶나? 아니면 모델이나 MC? 모델로 데뷔하긴 했지만, 난 스스로 한 번도 모델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고, 모델 일을 시작한 것도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나를 모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드라마를 많이 해도 그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하긴, 내가 봐도 내가 모델 같을 때가 많으니. 하하.
모델로도 꽤 성공한 케이스 아닌가? 성공했다.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쇼에 메인 모델로 섰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모델 최여진을 찾던 그때, 그만뒀다. 모델 일을 계속하면 결국 모델로 끝날 것 같아서. 당장 수입이 없어지더라도 배우라는 이미지를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지만 그때는 그만큼 절박하게 연기를 원했다. 사실 이제는 날 부르는 호칭에 초연해졌다. 내가 아무리 배우로 보이고 싶다고 해도 그건 내가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더라. 주어진 환경에서 실수하지 않고 내 이미지를 유지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실수라는 단어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데뷔 후 지난 16년 동안 스캔들이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캔들 날 만한 짓을 안 하고 다녔으니까. 난 연예계에 데뷔하기 전부터 조심하고 다녔다. 철없는 시절의 실수가 미래에 배우 되는 길을 가로막을까 봐. 사실 나 클럽 좋아한다. 흥이 많고 춤추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는 클럽에 가지 않았다. 난 캐나다 교포고, 모델이고, 이미지도 강하니까 자칫 잘못하면 금세 추문이 날 것 같았다. 그게 내 가능성을 막을까 봐 무서웠다.
스스로를 억누르면서 여기까지 온 건가? 분명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는 생각에? 그런 셈이다. 어릴 때부터 나라는 사람은 주식으로 치면 장기 투자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20대보다 30대에, 30대보다 40대에 더 잘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랄까. 사실 20대에는 모두 예쁘지 않나? 모두 예쁜 그때는 내가 또래 배우들 사이에서 튀기 힘들었다. 솔직히 내가 엄청난 미인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여배우들과 차별되는 나만의 개성, 나만의 느낌은 분명히 있다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 빛을 발할 순간이 올 거라고.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단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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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최여진은 어땠나? 조급했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고, 그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마음을 좀 더 편하게 갖게 됐다. 배우로서 성공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열심히 일만 한 20대에 대한 보상은 있었나? 있다. 집이다. 난 백이나 옷보다 집을 갖고 싶었다.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모았고, 그 돈으로 엄마를 위한 집을 샀다. 엄마가 캐나다에서 날 혼자 키우셨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알고 있다. 집을 산 것으로 작은 보답을 할 수 있게 됐다.
20대는 좀 비틀거리기도 하고, 허술하게 살기도 하는 시기다. 너무 팍팍했던 청춘이 아쉽지 않나? 캐나다에서 한국에 올 때 단돈 100만 원을 들고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바닥부터 시작했다. 모델 오디션 보러 강남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니면서도 돈 아까워 걸어 다녔다. 그때 패션 디자이너들 작업실은 어쩜 그렇게 언덕 구석진 곳에만 있던지, 정말 힘들었다. 하하. 그렇게 한 계단씩 올라와 지금의 내가 됐다. 20대에 누려야 할 걸 많이 놓치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한때 잘나간 사람, 너무 많지 않나? 그런데 20대를 허비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난 20대를 허투루 쓰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도 좋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배우도, 모델도, MC도 다 가능하니까.
이렇게 치열한 사람이었나 싶다. 최여진은 왠지 시련 같은 게 없었을 것 같거든. 사실 초반에 안티팬이 꽤 있었다. 이유 없이 그냥 날 싫어하는 사람들. 하하. 물론 내가 썩 친근한 이미지가 아닌 건 인정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늘 단체 생활이 불편했다. 아웃사이더 같은 면이 있다.
무리 속에 있으면 리더가 될 사람처럼 보이는데? 사자자리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좀 나서는 기질이 있고, 어쩔 수 없이 튀는 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내 의도와 달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단체 생활이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새로운 사람 사귀는 걸 주저하는 편이다. 마음 터놓는 소수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이제 한국 나이로 34세가 됐다. 여자로서, 배우로서 조급한 마음이 있나? 조급하다. 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내 나이를 생각하면 깜짝 놀란다. 시집가는 주위 동생들을 보면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고. 하지만 아직 일이 즐겁고, 나를 찾는 곳도 많다. 지금은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올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내 꿈이 사극에 출연하는 거다. 다행히 지금 얘기가 오가는 건이 하나 있는데, 결과는 모르겠다. 내가 사실 굉장히 동양적인 얼굴이거든. 그 역할을 따낸다면 내 연기 인생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다.
인터뷰 끝나면 뭐 하나? 집에 가서 빈둥거릴 거다.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이고, 걱정거리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그걸 좀 바꿔보려고. 최소 한 달만이라도 나태하게 살아보는 게 지금 내 목표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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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김제원 헤어 김원숙 메이크업 배해랑 스타일링 김원미